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이토 저격 3년형이면 충분" 105년전 변론 발굴

안 의사 사형선고 105년 맞아 美 인디펜던트지 사형선고 부당 변론 소개

서울의소리 | 입력 : 2015/02/15 [23:35]

 '대한의군 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안중근 장군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것에 대한 선고는 3년형이면 충분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사실이 105년만에 밝혀졌다.고 뉴시스가 보도했다.

919년 10월26일 금요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중국 하얼빈(哈爾濱)에서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것은 20세기 초 최대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저격 당일 하얼빈 현장에서 생생하게 보도했고 거사에 얽힌 비화들을 전해 눈길을 끌었다. 톱 제목을 ‘이토 죽였다, 한국점령을, 복수하기 위해(Slew Ito to Avenge, Conquest of Korea)라고 단 타임스는 “나는 우리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토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하얼빈에 왔다!”고 안중근 의사의 격정적인 육성을 소개했다. 또한 일본의 가와카미 총영사가 이토 일행의 환영을 위해 러시아 당국에 경호를 완화해 달라고 요청해 안중근 의사 등이 무사히 잠입하는데 도움이 된 사실도 전했다. 저격한 시간은 당초 알려진 오전 9시30분이 아니라 9시였고 이토의 사망 시간도 오전 11시가 아닌, 9시20분으로 나타났다. 2014.03.05. <사진=ko.wikipedia.org> robin@newsis.com


14일자 뉴시스 보도에 다르면 1910년 2월14일 일제는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그에 앞서 변호인들은 비슷한 사건에 대한 판례를 들어 극형이 언도되서는 안되며, 3년정도의 징역형이면 충분하다는 변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뉴시스가 입수한 이같은 내용은 1911년 뉴욕에서 발행된 '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의 상반기 연감 집필자였던 존 하이드 디포레스트가 '1910년의 일본(The Japan of 1910)'이라는 글에서 소개한 것이다.


정치인이자 일본에 파송된 선교사이기도 했던 디포레스트는 이 글에서 안중근 의사의 재판을 '1910년의 문을 여는 일대 사건'으로 규정하고 변론내용을 상세히 소개해 주목된다.


당시 일제는 러시아인과 영국인등의 무료 변호 자원을 막았으며 심지어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 기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이들 변호사는 일제의 '짜맞추기 법정'에 동원됐으나 비교적 양심적인 변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두 변호인은 재판부에 "(안중근 의사를) 극형에 처하는 것은 오늘날 법의 목적에 상치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일본)를 방문한 러시아 황태자를 살해하려한 자도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다. (1904년 미국에서) 스티븐스를 죽인 암살자(장인환 의사)도 단지 25년형이 구형됐다"고 형평성을 강조했다.


러시아 황태자 살인미수사건은 1891년 러시아제국 니콜라이 황태자가 일본을 방문했다가 경호를 맡은 순사 쓰다 산조(津田三藏)에게 칼을 맞은 충격적인 사건이다. 당시 소국이었던 일본은 강대국 러시아 황태자를 국빈 대접하며 최상의 예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쇼크가 아닐 수 없었다.


일본 왕이 나서 거푸 사죄하고 러시아 황태자의 회복을 위해 국민적인 기도회를 연일 여는 등 보복을 받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이 때문에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지만 쓰다는 '모살미수죄'로 무기징역이 선고되고 법무대신이 사임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에 대한 선고는 3년형이면 충분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사실이 105년만에 밝혀졌다. 안중근의사의 사형언도일인 2월14일을 맞아 뉴시스가 입수한 이 내용은 1911년 뉴욕에서 발행된 ‘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의 상반기 연감 집필자였던 존 하이드 디포레스트가 ‘1910년의 일본(The Japan of 1910)’이라는 글에서 소개한 것이다. 또한 싱가포르 영자신문 ‘더 스트레이트 타임스’는 이토 저격 두달 후인 1909년 12월21일 “저격자에게 사형이 언도될 것인지는 아주 회의적이다(too doubtful)”라고 언급하는 등 과도한 선고를 경계하고 일제의 짜맞추기식 재판을 예견하는듯한 기사를 실었다. 사진은 스트레이트 타임스. 2015.02.13. <사진=싱가포르국립도서관 DB> robin@newsis.com

 

두 변호인은 극형 선고가 도리어 안중근 의사를 더욱 (영웅으로) 부각시킬 수 있다는 논리도 폈다. 변호인들은 "판사의 결정은 세계가 안중근을 작게 평가하도록 만들 수 있다. 모든 관점에서 볼때 그에게 3년형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데포레스트는 이 글에서 "안중근은 진정한 애국자로서 자신의 행위를 찬양했다. 그는 순교자로서 두려움없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하고 "우리는 (이토) 저격이 한 나라의 잘못을 바로잡는 마지막 교훈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사형 언도 가능성 극히 회의적" 스트레이트 타임스


당시 일제가 안중근 의사에 대해 극형을 내리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을 한 기사도 눈길을 끈다. 영국 지배하의 싱가포르에서 발행된 아시아 최대의 영자신문 '더 스트레이트 타임스'는 이토 저격 두달 후인 1909년 12월21일 보도에서 "저격 재판이 대중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비공개로 열린다"며 "당사국 대표들은 재판정에 입장이 허용되지만 모든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질 예정"이라고 전했다.


신문은 "일본 당국은 재판내용이 널리 퍼지면 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과정에서 저격자의 방어논리나 영웅적인 언급이 또다른 저격을 촉발하도록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저격자에게 사형이 언도될 것인지는 아주 회의적이다(too doubtful)"라고 언급함으로써 독립군참모중장 자격으로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에 대한 과도한 선고가 내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일제는 1910년 2월14일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 스트레이트 타임스는 일주일 후인 2월21일 "이토백작의 저격자에 대한 재판이 마무리됐다. 주모자는 사형이 선고됐고 다른 공모자는 3년형이 언도됐다"고 전했다.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에 대한 선고는 3년형이면 충분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사실이 105년만에 밝혀졌다. 안중근의사의 사형언도일인 2월14일을 맞아 뉴시스가 입수한 이 내용은 1911년 뉴욕에서 발행된 ‘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의 상반기 연감 집필자였던 존 하이드 디포레스트가 ‘1910년의 일본(The Japan of 1910)’이라는 글에서 소개한 것이다. 또한 싱가포르 영자신문 ‘더 스트레이트 타임스’는 이토 저격 두달 후인 1909년 12월21일 “저격자에게 사형이 언도될 것인지는 아주 회의적이다(too doubtful)”라고 언급하는 등 과도한 선고를 경계하고 일제의 짜맞추기식 재판을 예견하는듯한 기사를 실었다. 사진은 1910년 3월16일 안중근의사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보도한 스트레이트 타임스 기사. 2015.02.13. <사진=싱가포르국립도서관 DB> robin@newsis.com

 

세계 미디어의 한국관련 기사를 DB화하고 있는 재미언론인 문기성씨는 "안중근 장군의 사형언도일을 맞아 일제의 짜맞추기식 재판을 예견한듯한 한세기전 미디어들의 보도는 사료적 가치가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세계 언론의 관심은 계속됐다. 2월21일 스트레이트 타임스는 저격 당시를 촬영한 동영상의 존재를 언급했다. 또한 뉴욕에서 발간된 사진전문 월간지 포토그래픽 타임스는 1910년판 '외신 다이제스트' 코너에서 "러시아 영화사가 러시아와 일본 대표단의 회담을 촬영하는 계약에 따라 카메라를 만주 하얼빈의 사이사간(Tsaitsagan) 철도역에 설치했다"면서 동영상의 가치를 소개해 시선을 끌었다.


포토그래픽 타임스는 "이토 히로부미 일행이 기차에서 내려오다가 한국인 저격자에 의해 총을 맞았다. 그는 숨졌고 두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모든 장면이 동영상으로 촬영됐고 질 좋은 영상 한 세트가 있다. 러시아 영화사는 이 영상의 가치를 15만루블(약 12만달러)로 평가했지만 아직 이를 입수한 사람은 없다"고 전했다.


같은 달 16일엔 이른바 '단지동맹(斷指同盟)'이 보도돼 세인을 놀라게 했다. "뤼순형무소의 재판에서 이토의 저격자 안중근은 왼손 약지 끝마디가 없는 이유를 묻자 섬찟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난 봄 십여명의 한국인이 북한의 한 마을 연추에서 극동의 평화를 위해 확고한 노력을 기울이자는 맹세를 하였다. 이러한 맹세의 약조를 위해 각자 약지를 끊었다. 그리고 태극기 위에 혈서로 조선제국의 독립을 의미하는 4개의 한자(大韓獨立)를 썼다." 


3월26일 전격 집행된 안중근 장군의 형집행은 바로 당일 대양주 언론들도 속보로 전할만큼 빅 뉴스였다.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발행된 '디 애드버타이저'는 "일본정치인 이토백작을 저격한 한국인이 어제 뤼순형무소에서 처형됐다. 저격자는 반일주의로 유명한 평양내 한인조직의 '도구'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세명의 지도부는 극비리에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해 만주에 들어갔다"며 의거 뒷이야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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