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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합리적이었다? '여순감옥 사형장을 보라!'

정치범 집단교살 후 들통에 넣어 파묻고.. '충격현장'

정찬희 기자 | 기사입력 2014/11/28 [12:27]

일제가 합리적이었다? '여순감옥 사형장을 보라!'

정치범 집단교살 후 들통에 넣어 파묻고.. '충격현장'

정찬희 기자 | 입력 : 2014/11/28 [12:27]

 

지난 10월 중국 여순에 위치한 일아여순감옥(이하 여순감옥)을 방문했다.

 

대련시내에서 버스로 약 1시간 반거리에 위치한 곳(여순터미널에서 버스나 택시로 이동. 기본요금 거리)으로 1906년 부터 일제의 관할하에 일제패망 1945년까지 수많은 인민을 노역 수감 및 학살을 벌인 곳이다. 

 

▲ 중국 여순에 위치한 일아여순감옥. 일제탄압의 거대한 증거     © 정찬희 기자


당시 조선의 항일투쟁 인사들도 투옥되어 죽음을 맞이 하였는데 그 중에는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선생 등도 포함되어 있다.

 

▲ 여순감옥의 내부. 이 좁은 공간에 10여명 씩 수용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 정찬희 기자


일제는 수용자들을 수인복 색깔을 두종류로 분류하여 분열을 유도하는 정책을 쓰고, 강제노역과 급식양 조절, 사상전향 강요 등으로 수인들을 통제했다.

 

물론 그 통제에 고문과 학살이 포함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 여순 감옥의 고문실     © 정찬희 기자

 

심지어 정치범에 대해서는 감옥규정으로 치료도 해주지 않았고 잔혹하고 비윤리적인 방식의 사형과 매장도 자행되었다. 

 

수감자들의 해방 이후 자신들과 주변인들이 당한 고문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남겼는데 그 중 가장 참혹했던 곳은 의무계였다.

 

의무계는 병이 난 수형자를 치료하거나 돌보는 곳이었는데, 오히려 그곳에서의 학대가 가장 심각했던 것은 병자에게는 밥의 지급량을 줄이고 오히려 죽음을 촉진하여 죽이는 경우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 여순감옥 의무계 안내표지     © 정찬희 기자

 

▲ 의무계에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몸무림 치다 죽은 수형수에 관한 증언     © 정찬희 기자

 

교수형도 허다하게 이루어졌다.

교수형 당한 수인은 나무통에 담겨 감옥주변에 매장되었고, 가족이 찾으러와도 감옥규정으로 다수의 수인들과 합장이 이루어진 경우 인계하지 않았다.

 

▲ 사형틀의 모습과 들통에 담긴 시신     © 정찬희 기자

 

▲ 복원된 감옥 지하무덤의 실체.     © 정찬희 기자

 

사진속의 해골들은 나무 들통에 담겨 매장된 실제 수인들의 시신들로 현재 일제의 참상을 증명하기 위해 여순감옥에 전시되어 있다.

 

▲ 전 여순감옥 의사 고가 쇼이치의 증언     © 정찬희 기자

 

감옥의 의사(醫師)였던 일본인 고가 쇼이치는 여순감옥의 잔혹함을 증언하였는데 그는 "간수는 사형수를 1제곱미터 크기의 나무판에 끌고와 수갑을 채우고 눈을 가린 후 형구를 씌워 연결고리로 목덜미를 단단히 묶는다. 경첩이 열리면 사형수가 이동식 나무판에서 떨어진다. 나는 계단 밑에서 대기하였다가 사형수의 심장박동을 검사하고 즉시 형무소장에게 보고한다. 제1구 시체가 통에 담아 이동하면 다음 것을 기다린다.

 

비참하다! 정말로 비참하다! 제1구.. 제2구.. 제5구까지 반드시 연속 검사해야 한다. 이런 사형수와 시체를 마주보면서 나는 내가 이런 직무를 담당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지 통절하게 느꼈다.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교수형에 쓰이는 삼노끈은 아주 낡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치를 빨았는지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라며 당시 상황과 심경을 남겼다.

 

▲ 여순감옥 사형장 안내표지. 42~45년까지 700여명이 사형당했다.     © 정찬희 기자

 

일본은 패망이후에도 자신들의 시대는 법에 의해 통치된 합리적인 시대였고, 피해자들의 증언은 그저 그들의 말 뿐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실제 그들이 항일지사들을 가두고 학대한 흔적은 여순감옥이라는 거대한 증거로 남아 여전히 그 피해자들이 나무들통 속 참혹한 시신으로 남아있다. 사형집행되면 죽은 수인들은 몸이 굳기전에 준비된 나무통에 넣어져 매장되거나 시신이 어디론가 실려갔다.

 

여순감옥, 그리고 일제의 잔혹한 제국주의.

여전히 우리가 경계하고 잊지 말아야 할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도 맞물려 있는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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