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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자존심인 진시황 만리장성의 비밀을 벗긴다 (5부)

맹강녀 설화는 진시황 (만리)장성의 위치를 말해준다.

성훈 컬럼리스트 | 기사입력 2010/05/12 [17:25]

중국의 자존심인 진시황 만리장성의 비밀을 벗긴다 (5부)

맹강녀 설화는 진시황 (만리)장성의 위치를 말해준다.

성훈 컬럼리스트 | 입력 : 2010/05/12 [17:25]
아래 글은 본 시리즈의 제 (5부)입니다.
(1부) 섬서성 서안 서쪽까지 점령한 단군조선
(2부) 은나라를 멸한 주나라도 단군조선의 제후국
(3부) 낚시로 천하를 낚은 강태공의 조상은 누구인가?
(4부) 강태공의 고향으로 본 단군조선의 강역은? 

(4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왕(武王)을 도와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운 일등공신은 동이족인 강태공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강태공의 고향을 동해(東海)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중국 인터넷 백과사전의 자료에 따르면 강태공의 고향은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 서북 12Km에 있는 태공천진 여촌(太公泉镇 吕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주나라의 동쪽 경계는 당시 발해(渤海) 또는 동해(東海)라고 불렸던 대야택이다. 발해로 불린 대야택은 현 중국의 내해가 아니라 하남성과 산동성의 경계에 있는 가로 100Km X 세로 300Km의 엄청난 크기의 내륙호수였다. 지금은 산동성 서쪽에 동평호, 독산호, 미산호, 남양호 등으로 나뉘어져 남아 있으나 예전에는 바다로 불렸던 큰 내륙호수였다. 사마천의 <사기> 기록으로 보면 당시 강태공의 고향인 하남성 위휘현까지 대야택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   황하 북부 하남성의 지명. 강태공의 고향인 신향시 위휘현은 위하 강변에 있다.  이곳에 맹강녀의 전설도 있다.  

진시황 때 쌓은 장성의 원래 위치는 어디인가? 

현 중국의 자랑이며 상징은 달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만리장성이 중국의 서쪽 감숙성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수도인 북경 북쪽을 지나 동쪽으로 산해관에 이르는 것으로 진시황 때 쌓았다고 알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이러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관이 아니라 요녕성 단동 또는 한반도 북부 평안북도까지였다고 제멋대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주장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다.

▲     중국 역사교과서에 나와있는 진시황의 장성은 한반도 평양까지 들어와 있다.  이 지도는 역사왜곡을 위해 확대.과장된 것으로 실제로는 이렇지 않다.
▲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작하면서 사회과학원에서 만든 엉터리 역사지리도. 만리장성이 청천강까지 들어와 있다.

진시황은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엄청난 인력을 동원해 장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실제 진시황이 쌓은 장성은 지금의 위치가 아니고 산서성 최남부에서 시작하여 황하북부 하남성에 이르는 자그마한 장성이었는데 이것이 역사왜곡을 위해 확대 과장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중국의 주장은 진시황 때부터 고대 중국의 영토가 현 만리장성 안쪽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엉터리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낱낱이 밝히고자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국 4대 민간전설의 하나로 유명한 맹강녀(孟姜女)의 유적이며, 고죽국의 왕자인 백이.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首陽山)인 것이다. 이번 (5부)에서는 맹강녀의 유적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강태공의 고향인 황하북부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에는 강태공의 유적 외에 또 하나의 유명한 유적이 있는데 바로 진시황 만리장성의 민간설화로 유명한 맹강녀곡장성(孟姜女哭長城)이 그것이다. 중국은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위하여 원래 하남성 위휘현에 있어야 할 맹강녀의 사당을 지금은 하북성 진황도시 산해관에 세워 놓았는데, 산해관 장성이 진시황 때 쌓은 만리장성이라는 말도 안 되는 역사왜곡을 자행하기 위함이었다. 
 
▲  북경대학교재에 나와있는 진나라 장성은 감숙성에 있다.  이 지도도 역사왜곡이 많이 되어있는 지도이다.
▲  섬서성 북단 유림시에 있는 진장성 유적. 이 유적은 진시황의 장성이 아니다.
중국의 장성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 때 쌓은 진장성(秦長城)은 주로 연나라 장성과 제나라 장성을 보수해서 연결한 것이라 한다. 그 제나라 장성을 보수하는 공사장에 맹강녀의 남편이 고향을 떠나 장성노역에 강제 동원된다. 공사장에 끌려간 남편으로부터 오랫동안 연락이 없자 맹강녀는 남편의 소식이 궁금하여 고향을 떠나 노역장을 직접 찾아가기로 한다.

아래는 맹강녕의 고향을 설명한 중국 인터넷 백과사전의 자료이다.
(원문) 孟姜女故里(맹강녀고향) : 孟家塬村是我国古代四大民间传说之一“孟姜女”的故里. (맹가원촌은 중국 고대 4대 민간전설인 맹강녀의 고향이다) 该村位于王益区黄堡古镇东2公里的塬顶,紧贴西-铜-黄一级公路,是祭拜黄帝陵的必经之地,东靠著名陶瓷古镇陈炉,南依药王故里及药王山,西望佛教胜地香山,北至唐避暑行宫和玄奘圆寂地玉华山,与脚下的耀州窑博物馆同处于西安旅游中心线的二环带上。该村人文底蕴丰厚,自然气候生态条件优越,“孟姜红”品牌的柿子,桃等品种已获得国家农产品金奖,并远销海外。

이러한 맹강녀의 고향은 섬서성 서안 북쪽에 있는 동천시 왕익구(銅川市 王益區)에 있는 맹가원촌으로 황제헌원의 묘가 있는 부근이다. 우선 현재 중국의 주장대로라면, 섬서성 서안 북쪽이 고향인 맹강녀의 남편이 수천 리 떨어진 멀고도 먼 하북성 동쪽 끝 진황도시 산해관장성의 노역에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섬서성에 사는 사람을 하북성 동쪽 끝 공사장에 동원할 정도로 하북성에는 사람이 전혀 안 살았다는 말인가? 즉 맹강녀의 전설은 진나라 장성의 공사장이 맹강녀의 고향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몇날 며칠을 걸어 장성 공사장에 도착한 맹강녀는 무너진 장성 안에서 죽어있는 남편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대성통곡을 하고 만다. 
 
▲  맹강녀의 고향은 섬서성 서안 북쪽이다. 아떻게 저 멀리 산해관까지 남편이 노역에 동원될 수 있으며, 맹강녀가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저 멀리까지 혼자 찾아갈 수 있단 말인가?  맹강녀가 간 곳은 하남성 위휘현에 있는 제나라 장성 보수 현장이다. 맹강녀는 여기서 진시황을 만났다.

어찌나 슬프고 크게 울었던지 마침 그곳을 지나던 진시황이 맹강녀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찾아와 달랜 후 남편의 장사를 성대히 치러준다. 그리고는 맹강녀의 미모에 반해 그녀에게 청혼을 하나 맹강녀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진시황의 청혼을 거절하고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 떨어져 죽었다고 하는데 그 맹강녀곡장성이 바로 강태공의 고향인 하남성 위휘현에 있다. 
 
그리고 그런 맹강녀의 이름을 딴 맹강녀하(孟姜女河)란 강이 위휘현 근처에 있다. 중국 인터넷 백과사전에 따르면, 맹강녀하는 하남성 신향시 서남에서 나와 동북쪽 위휘시에서 위하로 들어가는 강으로, 비올 때만 물이 흐르며 평시에는 형태만 있는 하천이다. <위휘부지>에 따르면, 맹강녀가 남편을 생각하며 통곡하는 전설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  남편의 시신을 보고는 통곡하는 맹강녀를 보고 첫 눈에 반한 진시황 . 이러한 일이 일어난 곳은 하북성 산해관이 아니라 하남성 위휘현이다.

▲  하남성 위휘현을 지나는 맹강녀하에 대한 중국 인터넷 백과사전의 설명.
▲  중국 지도에 있는 맹강녀하는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을 지나며 비올 때 심수와 위하를 연결하는 작은 하천이다.

맹강녀의 전설로 보더라도 제나라는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던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맹자가 말했듯이, 하나라 뒤의 은나라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의 강역도 일천리가 넘지 않았다.(夏后殷周之盛地未過千里者也) ”고 했다. 당시 주나라의 도읍은 낙양이었다. 따라서 맹자의 말은 주나라의 영토가 하남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런 제나라가 지금의 산동성 임치에 도읍을 두었다는 것은 역사왜곡이 심해도 그렇지 유분수라 하겠다. 실제적으로 당시 주나라의 강역은 황하변의 하남성 일대 뿐이고 나머지 동서남북의 땅은 당시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진시황의 천하통일도 알고 보면 중국 대륙 전체의 통일이 아니라 섬서성에서 출발하여 하남성을 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의 지명조작을 통한 역사왜곡은 그 도가 너무도 지나치다 하겠다. 오죽하면 중국의 한 역사교사가 "일본도 역사교과서를 왜곡하지만 중국만큼은 아니다. 중국 역사 교과서에 기술된 내용 중 진실은 5%도 되지 않고 나머지는 완전한 허구"라고 했겠는가! 

한국에서도 이러한 양심적인 역사교수나 교사가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문제는 일제의 식민사학을 계승한 대한민국 강단사학계가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고 하지 않고 오직 일제가 남기고 간 망국의 식민사학의 이론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대학교수랍시고 월급 받고 국가에서 연구비를 받고있다. 참으로 웃지못할 현실이라 하겠다.


다음 (6부)에서는 중국의 지명조작을 통한 역사왜곡의 실체를 밝혀준 “고죽국의 두 왕자 백이.숙제의 묘‘에 대해 언급하며, 진시황 때 쌓은 장성의 위치를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는 역사왜곡을 위해 조성한 하북성 진황도시 산해관에 있는 맹강녀의 사당입니다. 
 
▲   하북성 산해관 맹강녀 사당에 있는 망부석.  섬서성 서안에 사는 맹강녀가  여기까지 온 일도 없고 올 수도 없다.  
▲  하북성 동쪽 끝 진황도시 산해관에 있는 맹강녀의 사당. 
▲   하남성 위휘현에 있어야 하는 맹강녀곡장성이 하북성 산해관으로 이동되었다.  지명조작을 통한 역사왜곡인 것이다.
▲   하북성 진황도시 산해관에 있는 맹강녀 사당 표지판. 


원본 기사 보기:hinews.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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