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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호국인물 '조선의열단 김익상' 지사 선정

후손이 없어 '조선의열단 기념사업회 김원웅 회장'이 선정증서 대신 수령 

김창수 기자 | 기사입력 2017/02/03 [19:52]

2월의 호국인물 '조선의열단 김익상' 지사 선정

후손이 없어 '조선의열단 기념사업회 김원웅 회장'이 선정증서 대신 수령 

김창수 기자 | 입력 : 2017/02/03 [19:52]

 

2일 오후 2시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2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조선의열단 김익상 지사를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행사를 주최한 전쟁기념사업회 이영계 회장(예비역 육군 중장)을 비롯해 전쟁기념관의 여러 관계자들과 시민들이 참석했다.

 

특히 조선의열단 기념사업회 김원웅 회장이 참석하여 헌화 및 분향하고 후손이 없는 김익상 지사의 호국인물 선정 증서를 대신 수령했다.

 

김 지사가 후손이 없어 조선의열단 기념사업회 김원웅 회장이 대신 호국인물 선정서를 수령했다.

 

김익상 지사의 본명은 김봉남(金鳳男), 호는 추산(秋山)이며 1895년 6월 25일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25세 때 경성 교북동(종로구 독립문 사거리 인근) 광성연초공사의 기계감독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 5월 중국 봉천(現 심양) 지점에 기관수로 발령을 받았다.

 

봉천에 도착한 김익상은 어릴 적부터 꿈이었던 비행사가 되기 위해 비행학교가 있는 광둥으로 갔으나 당시 중국에서 군벌 간의 다툼으로 비행학교는 폐교 중이었다. 베이징으로 간 김익상은 그곳에서 조선독립운동을 목격하고 조선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의 연설에 감동받은 김익상은 조선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1년 김익상은 김원봉 단장으로부터 총독 암살 밀령을 받고 국내로 들어왔다. 9월 12일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하여 남산 조선총독부에 잠입하였고, 2층 비서과와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되었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였다. 혼란한 틈에 현장을 빠져나와 평양을 거쳐 9월 17일 무사히 베이징으로 돌아왔으며, 김원봉 단장에게 의거 사실을 보고하였다.

 

1922년 2월 3일 상하이에서 김원봉 단장을 만났을 때 3월 28일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가 상하이 부두인 황포탄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듣고 동지 오성륜, 이종암과 함께 다나카 암살 임무를 맡았다. 3월 28일 배를 타고 황포탄에 도착한 다나카를 향해 오성륜과 김익상 지사가 두 차례 저격하였으나 오발로 서양여인에게 맞아 실패하였고, 폭탄도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김익상 지사는 조선총독부 폭탄 사건과 황포탄 사건으로 11월 6일 나가사키 공소원의 공소공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세 차례의 특별사면으로 형기가 줄어들었다. 일본 나가사키, 시즈오카, 구마모토, 가고시마 각 형무소를 옮겨 다니며 1942년에 20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옥하였다.

 

그러나 출옥 후 일본 고등경찰에게 연행된 뒤 종적이 묘연해졌는데 일본 경찰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1962년 제43회 삼일절을 기하여 김익상 지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양부모가 조선의열단 출신인 김원웅 회장은 남북이 하나가 되어 외세를 물리치고 진정한 자주독립국가를 이루는 것이 조선의열단을 비롯한 독립선열들의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본 행사에 이어 진행된 다례회에서 김원웅 회장은 자신의 부모도 조선의열단 출신이었음을 밝히며 앞으로 남북이 하나가 되어 외세를 물리치고 진정한 자주독립국가를 이루는 것이 조선의열단을 비롯한 독립선열들의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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