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 칼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실체 (1)

당신이 알지 못했던 두 얼굴의 이승만

서울의소리 | 입력 : 2014/08/22 [04:45]

조국 광복 후 친일파와 그 후손들의 끈질긴 방해로 무려 반세기가 넘도록 편찬이 불가능했던 '친일인명사전'이 조국 광복 60년 만에 양식이 있는 전국의 대학교수 1만여 명과 뜻 있는 인사 3만여 명의 재정지원으로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 이사장 함세웅)를 통해 이 세상에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부의 보조금은 철저히 외면당한 체 말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왜놈들의 앞잡이로 독립군을 토벌하고 동족의 민족혼을 말살, 동족을 왜놈으로 세뇌시키는 데에 앞장섰던 2만5천여명의 친일파들 중 엄선 또 엄선 끝에 최고 악질 친일파만 솎아내어 4천389명의 명단을 3천여 쪽의 '친일인명사전'에 담아내는 엄청난 민족사업을 마무리 지은 것이다.

 

美 플로리다 거주, 전 언론인
   김현철  칼럼 니스트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부의 눈에 안 보이는 핍박으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바로 이 친일인명사전(값 30만원)을 구입했다. 그랬더니 고맙다며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을 보내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백년전쟁'(비매품)이라는 이름의 역사기록 동영상을 제작해서 민족양심이 올바른 여러분께 무료로 선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백년전쟁'인가? 조국이 광복을 맞아 독립국가를 세웠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일본의 통치권이 전승자 미국과 소련 등 외세로 넘어가 한민족이 바라던 우리 민족만을 위한 남북통일 정권은 아직도 요원한 실정이 아닌가.


조국 독립을 목적으로 한 3.1운동 정신과 그 뜻을 이은 상해 임시정부의 전통을 이어받은 한민족 정통 대한민국 통일정부가 서는 날까지 계속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신적 전쟁은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잃은 이후 지금까지 백년간 계속되고 있으니 외세 간섭 없는 진정한 의미의 독립은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현 대한민국은 완전한 우리 민족의 민주통일 정부로 가는 발판일 뿐이다.


'백년전쟁'은 사이비 애국자요, 출세하기 위해서는 양심도 버리고 폭력도 불사하며 백인 여성들과의 유흥을 위해서는 조국독립을 위해 어렵게 모은 자금도 마음대로 횡령, 남용했을 뿐 아니라 자기 출세를 위해서는 조국의 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는 동지를 밀고하는 민족반역자 노릇도 마다 않던 하와이의 갱스터(Gangster) 이승만의 발자취를 법정 기록과 당시 보도된 신문기사를 토대로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이토록 자세한 이승만의 발자취를 우리 국민 중 과연 몇 사람이나 알고 있을까?


이를 안타깝게 여겨 나는 앞으로 몇 차례 그 내용을 있는 사실 그대로 옮겨 이 동영상 '백년전쟁'을 접하지 못한 동포들에게 그 진상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한만의 친일파 수를 광복 직후 2만5천여명으로 집계한 수로 따진다 해도 남한국민의 당시 인구 약 2천만에 비하면 친일파 보다 이들에게 학대받고 고통 받던 동포수가 8백배나 더 많다는 점을 감안, 대다수 압도적인 동포들에게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 및 반민족행위자들의 행적은 샅샅이 알리는 게 한민족 지식층의 임무라 믿기 때문이다.


이승만(1875~1965)을 분석한 미 중앙정보부의 해제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이승만은 삿적 권력을 추구하는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라는 설명이 따르고 있다. 당시 친미파 이승만을 남한의 대통령으로 내세울 때 백악관이 참고해야 할 정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미국으로서는 자기네가 가장 싫어하는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상해 임정요인들에게 정권을 넘길 수는 없었기에 순순히 자기네 말을 잘 들어 줄 이승만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을 것이오, 반면 임정 주석 김구는 없애려고 했을 것이다. 김구가 집권하면 친미 아닌 친중(후에 장제스총통의 타이완)이 되지 않겠는가. 미군 CIC(첩보부대) 요원 안두희의 흉탄에 우리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 주석이 쓰러졌음은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 하버드에서 석-박사 과정에 실패했던 이승만은 프린스턴으로 가서 '석사 과정을 생략하고 2년 내에 바로 박사 학위를 줄 것'을 요구했고 학교측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린스턴 출신이 한국 기독교 선교에 앞장서겠다'는 이승만의 주장에 그만 그 제안을 정치적으로 수락한다. 그 때만 해도 다른 대학과의 경쟁때문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이승만의 잔머리 굴리는 재주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겠다.


한편 1909년, 항일투사 박용만(1881~1928,철원출신) 장군은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모교(헤이스팅대 정치학, 군사학 석사) 소재지인 네브라스카 주정부의 허락을 받고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청소년비행학교'를 설립한 애국자로 3년 후 1기생 13명을 배출한다.


이어 1912년 하와이의 대한국인국민회 기관지 '신한국보' 주필로 자리를 옮겨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1914년에는 항일무장단체인 대조선국민군단을 창립, 사관학교를 설립해 130명의 독립군 간부양성에 성공하기도 했다.


1913년 박장군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온 이승만은 박장군의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에 반대, 사이가 멀어졌고 자신은 후세 교육을 통해서 독립에 기여한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당시 현지 한인학교를 운영하던 이승만은 자신의 말과는 동떨어진 행동을 계속했다.


1916년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발행되는 미국신문 '호놀룰루 스타 블러틴(Honollu Star- Bulletin) 10월 6일자에 기고한 글을 통해 "우리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 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일본인들은 나에 대해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주장함으로써 항일투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임을 스스로 폭로한다. 어디 그 뿐인가? 그전에도 이승만은 1912년 11월 18일자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한일합방 3년도 되기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의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며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똑 같은 발언으로 일본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승만의 행동의 배경에는 당시 미국과 일본의 사이가 가까워서 친일 발언으로 미국 정부의 환심을 사자는 게 그의 목적이었으며 다행히 영어에 무지한 동포들이 미국신문을 못 읽는다는 약점을 이용한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의 교활한 친일 민족 반역행위는 얼마 후 미국과 일본이 전쟁으로 치닫자 180도 자세를 바꿔 이제는 철저한 항일투사로 변신하는 재주를 부린다. 역시 미국정부를 의식한 행동인 것이다. 순진한 국민들은 이런 자를 훌륭한 독립투사로 여겼으니 ...


이렇게 해서 그에게는 "사이비애국자" "하와이의 깡패 왕초" "공금횡령범" "사기꾼" "플레이보이" "애국자를 밀고한 반역자"등 더러운 대명사들이 따라 붙게 된다. 그 별명들에 합당한 이승만의 발자취가 확실한 증거자료와 함께 앞으로 전개될 글에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이렇게 증거가 명명백백한데도 일부 친일파 후손들은 '허무맹랑한 근거를 조작해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음해한다'고 순진한 국민들에게 역공세를 펴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들이 그렇게 믿어 줘야 자기네 조상의 친일 행적이 희석될 것이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친일파들을 재기용해서 오늘 날 잘 살게 해 준 이승만에 대한 예의요, 보은하는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

(계속) kajhc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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