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사회’교리, 쓰레기통에서 다시 찾아 읽다

[교회와 세상-한상봉]

서울의소리 | 입력 : 2014/12/11 [02:01]

2014년, 한국천주교 사목회의 의안이 작성된 지 30년이 되는 해가 저물고 있다. 1984년 11월에 김수환 추기경은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행사가 온통 ‘사목회의’로 수렴되고 결실을 맺어야 한다며, “이 사목회의는 200년 역사상 처음으로 하느님 백성 전체, 즉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같이 참여하는 회의라는 데서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안으로는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의 새로워진 모습을 지향하고, 밖으로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도래케 하며 특히 이 땅에서 고통 받는 모든 사람과 같이 있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니 사목회의는 교회 생명 자체를 다루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치 프란치스코 교종의 음성을 30년 전에 미리 듣는 것 같다.

 

교회는 ‘세상을 위한 보편적 구원의 성사’라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론을 다시 읽고, 멍들고 다치고 상처받더라도 ‘세상에 나아가’ 분투하라는 복음적 명령을 다시 새기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대로 교회는 ‘대형병원’처럼 첨단의료기술을 갖추지 못하더라도  ‘야전병원’처럼 세상에서 상처받은 이들의 곁에 머물며 동반해줄 ‘복음적 열정’만으로 충분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로 가자는 것이다. 이 숭고한 깨달음이 4년간의 거듭난 논의 속에서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으로 작성되었으나, 대부분의 제안이 교회 안에서 무산된 것은 안타깝고 안쓰럽다.

   
▲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집 ⓒ한상봉 주필

 

지난 8월 프란치스코 교종의 방한 이후 주교회의를 비롯한 각급 교회기관에서는 ‘어떻게 교종의 뜻을 한국교회에 실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지만, 그 답은 이미 30년 전에 나왔으며, 그 답대로 교회가 노력해 왔다면, 한국교회는 이미 교종의 뜻을 살고 있는 교회로 당당하게 교종을 동반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종의 방한 첫날에 한국교회 주교들은 교종의 ‘부드럽지만 날선’ 훈계를 들어야 했다. 한국교회는 양적으로 번영했지만, 그래서 바티칸에 보내는 분담금이 세계교회 안에서 8위에 상당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는 오히려 불편한 교회라는 지적이다. 어느 날 악마가 와서 한국교회의 예언자적 구조에서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려는 씨앗을 뿌린 것 같다는 교종의 말씀을 들을 때,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은 주교가 있었다면, 그분은 죄송스럽지만 이미 주교도 뭐도 아니다. 사제적 양심이 이미 증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이유로 사목회의 의안이 주교들의 양심처럼 이내 교회 안에서 승인되지 않고 증발해  버렸는지 살펴야 한다. 그래야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1984년은 한국교회에서 절망적인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던 때다. 1970년대에 한국교회가 민주화의 운동의 산실이 되었던 것처럼, 1980년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신군부에 대한 저항운동이 교회 안에서도 상식이었던 때다. 각 대학과 본당의 가톨릭학생회는 성경과 사회교리, 사회과학 공부를 기본으로 했으며, 본당 청년회도 마찬가지였다. 그 힘으로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천주교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가톨릭농민회를 비롯해 노동, 농민, 빈민, 청년학생 조직들이 모여서 ‘천주교 사회운동협의회’를 출범시킨 해도 1984년이다.

 

교회 안의 진보적 운동이 저변에서 결집하는 동안, 교회 상층부가 보수세력들에 의해 장악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1984년은 민주적 방식으로 ‘사목회의 의안’이 마련된 해이지만, 동시에 교황 방한과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이라는 국제행사를 치르는 과정에서, 전두환 정권과 우호적인 입장을 나누던 인사들이 교회 안에서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 해이기도 하다. 이런 커다란 행사는 어차피 정부의 도움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른바 보수 주교 4인방으로 불리던 수원교구의 김남수 주교, 대구대교구의 이문희 대주교, 청주교구의 정진석 주교, 대전교구의 경갑룡 주교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교황청에서는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에 대한 심문이 이루어졌다. 방한했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보프를 심문했던 라칭거 추기경(후일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해방신학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한국사회에서는 교황청의 해방신학 심문이 곧 천주교 사회운동에 단죄처럼 비추어졌다.

 

그 후 30년 동안 ‘사목회의 의안’은 교회 내 진보세력의 실효성 없는 ‘신임장’으로 구겨져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일례로 당시 가톨릭농민회 지도사제였던 정호경 신부가 초고를 작성한 ‘농민사목 의안’이 폐기되면서, 정 신부는 할 수 없이 이 내용을 보완해서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농민사목’(분도출판사, 1984)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경우다. 우리는 매년 대림 2주일을 인권주일로, 지난 2011년부터는 그 이어지는 한 주를 사회교리 주간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그만큼 한국교회에서 사회교리가 찬밥 신세가 되어 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교도권은 이제 와서 사회교리를 강조하지만, 신자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개념이 사회교리다.

   
지금여기 자료사진

 

30년 전에 한국교회에서 작성된 ‘사목회의 의안 12권-사회’는 사회정의, 언론, 사회개발, 사회복지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상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헌장’이나 라틴아메리카교회의 ‘메데인 문헌’이나 ‘푸에블라 문헌’에 견줄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 첫 마디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저 낮은 민중 속으로 보내셨듯이, 크리스챤이 또한 민중 속으로 투신하도록 이 시간, 우리 모두를 파견하고 계신다. 가난하고 버림받고 소외된 민중 속에 자신을 묻고, 그들과 함께 복음의 빛을 찾는 ‘민중 속의 교회’만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의 진리를 가장 진솔하고 극명하게 증거 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의안의 나머지 내용은 이 신앙고백의 부연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의안의 말미에 제시한 ‘제안사항’은 한국교회에서 지난 30년 동안 대부분 실현되지 않았다. 의안은 가장 먼저 교회 공식기구로 ‘사회교리 연구소’ 설립을 요청했다. 한국사회 현실에 대한 일치된 시각을 제공하고, 사회사목 단체들의 유기적 연락과 자료 교환을 위한 것이다. 예비자 교리서에 지금도 ‘사회교리’가 삭제된 상태에서, 한국교회는 전례와 신심활동만 강조되고, 사회적 신앙실천은 사라졌다.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 사건과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교도권적 판단을 내놓더라도 신자들이 선뜻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사회교리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다. ‘왜 교회가 정치, 사회문제에 간섭하느냐’는 반론이 거세게 교도권을 무력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슬픈 교회의 현실이다. 그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사회적 사안에 대한 복음적 판단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그저 신자들이 ‘상식과 이해관계에 따라서’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방치해 온 게 사실이다. 이러한 직무유기가 지금의 교회 분열을 만들었으며, 신자들은 길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교회는 비록 양적으로 팽창했지만 ‘실천하지 않는 신앙’ 때문에 ‘애매한’ 자기들만의 친목단체로 남아 있다.

 

사목회의 의안에서 흥미로운 것은 1984년 당시 10개 교구에 정의평화위원회가 설치되었으나, “아직 4개 교구에는 정평위가 구성되지 않고 있다”면서 정평위 구성을 촉구하고 있는데, 실제 해당 교구는 그 후로도 25년 동안 정평위를 제대로 구성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4대강 공사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정평위가 재구성되거나 출범한 수원교구와 대구대교구, 대전교구가 현재 가장 열심히 사회교리를 가르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런 현상은 주교단의 세대교체가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또한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에 이어, 프란치스코 교종의 방한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대전교구 유흥식 주교가 2014년 추계 주교회의에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이 된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덧붙여 의안 작성자들은 교회 공식기구인 정평위의 사회정의 활동에 교구, 본당과 단체들의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협조가 가능하도록 주교회의가 배려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주교회의는 사실상 ‘협의체’이기 때문에 주교회의의 결정이라 해도 교구장이 적극적인 의사가 없는 경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일례로 4대강 공사의 부당함을 역설한 주교회의의 성명서 발표에도 불구하고 서울대교구의 정진석 추기경이 ‘돌출발언’을 함으로써 ‘주교단의 일치’를 깨고 정의평화위원회의 김을 빼기도 했다.

   
왼쪽은 평화신문 창간호(1988년 5월 15일).오른편은 2008년 8월 17일자 평화신문 광고.

 

한편 의안은 ‘언론’ 부분을 다루면서 전국 단위의 새로운 홍보수단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는 기성언론이 진실을 보도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정의 측면에서 교회가 직접 사회현실에 대한 입장을 전달할 수 있는 매체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당시 대구교구에서 발행하는 <가톨릭신문>이 교구 성격과 마찬가지로 보수적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교도권에 따르는 서울대교구가 1988년에 <평화신문>을 창간하고 1990년에 <평화방송>을 개국한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신영복 선생이 ‘감옥으로부터 온 사색’이라는 글을 실었던 것이 <평화신문>이었던 것처럼 <평화신문>은 당시 진보언론의 한 축을 이루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평화신문>, <평화방송>은 1991년 ‘평화방송 사태’와 1998년에 서울대교구장의 교체를 거치면서 오히려 <가톨릭신문>보다 더 보수적인 언론으로 자리 잡았다. 이 때문에 ‘정론’지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면서, 천주교 사회운동 진영에서 1994년 격월간 잡지 <공동선>을 창간하고, 최근에는 2009년에 인터넷언론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창간되어 활동하고 있지만 그 영향력은 아직 작은 편이다.

 

정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듯이, 교회에서도 ‘교회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교회 권력에서 자유로운 독립언론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만 여전히 아쉬운 것은 교회 안에 여전히 ‘건전한 비판지성’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이른바 교회의 문제를 조목조목 밝히고 복음 안에서 비전을 제시하는 의견 그룹이 형성되어야 교회의 건강이 회복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참에 ‘녹색평론’처럼, 교회의 비판지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가톨릭평론’ 같은 매체가 나오기를 희망해 본다. 수도원에서 ‘공동식별’이 요구되듯이, 교회 안에서 ‘집단지성’이 가동되어야 교회의 살 길이 열릴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미 수많은 과제를 한국교회에 던져 주었다. 이 과제를 푸는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30년 전에 작성되었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사목회의 의안(議案)을 다시 읽어야 한다. 낡아서 다 떨어진 채로 구겨져 있는 사목회의 의안집을 다시 보기 좋게 출간하고, 주교들부터 이 의안에 밑줄 그으며 꼼꼼히 살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몸으로 정의로운 ‘의안’(義案)을 다시 살려야 한다. 교회력으로 새해가 이미 시작되었다. 새해는 인권과 사회교리, 평화의 날로 이어진다. 우리 교회의 매일이 하느님의 자비를 특별히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경축하는 날이 되기를 빌어 본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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