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구 교수] 이명박 정권 시절의 작은 에피소드 하나

대통령 두사람 잘못 뽑은 죄로 우리는 '잃어버린 10년'이란 가혹한 형벌을 받고 있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16/12/29 [16:55]

 이준구 전 서울대 교수 

블랙리스트가 있니 없니 말들이 많았는데, 어제 SBS 뉴스에 그 실물이 등장했으니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 동안 블백리스트 없다고 거짓말 해오던 친구들은 이 기회에 아예 우리 사회에서 매장을 시켜 버렸으면 좋겠군요. 공적인 자리에 있으면서 어떻게 그리도 천연덕스럽게 입에다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잘 하는지요.

그런데 자기네 패거리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의 불랙리스트를 만들어 놓는 버릇은 비단 이 정권에 국한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 개인적 경험에 따르면 MB정권 때도 거의 분명하게 그런 블랙리스트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으니까요.

지난 번에도 잠깐 말씀 드린 바 있지만, 나는 MB정권 시절 문체부 산하의 한 작은 위원회에서 위원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는 문광부인가 이름이 조금 달랐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정부의 위원회 중에는 위원이 차관급인 어마어마한 위원회도 있지만, 이 위원회는 권한도 별로 없고 알려지지도 않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중요하고 빛나는 위원회라면 MB정부가 미운 털 박힌 나에게 위원 자리를 맡겼겠어요? 

지금은 그 위원회의 이름을 잊었지만, 한 달에 한 번 만나 '이달의 추천도서' 한 권을 고르는 일이 그 위원회의 일이었습니다. 분과가 한 7. 8개 있었는데, 나는 경제, 경영분야의 책을 고르는 일을 맡았구요. 그러니까 정치적 임팩트는 하나도 없는 정말로 한가한 위원회라고 할 수 있지요.

내가 위원으로 임명되어 담당 기관의 책임자에게 인사를 하러 갔더니 재미있는 말을 하더군요. 내가 위원이 되는 데 어려움이 조금 있었다구요. 내가 그 위원이 되면 늘상 좌파 책만 추천도서로 선정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강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네요.

그 말을 듣고 그 친구들의 치졸한 생각에 기가 막혀 속으로 한참이나 웃었습니다.
내가 한반도대운하 반대 글을 쓴 순간 '좌빨'로 몰렸던 건 사실이지만, 한반도운하가 이념적 성향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일 아닙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기득권 세력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모두 좌빨로 몰지만, 내가 위원이 되어 정말로 좌파 책만 추천하리라고 믿는 건 돌대가리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지요.

기록에 남아 있겠지만, 내가 위원으로 일한 2년 동안 좌파 책이라고 할 만한 것을 추천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좋은 책이라면 좌파 책이라고 해서 굳이 배제할 이유가 없겠지만, 내가 일하던 그 즈음에 내 눈을 끌 만한 책이 나오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대중들이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무엇인가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추천도서를 선정했습니다.


그 위원의 임기는 3년이었습니다.
위원에 따라 일하기 시작한 시점이 다르기 때문에 해마다 일부가 교체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임기가 1년이나 남은 시점에서 갑자기 나에게 해촉 통보가 온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려 난 그 위원회 가는 일이 그다지 즐겁지 않았습니다.
회의 장소도 멀거니와 가면 한 나절을 쓰고 와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임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고 보니 기분이 언짢더군요. 임기 전에 해촉 통보를 받은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이 뭔가 의아스럽기도 했구요.

낌새가 이상하다는 내 짐작은 담당자의 전화에 의해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자신들은 나를 위원으로 더 모시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너그러이 이해해 달라고 말하더군요. 짐작컨대 문체부에서 나를 자르라는 명령이 내려 왔겠지요.
그건 내가 MB정권이 작성한 블랙리스트 위에 올라가 있었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거듭 말씀 드리지만 그 위원회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빛나는 것도 아닌 위원들이 순전히 봉사 차원에서 일하는 작은 위원회였습니다. 그런 위원회에서조차 자기네들이 싫어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옹졸함에 기가 막히더군요. 내가 느끼기에는 바로 그런 옹졸함이 MB정권과 박근혜정권의 실체입니다.

그들은 입으로만 대통합, 대화합을 부르짖고 속으로는 자기네들 패거리들만 꽁꽁 뭉쳐 이 나라를 말아 먹었습니다.. 도대체 민주주의 국가에서 내 편 네 편을 갈라 블랙리스트를 만든다는 것이 생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청와대가 주도해 그런 불량하기 짝이 없는 문서를 작성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대통령 두 사람을 잘못 뽑은 죄로 우리는 '잃어버린 10년'이란 가혹한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그 동안 하나 하나 쌓아왔던 민주화의 기반이 사리사욕에 눈이 먼 그 패거리들의 장난질로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린 모습이 참담하기까지 합니다.


바로 그런 참담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추위 속에서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행진하도록 만든 이유가 되었겠지요.

 

출처 : 이준구 전 서울대 교수 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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