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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와 조선인 가미카제

사쿠라 꽃은 청년들을 죽음으로 내몬 ‘악의 꽃’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6/04/18 [20:14]

사쿠라와 조선인 가미카제

사쿠라 꽃은 청년들을 죽음으로 내몬 ‘악의 꽃’

서울의소리 | 입력 : 2016/04/18 [20:14]

해마다 이맘때면 벚꽃 바람이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다. 올해로 54회째를 맞은 진해군항제는 지난 10일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중국 관광객 등 국내외에서 270만 명의 관광객이 진해 벚꽃을 즐겼으며, 766억 원의 지역경제 파급효과를 냈다고 한다. 진해는 벚꽃 하나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는 셈이다.

 

비단 진해만이 아니다. 이제는 전국 도처에서 벚꽃을 즐길 수 있다. 서울의 경우 국회 뒤편의 윤중로 벚꽃길이 유명하다. 지난 주말 이 일대는 벚꽃 구경인파로 넘쳐났다. 이제 벚꽃은 봄을 알리는 전령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진해 군항제에 참가한 관광객들이 벚꽃을 즐기며 감상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벚꽃을 ‘사쿠라’라고 부른다. 이맘때면 도쿄 우에노 공원은 사쿠라꽃 상춘객들로 붐빈다. 벚꽃은 한꺼번에 피었다가 어느 한 순간에 지고 만다. 이는 일본인들의 민족성을 쏙 빼 닮았다. 그래서인지 일본사람들은 벚꽃을 즐기는 차원 정도가 아니라 국화(國花)로 여긴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1941년 미국 하와이 소재 미 해군기지 기습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갈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미군의 항공모함이 해전에서 위력을 떨치자 일본은 남양군도에서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일본은 미군 항공모함에 대응하기 위해 자살공격대를 조직했다. 이른바 ‘가마카제(神風)’가 그것이다.

 

가미카제는 ‘제로센’이라는 소형 전투기에 250kg의 폭탄을 싣고 미군 항공모함에 돌진하였다. 요즘 흔히 언론에 등장하는 자살폭탄테러범과 유사하다. 한 자료에 따르면,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무려 2천여 회 이상의 자살공격을 시도하였다. 이로 인해 6천 명이 넘는 젊은 조종사들이 개죽음을 당했다.

 

초창기에는 가미카제 공격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한 번도 이런 공격을 받아본 적이 없는 미군에게 가미카제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가미카제의 위력은 시들해졌다. 파괴력도 그렇거니와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탄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하기 일쑤였다. 마지막 순간에 조종사들이 공포감에 눈은 감아버린 탓이었다.

 

출격 전날 가미카제는 이별의 술잔을 들며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다. 출격 때는 여고생들이 사쿠라꽃 가지를 흔들며 이들의 마지막 길을 전송했다. 이들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일제는 ‘사쿠라꽃(華)이 지(散)듯’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해서 ‘산화(散華)’라고 불렀다. 사쿠라 꽃은 청년들을 죽음으로 내몬 ‘악의 꽃’이 된 것이다.

 

▲출격하는 가미가제에게 여고생들이 사쿠라꽃 가지를 흔들며 전송하고 있다

 

가미카제 가운데는 조선인 청년들도 더러 끼어 있었다. 서정주의 친일시 ‘마쓰이 오장 송가’에 등장하는 마쓰이(松井) 오장(伍長·하사)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본명이 인재웅(印在雄)으로, 1924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소년비행병 13기 출신인 그는 1944년 11월 29일 필리핀 레이테만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때 만 스무 살이었다.

 

마쓰이 오장처럼 가미카제로 희생된 조선인 청년은 16명이나 된다. 그 가운데는 박동훈이라는 17세 청년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해방을 불과 5개월 앞둔 1945년 3월 29일 오키나와 중부 카데나 해상에서 전사했다. 나라가 온전했다면 이들의 처참한 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못지않건만 누구도 이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사쿠라꽃이 흩날릴 때면 이국땅에서 고혼으로 떠돌고 있을 그들이 생각난다.

 

 필자-정운현 http://blog.ohmynews.com/jeong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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