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신채호,이회영 지사는 어디서 순국했나

중국 '일아여순감옥' 현지 탐방

정찬희 기자 | 입력 : 2014/10/22 [02:59]

 

1909년 10월26일, 조선(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는데 앞장선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암살하여 조선 뿐 아니라 중국에서 까지 열화와 같은 응원과 감탄과 존경을 한몸에 받은 한 남자가 있었다. 그 이름 '안중근'

 

본 기자는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고, 결국 일본정부의 밀서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고 죽은 중국 여순(뤼순) '일아여순감옥(日俄旅順監獄)'을 10월 3회에 걸쳐 방문했다. 그 곳에서 안중근의사의 발자취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여순가 신채호, 이회영 선생의 흔적 그리고 일제가 수감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에게 자행한 생체실험 등을 포함한 잔혹한 만행(특히 항일 정치범을 향한)의 흔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일아여순감옥' 이라는 명칭 중 '일아'는 일본, 러시아를 지칭한다.

 

▲ 중국 여순에 위치한 일아여순감옥     © 정찬희 기자

 

2014년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지, 한국전쟁이 하나님의 뜻' 이라고 하는 참담한 역사관을 가진 이들이 요직을 점하는 참사가 일어나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살아있었다면 다시한번 총을 들었을지도 모르는 참담한 시국이다.

 

이에 안의사를 추모하며 역사의식을 깨우는 의미로 일아여순감옥에 안중근 특별관에 전시된 안중근 의사의 기록에 관한 사진들을 독자여러분들께 소개한다.

 

▲ 일아여순감옥에 전시된 안중근 소개 (일부)    © 정찬희 기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직후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그가 재판정에서 보여준 당당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15가지 이유' '동양평화론' 등의 의지와 힘이 넘치는 서예 필력에 매료된 재판관들과 간수들은 그에게 '동양평화론' 등을 집필할 수 있는 시간과 책상이 딸린 넓은 독방, 고기 간식, 글을 쓸 비단 등을 제공하며 글한점을 써줄것을 줄지어 청탁했다. 때문에 안의사의 옥중 유묵(서예작품)은 200여편에 달하게 된 것이다.

 

▲ 일아여순감옥 안중근 특별관에 전시된 유묵들(복사본)     © 정찬희 기자

 

▲ 안중근 의사의 유묵(복사본: 중국 여순일아감옥 소장)     © 정찬희 기자

 

 

 

조선의 유복한 양반가정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회지도층 인사였던 안중근 의사가 총을 들어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암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안의사는 법정에서 무려 15가지 이유를 들어 그것을 설명하였다.

▲ 의거단행 안중근       © 정찬희 기자

 

여순일아감옥 박물관 학술연구총서 안중근 연구(한국어 번역본, 화문귀 주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 지금으로 부터 10여년전 이토의 지휘로 한국 왕비를 살해했다.

 2. 지금으로 부터 5년전 이토 병력으로서 5개조의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모두 한국에  매우 불리한 조항이다.

 3. 3년전 이토가 체결한 20개의 조약은 모두 한국에 대하여 군사상 대단히 불리한 사건이다.

 4. 이토는 기어이 한국 황제의 폐립을 도모하였다.

 5. 한국 군대는 이토로 인하여 해산하게 되었다.

 6. 조약체결로 한국인민이 분노하여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 관계로 이로서 이토는 한국의 양민을 다수 살해하였다.

 7. 한국의 정치 및 기타의 권리를 약탈하였다.

 8. 한국의 학교에서 사용한 좋은 교과서를 이토의 지휘하에 소각하였다.

 9. 한국 인민에게 신문구독을 금하였다.

 

▲ 안중근 서거 100주년을 즈음하여 중국에서 발간된 '안중근 연구'     © 정찬희 기자

 

10. 하등 충당시킬 돈이 없는데도 성질이 좋지 못한 한국관리에게 돈을 주어 한국인민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고 끝내 제일은행권을 발행하고 있다.

11. 한국인민의 부담으로 돌아갈 국채 2천3백만원을 모집하여 이를 한국인민에게 알리지 않고 그 돈은 관리들 사이에서 마음대로 분배되었다고도 하고 또는 토지를 약탈하기위해 사용하였다고도 하는데 이것이 한국에 대하여는 대단히 불리한 사건이다.

12. 이토는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였다. 그 까닭은 즉 러일 전쟁 당시부터 동양평화의 유지라고 하면서 한국황제를 폐립하고, 당초의 선언과는 모조리 반대의 결과를 보기에 이르러 한국인민 2천만은 다 분개하고 있다.

13. 한국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는 한국보호의 구실로 한국정부의 일부인사와 의사를 통해 한국에 불리한 시정을 하고 있다.

14. 지금으로부터 42년전에 지금 일본 황제의 부친을 이토가 없애버린 사실은 한국인민이 다 알고 있다.

15. 이토는 한국인민이 분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황제나 기타 세계 각국에 대하여 한국은 무사하다고 속이고 있다.

 

당시 안중근 의사를 기소한 미조부치 다카오 검사는 안의사의 진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그대의 공술을 듣고 보니 과연 동양의 의사라 할 수 있다' 라 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지금 여기서 나의 생사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라건데 당신은 빨리 나의 의견을 일본 천왕에게 보고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악행을 시정하여 동양의 위급한 대세를 돌려세워야 한다. 이것이 나의 제일 큰 소원' 이라 대답하였다 한다.

 

▲ 안중근의 여순감옥 순국.. 1910년 음력2월14일(양력3월26일)     © 정찬희 기자

 

그러나 1909년12월2일 일본 외상 고무라 쥬타로의 밀명으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의 사형결정으로 재판과 관계없이 사형이 내정, 결국 안의사는 1910년 3월26일 사형집행을 당하여 순국하고 말았다.

 

이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항일지사는 안중근 의사 뿐만이 아니었다.

'인민에 해가 되는 왕은 죽여도 된다' 라고 하였던 항일 무장투쟁 정신의 선봉, 단재 신채호 선생도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 단재 신채호 선생의 수감을 기록한 감옥 표지물     © 정찬희 기자

 

또한 이곳은 이회영 선생이 가혹한 옥고를 치르다 끝내 순국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 이회영 선생의 여순감옥 수감기록     © 정찬희 기자

 

이 여순감옥은 항일투쟁 정치범을 악랄하게 탄압하고 전쟁시기에는 '생체실험'까지 자행하는 등 잔혹한 학대가 있었다.

 

이런데도 친일이 '먹고 살기위한'  '독립을 위한 신중파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 이었다고 한다면 독립운동의 길을 택하다 이토록 가혹한 고통속에 목숨마저 잃은 항일투사들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하는 질문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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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14/10/22 [09:07]
909년 10월26일, 조선(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는데 에서 1909년으로 바껴야 할듯 수정 삭제
정찬희 기자 14/10/23 [20:35]
매의 눈으로 기사를 열심히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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