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진보와 보수'의 의미

'정의는 언제나 현실을 편든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16/04/20 [22:13]

 1. 무엇을 '진보'할 것인가? 

 
진보란 더 좋고, 더 낳은 어떤 지향점을 가질 때 의미가 있다. 세계화, 유럽통합, 한미 FTA, 북한 핵문제 등은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정체성 위기를 불러왔다. 우리 시대의 이념 갈등은 진보할 것도, 보수할 것도 없는 이념의 진공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바람임을 확인하였다. 이 한 순간의 바람을 타고, '영웅이 재림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정당 구조를 개혁할 사람을 바꾸기 위해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는 일, 그들을 통해 정당 구조를 개혁하는 일, 자발적인 자기파괴(열린당의 해체) 지방자치제를 뿌리내리게 하는 일, 북한에 쌀 주고 비료 주는 일과 동시에, 납북자, 전쟁포로 문제,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를 냉정하게 따지는 일, 이 땅에 진보 정당의 존립 기반을 마련해 주는 일 등등 아직 할일은 많다. 이는 진보주의자들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를 넘어 이 땅의 상식적인 모든 사람들의 '최소 민주주의를 향한 희망'이다. 내가 그거 한다고 해서 '배신한 진보주의자'로 불린다면, 그건 별로 해롭지 않은 별명일 것 같다. 나는 원래부터 삼급수에 사는 붕어처럼 시대의 조류에 있어서도 항상 삼류였으니까!


2. 우리 시대에 있어서 '진보'의 의미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성실한 스파링 파트너로 등장한 이데올로기 시대에 현실-정치적 노선을 구분하는 좌-우는 각기 아주 선명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사회주의는 "그 강력한 이데올로기 생산력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시대의 주류 이념이 되어 본적이 없었다"는 의미에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영원한 '스파링 파트너'이다. 이데올로기적 대립 각이 분명하던 시대에 이런 구분은 많은 부정적인 결과들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역동성을 제고하는 유효한 수단이었으며, 민족적, 국가적 자기 동일성 확립에 기여한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몰락, 경제의 세계화와 그로 인한 문화적 다원주의의 확산, 그리고 제3의 길을 걷는 유럽 좌파들의 애매한 노선은 이와 같은 구분을 허물어 버렸다. 더욱이 인간과 이성과 세상을 빈정거리고, 조롱함으로써, 또한 길 잃은 좌파들에게 임시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폭발적인 유행을 선도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적 수법과 몽롱한 언술은 이런 경계를 더욱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어느 사회에서건 보수 세력이 이데올로기적 차별화를 선도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보의 몫이었다. 진보 세력들은 이처럼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한 차별이 불가능한, 그래서 오직 차이만 있는 이념적 지형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희미하지만 옛날의 구분선과 경계선을 볼 수 있으며, 근본적인 구분은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를테면 좌파는 개인적 자유보다는 평등에 헌신하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정의로우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강한 '연대감'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착하고 공정한 인격의 소유자들'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이들이 보기에 보수 세력은 사회와 경제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고, 자족적인 개인을 찬양하며, 현실에 순응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기회주의, 염세주의자, 견유주의자(犬儒主義者)가 될 수밖에 없는 '나쁜 사람들'이다. 저 유명한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의 구호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는 하마 '진보는 선한 사람들의 생각이고, 보수는 나쁜 사람들의 생각'임을 함축하고 있다.

 
진보 세력은 사람이 사회 속에서 평등할 수 있는 조건은 고려하지 않고 '평등'을 사회적 선의 공정한 분배에 기초한 '처지의 평등'으로 생각한다. 월처(Michael Walzer)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보수 세력은 인격으로서 도덕적 존엄에서, 법 앞에서, 기회 가짐에 있어서의 사람들의 '조건의  평등'을 생각한다. 롤즈(John Rawls)의 생각이 여기에 속한다. 보수 세력은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불공평을 낳는다는 진보 세력의 전형적인 불평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불평등이 불공평을 결과하든지 아니든지 간에, 차이를 만들어 내는 규칙들을 신중하게 '구성'함으로써 정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진보 세력은 '연대감'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런데 연대라는 말은 그리 투명한 개념이 아니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연대란 궁핍한 처지에 놓인 이웃을 염려하는 마음, 공감대, 계급의식, 동류의식 같은 것인데, 이런 연대감을 공공 정책에 반영해서 '살아 있는 의식'으로 만들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진보 세력의 '자비의 요구'는 '정의의 요구'가 아니다. 자비는 정책이 될 수 없는 반면에 정의는 정책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따라서 그들의 연대감은 좋게 말하면, 현재의 사회적․계층적 갈등은 외면한 채, 휴머니즘의 본성과 교양 있는 사람들의 관용에 의지하려는 '정서'이고, 나쁘게 말하면 '강제된 자비의 이데올로기'이다. 


선하게 살아라! 혹은 자비롭게 살아라! 라는 경구는 그 자체로 도덕적 명령이며, 고귀한 인간적 충동이다. 하지만 도덕이 현실적인 정책이 될 수 없다. 선과 자비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현실적이고,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합당한 다원주의(롤즈)를 사실로 받아들일 경우, 합리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은 자선가이거나 자선의 수혜자, 둘 중의 하나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합당하고(reasonable), 합리적인(rational)시민'으로서 타산적 이해관심에 입각해서 경쟁하고 타협하는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고자 한다. 이는 보수주의자건, 진보주의자건 예외없이 선택해야 하는 생존 법칙이다.

 

진보 세력이 제시하는 관용, 사랑, 자비의 정치철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적 영역에 참여할 동기부여로서는 의미가 있을지는 몰라도, 재화의 불평등한 분배로부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이 되기에는 경솔하고 무책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사랑, 자비, 관용)은 업적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만인은 만인에 대해 동등한 사랑의 의무를 진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한 도덕적 충동이기 때문이다. 

 

3. 정의는 언제나 현실을 편든다 


진보주의는 '시대 이념(ideen der Epoche)'이고, 보수주의는 '현실적 체제(realen System)'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현실 정치의 투기장에서 진보주의가 보수주의를 이겨본 적이 없다. 진보, 혹은 좌파적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먹고 사는 일에는 '보수적인' 상황 판단을 외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보수는 현실이요,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보수할 것인가?'라는 진보주의자의 물음에 대해 '자신의 실존적 선택을 보수한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물론 악의적으로 해석하면, 이런 태도는 비전도 미래 조망도 없이 오직 '개인적으로 살아남는 것'만을 문제 삼는다는 말도 될 것이다. 


언어는 살아 있는 것이기에 부단히 그 어의를 변경시킨다. 보수주의라는 단어도 예외가 아니다.  프랑스 혁명 후 무제한적 민주주의와 자유의 요구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 보수주의는 '결과적으로 실패할 것이 분명한 새로운 것, 개혁, 진보적 사고방식에 저항하면서 좋았던 옛날'로 회귀하고자 하는 퇴행적인 사람들, 혁명과 개혁에 반대하는 반 자유주의자들,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의 은총을 고수하려는 전통주의적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부정적 의미'를 짊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보수주의자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 보수주의는 상대주의적인 개념으로 되었다. 


민족주의는 보수주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가지고, 통일의 결정적인 동기는 '민족적 가치가 아니라, 민주주의적 가치'라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자들'을 반민족적인 보수주의자로 몰아간다. 보수주의자가 자유주의자를 '보수'로 낙인찍는 이데올로기적 착종은 최근 들어 더욱 심화되고 있다. 맑스가 180년 전에 이미 명쾌하게 선언했듯이 "역사는 가장 명징한 인간의 논리"이다.

 

역사는 언제, 어디서나 현실 정치를 비추는 반사거울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의식은 정치적 행위의식"이다. 이처럼 역사가 가장 명징한 인간의 논리라면, 역사의 반대편인 현실 인식은 '지금, 여기가 가장 완전하고, 정의롭다'는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이다. 이런 조건하에서 보수주의는 '현실은 언제나 정의의 편'이라는 명제를 신봉한다. 역사는 왜곡될 수 있지만, 현실은 이데올로기가 아니고서는 왜곡되지 않는다. 


4. 진짜 보수와 사이비 보수 


이처럼 보수는 현실에서 가장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고 있다. 편안하면 나태와 안일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보수주의에는 다양한 '사이비 보수'가 숨어든다. 첫째가 '기회주의'다. 보수적 사고가 현실에 대한 투철한 반성없이, 현실에 잘 순응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회주의다.

 

둘째, 보수가 대체로 현실에 만족한다는 점에서 '견유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세상은 법대로 되는 게 아니며, 만인은 평등하다든가, 정의는 모든 것 위에 주재하신다는 생각은 자유주의자들의 꿈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직 저 냉엄하고도 부정의한 현실을 수긍하라! 고 설교하는 사람들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견유주의자들이다.

 

세 번째는 염세적인 숙명론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언제나 자유로운 개인, 야만과 미성숙한 이성으로부터의 계몽, 사회의 성장과 진보 --- 맑스주의는 이 모든 것을 두루 구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행복의 철학(Glücksphilosophie)이다 ---와 같은 긍정의 유토피아를 그려낸다. 그러나 숙명론자들은 인간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으며, 인간은 불완전하고, 약하고, 쉽게 유혹에 넘어가는 그런 존재이기에, 국가의 보호와 족쇄가 없으면 야만적인 미물로 전락해 버릴 것이기 때문에, 국가는 인류학적 필연이며, 현실의 거대한 힘인 '국가는 그래서 매우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권위와 제도의 해체를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보수는 주류이고 다수이다. 우리는 보수적인 옷을 입고 수구적인 화장을 하고, 숨어드는 저런 위험한 사이비 보수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지 부시의 '동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 혹은 한국의 '따뜻한 보수주의', '개혁적 중도통합 보수주의' 등은 건강한 보수와 '보수 반동'을 구분하는 데 전혀 유용하지 못한 형용이다.

 

그러면 진짜 보수는 누구인가? 독일의 역사철학자 마크바르트(Odo Marquard)는 그런 사람을 '현대성을 겸비한 전통주의자(Modernitätstraditionalisten)'라고 불렀다. 전통과 현대가 복잡하게 얽혀 공존하는 한국사회에서 진짜 보수는 현실의 모던적․포스트모던적 문화 가치들에 주목하고, 거기서 출발하여 전통으로 향하는, '역사를 거슬러 빗질하는 사람들(발터 벤야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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