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와 마주서기...열사들의 ‘본심’

양성불능시대 넘어서기

서울의소리 | 입력 : 2015/05/30 [13:46]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5월이면 열사 추모미사 준비로 바빴다. 몸보단 마음 써야할 일이 많았다. 지도사제를 설득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 당시 지도사제는 열사추모미사를 준비하는 단체들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냐며 의심했다. 내가 미사 공지사항을 통해 열사추모미사를 홍보하는 날이면, 지도사제는 교회의 공식행사가 아니라고 어김없이 덧붙였다. 지도사제와 참여수준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행사가 코앞까지 오는 일이 3년간 반복됐다.

 

 

열사들의 ‘본심’

 

그의 의심이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천주교 열사’는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회운동단체에서도 활동한 경우가 많았다. 열사들이 세례명은 있지만 ‘본심’은 교회 바깥의 논리에 있던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받을 여지가 있었다. 일례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제출된 학생운동 연구 논문은 천주교 열사 중 한 명인 박승희의 분신을 민족주의 신념에 의한 순교로 설명한다. 1991년 4월 전남대 2학년생이었던 박승희는 ‘고 강경대열사 추모 및 노태우정권 퇴진 결의대회’에서 몸에 불을 붙인 채 “노태우정권 타도하고 미국놈들 몰아내자!”고 외쳤다.

 

그런데 박승희 열사의 사례를 조금 더 살펴보면 그의 ‘본심’을 단순하게 보기가 어려워진다. 박승희 열사와 교지 편집위원회 활동을 했던 최은희 씨는 열사의 곁에서 마지막을 함께 하면서 병상일지를 남겼다. 여기에서 열사를 생각하며 쓴 시 ‘이 새벽의 마리아’가 눈에 띈다.

 

“이 새벽/민족해방의 제단 위에 제 몸을 번제로 드린/어린 딸의 음성은 이미 죽고/꿈틀대는 손굽으로 핏물 적셔 그리는 말/어머니 슬퍼하지 마세요/조국의 딸이랍니다/아가다라 이름받아 십자가에 흐르는 피로/일찍이 그 몸을 적셨던가 천국에 있는 예수보다/십자가에서 죽었던 예수를 더 사랑하던 아가다/아가다의 어머니 마리아가/이 새벽 눈물로 드리는 기도/주여, 당신의 딸 그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1991년 5월 1일)

 

최은희씨는 박승희 열사의 룸메이트였다. 이 시를 써내려가던 날의 병상일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혹 승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만다면 나는 이제 승희와 함께 살던 방에 들어설 수 없을 것이다.” 함께 살고 함께 활동했던 친구가 열사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던 시를 통해 열사의 신앙이 단순한 겉치레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박승희 열사의 신앙고백에서 ‘예수의 죽음’이 핵심에 놓여있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열사의 신앙은 죽음을 포장할 외피가 아니라 오히려 죽음으로 완성될 무엇이었다. 요컨대 ‘십자가에서 죽었던 예수’를 따르겠다는 고백이 신앙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5월 서울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열린 천주교 열사 추모미사 모습 ⓒ정현진 기자

 

천주교 열사들의 신앙에선 죽음에 대한 고백이 흔히 발견된다. 그것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죽음이었으며 동시에 광주에서 학살된 항쟁참가자들의 죽음이었다. 박승희를 비롯한 열사들은 자신을 살아남은 자의 위치에 세우곤 광주의 죽음에 대해 물었다. 이와 반대로 신군부의 총구를 비켜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자신들을 반성했다. 열사들은 십자가 위 예수의 신음소리가 오늘날 농민, 노동자, 철거민 등의 민중이 호소하는 고통에서 반복된다고 믿었다.

 

이는 몇몇 열사들만의 견해가 아니었다. 당시 가톨릭학생운동은 예수를 따르는 대학생들이 개인의 신심만을 강조하는 ‘보수적 신앙’을 극복하고 하느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을 해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서 '자주적 신앙'이 강조됐다.

 

그런데 하느님나라를 만드는 일은 교회를 넘어 ‘전체 운동’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교회 안에 갇힌 신앙은 현실을 바꿀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가톨릭학생운동은 자신들의 운동을 '전체 운동'에 속하는 부문운동으로 이해했다. 민족분단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모순의 근원이기 때문에 변화를 바라는 모든 이가 자주적인 통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입장이 전체운동의 관점으로서 힘을 얻었다.

 

박승희 열사의 경우 유서를 통해 이러한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제 길이 2만 학우 한명 한명에게 반미의식을 심어주고 정권타도와 함께 힘썼으면 하는 마음에 과감히 떠납니다. 불감증의 시대라고 하는 지금 명지대 학우의 슬픔과 연민을 가지다 다시 제자리로 안주해 커피나 콜라를 마시는 2만 학우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정권타도’, ‘반미의식’이나 ‘커피나 콜라’ 같은 표현들은 열사가 죽음을 통해 지키고자 했던 ‘애국’의 구체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열사에게 미국은 민족분단을 공고하게 만드는 적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부정해야 할 대상이었다. 신군부를 비호했던 미국이 빌라도의 로마처럼 느껴질 법도 했다.

 

대학생 박승희의 신앙고백을 현재화하기

 

   
▲ ⓒ정현진 기자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누구나 예수의 십자가를 지겠다고 고백한다. 박승희 아가다를 포함한 천주교 열사들 역시 예수를 지금-여기에서 따르고자 고민하고 실천한 사람들이다. 열사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예수를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2000년 전 예수가 겪었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자신들의 시대에 생생하게 불러들인 것이다. 우리가 열사들의 뜻을 계승하겠다고 말한다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현재화하려던 그들의 신앙고백을 이해해야만 한다.

 

지금에 와서 열사들의 신앙을 이해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소위 과학적 사회변혁이론이 힘을 얻었던 시기에 활동했던 천주교 열사들은 ‘본심’이 교회의 안팎에 동시에 걸쳐있었다. 신심 아니면 외피라고 단순하게 구분하는 논리로는 열사들이 살았던 시대의 맥락을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우리는 열사들의 신앙을 현재로 불러내 계승할 수 있을까? 열사들의 말 그대로를 복원하기만 한다고 계승하는 것은 아닐 테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2000년 전 그 모습 그대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채찍질하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듯이, 박승희 열사를 기억하고 뜻을 계승한다는 것이 그가 학우들에게 당부한 대로 커피와 콜라를 끊는 상징적인 행위로 국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시의 대학생 박승희와 마주서서 신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때 그의 신앙고백은 비로소 우리에게 생명력을 가진 말로서 다가올 것이다. 열사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타도하려던 정권의 성격이 무엇이었으며, 반미의식을 강조했던 까닭은 무엇이었냐고.... 박승희 열사가 오늘날 십자가 위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할지 궁금하다.

 

 
 

백승덕(미카엘)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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