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마주하는 순국선열 이야기...'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한 신채호

"역사가 없으면 필경 나라가 망한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17/02/25 [08:48]

슬픈 자화상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조국 프랑스를 나치가 점령하자 연구실에만 있을 수 없었다. 레지스탕스 운동에 뛰어든 그는 1944년 체포되어 비밀경찰 게슈타포에게 넘겨졌다. 몽르크 감옥에서 지독한 고문에도 자신의 본명 외에는 어떤 것도 발설하기를 거부하다가 프랑스 리옹의 한 벌판에서 처형당하였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이 위대한 애국자이자 사학자의 명저가 사후에 출간되어 전해지고 있는 <역사를 위한 변명>이다.

 

마르크 블로크보다 앞서 조선의 신채호는 1928년 일경에게 체포되어 요동반도 끝자락 뤼순(여순)감옥에서 혹독한 고문과 살을 에는 추위 그리고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꼿꼿하다고 소문난 신채호도 겨울의 뤼순감옥이 어찌나 추웠던지 서울의 부인 박자혜에게 "두꺼운 솜옷을 보내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단재 신채호 수인 사진 


생계조차 힘들어 솜옷을 보낼 수 없었던 박자혜는 "서울도 이렇게 추운데 대련이야 오죽 춥겠습니까"라며 눈물만 흘렸다(동아일보, 1928년 12월 12일). 한국 독립운동사를 들여다 볼 때마다 접하는 이런 슬픈 서사곡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신채호는 노역에 종사하면서 10분 정도 쉬는 시간을 이용해 역사저술에 매진했다. 감옥에서 일체의 참고 사료를 볼 수 없기에 기억에 의존해서 쓸 수밖에 없었건만 오늘날 이 땅의 식민사학자들은 인용문을 비하한다.

 

생존기간 중 30여 년을 일제에 항거한 신채호는 마르크 블로크 사후의 프랑스와는 다른 조국을 만났기 때문에 생긴 슬픈 자화상이다. 신채호를 위한 변명(?)은 아직까지도 설 자리가 없는 친일파 청산이 무산된 조국이다.

 

임자들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뭐 아나?
 

참의부 참의장이자 역사학자였던 희산 김승학에게 이승만 정권 치하는 일제강점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경찰의 감시와 극도의 궁핍한 삶 그 자체였다.

 

5·16군사 쿠데타 후 박정희 군사정권은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을 서훈하기로 하고 공적조사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조선총독 직속의 조선사편수회 출신 이병도 신석호도 위원이었다.

 

희산 김승학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 출신의 위원이 두 역사학자에게 "임자들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뭐 아나?"라고 쏘아붙였다는 말이 김승학을 통해 전해진다.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독립투사의 공훈을 심사하는 본말이 전도된 나라에서, 이들은 일본인 스승들이 쫓겨 간 자리를 차지하고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역사관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한사군한반도설'은
매우 심한 망발이라
 

일제강점기 이나바 이와기치, 쓰다 소키치 등의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고착화시킨 '한사군 한반도(북부)설'은 그 제자 이병도가 그대로 계승해 지금까지도 주류사학계의 하나뿐인 정설로 이 나라의 역사를 유린하고 있는 문제적 역사 주어이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민족지도자와 조선사편수회의 역사관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성공이 눈부시다.

"고대 한국의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였고,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였어. 20세기 대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된 것은 한국사의 필연적 귀결이니 운명에 순응해서 살아"

이 주어에는 조선총독부의 세뇌와 명령이 그대로 살아 있다. 한사군한반도설은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의 위치가 지금의 평양이라는 것인데, 신채호는 이미 뤼순의 차디찬 감옥에서 '한사군한반도설'에 분개했다.

 

"위씨(衛氏:위만 조선)의 강역은 <사기>에 말한 바 패수와 왕검의 위치로 가릴 뿐인데, 당시의 패수를 대동강이라 하며 왕검을 평양이라 하는 것은 매우 심한 망발(妄發)이라."

조선상고문화사, 1932년
 

이 땅의 비극은 '한사군한반도설'이 일제강점기 때만의 '망발'이 아니라는 현실에 있다. 현재 사학계는 신채호가 그토록 비판했던 '한사군한반도설'을 하나뿐인 정설로 만들어 다른 견해는 모두 제거하는 철옹성을 쌓았다.

 

전국 대학의 모든 사학과에 '한사군한반도설' 하나만 살아있는 희한한 현실이다. 신채호가 목숨 걸었던 시대의 색 바랜 보고서가 아니다. 지금의 현실이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오
 

신채호는 책상머리 학자가 아니었다. 그에게 역사란 실천의 학문이었다. 그는 피압박 민족은 오직 무장투쟁에 의해서만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독립운동 진영에서 횡행하는 외교독립론, 실력양성론, 민족자치론을 모두 배격했다.

 

1919년 4월의 일이다. 신채호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발기인 29인 모임에 참여하였다. 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신채호는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했던 사실을 비판하며 일갈(一喝)하고 퇴장했다.

"따지고 보면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오. 이완용 등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나라를 찾기도 전에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었소."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외교독립론으로 방향을 결정하자, 미련 없이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북경으로 갔다.

 

가족이 그리워
 

신채호는 북경에서 이회영김창숙을 매일 같이 만나며 우의를 다졌다. 그때 이회영의 맏며느리이자 일제의 귀족작위를 거부했던 조정구의 딸 조계진이 주선하여 북경의 연경대학 의예과에 유학 중이던 박자혜를 만나 결혼하였다.

 

신채호의 부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자혜 ⓒ 국가보훈처


박자혜는 숙명여학교를 나와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간호사들의 독립운동 조직인 '간우회' 설립에 관여했다가 중국에 망명했던 터였다. 15세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부부가 된 둘의 행복은 얼마 가지 못했다.

 

박자혜는 극도의 가난 때문에 신채호와 헤어져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신채호와 함께 활동했던 아나키스트 유자명"마흔이 넘은 단재 선생은 항상 고국에 있는 부인과 아들을 그리워하였고 정신상에서 늘 고통을 받았다. 이런 괴로운 심정을 나에게 이야기하곤 하였다"고 전한다.

 

폭력은 우리 독립운동의
유일한 무기
 

신채호는 1923년 상해로 갔다. 의열단 의백 김원봉유자명이 초청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에서 신채호를 초청한 이유는 자신들의 주의 주장을 담은 선언문을 써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1920년 9월 의열단원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폭사시키고 단식 투쟁 끝에 절명했다("악질 경찰서장을 제거하라"). 같은 해 12월 최수봉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불발했음에도 일제는 이듬해 7월 사형시켰다.

 

1921년 김익상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다. 상해로 귀환 한 김익상은 1922년 3월 상해 황포탄에서 오성륜, 이종암과 함께 다나카 기이치 대장을 저격했다가 빗맞는 바람에 실패했다. 상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폭탄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지자 일제는 경악했다.

 

김익상 ⓒ 국가보훈처


당황한 일제는 한국 독립운동세력을 테러단체로 모는 여론 조작에 나섰고, 이에 넘어간 독립운동계의 외교독립론 계열에서는 의열단과 선 긋기에 나서거나 "공포수단에 의지한 과격주의 소치"라며 의열단을 비난하는 일까지 있었다.

 

의열단은 분개했다. 폭탄이 불발된 최수봉이 사형당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신들은 교수대를 일상처럼 여기며 투쟁하고 있는데 격려는 못할망정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신채호에게 선언문 작성을 부탁했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조건의 필요성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해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 사회를 박탈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라고 대미를 장식한 <조선혁명선언> '의열단선언'이라고도 하는 이유가 이런 배경에 있다.

 

<조선혁명선언>은 시대를 막론하고 정의에 굶주린 사회일수록 살아 생동한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가 역사전쟁의 교본이라면 <조선혁명선언>은 무장독립투쟁의 교본이었다.

 

<조선혁명선언>이 극비리에 국내외에 유포되자 일제는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혁명선언'이 유포되던 1923년 1월 의열단원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4백여 명의 일경과 총격전을 전개하다가 영화 '밀정'의 오프닝 장면처럼 마지막 총탄을 격발하여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역사는 정의를 향한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것
 

신채호는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학자였고, 일제가 체포하기 위해 광분하는 학자였다. 그러나 신채호는 이런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1928년 재 중국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제의 식민지인 대만으로 향했다가 기륭항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1936년 뤼순감옥의 싸늘한 바닥에서 운명하였다.

신채호 선생이 순국한 뤼순감옥 ⓒ 권태균


"이제는 모든 희망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신채호 선생의 순국소식을 듣고 이런 절망적 말을 남긴 박자혜 여사는 1943년 선생을 따라 갔다. 박자혜 여사는 물론 신채호의 절망은 그들이 목숨 걸고 되찾고자 했던 이 나라의 광복에 의해서만 희망과 기쁨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찾아온 1945년 8월 15일의 해방.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역사는 진실 즉 정의를 향한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문구는 우파 드골이 앞장서서 나치 부역자를 처단한 프랑스에서라면 몰라도 이 땅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허망한 명구(名句)이다.

 

민중이여 깨어나라!
역사의 주체가 되자
 

지금 단재 신채호는 식민사학자들에게 조롱과 저주와 왜곡의 대상이다. 지난 정권에서 한국학 관련 주요 직책을 맡은 한 중견 역사학자는 학술회의 석상에서 "신채호는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라고 망언했다.

 

그 망언을 듣고 한 역사학자도 항의하지 않았다. 이런 역사학자들에게서 배운 이른바 젊은 역사학자들은 이제 단재 신채호에게서 '민족'을 떼어내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경지까지 타락했다.

 

<조선혁명선언>에 엄연히 나오는 '단군'을 부인하고 '일본 강도 정치가 우리 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했음에도 단재가 민족을 버렸다고 호도한다. 그래서 이 땅에서 민중은 깨어있어야 한다.

 

일본 극우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식민사학자들은 때로는 보수의 가면을 쓰고, 때로는 진보의 가면을 쓰고 '민중'을 속여 왔다. 일제 강점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 각오의 요구니라.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는가? 민중은 신인이나 성인이나 어떤 영웅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요..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됨이 민중 각오의 첫째 길이다."

 

우리 스스로 사이비 지식인들에게 속지 말고 우리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가 되자. 이것이 단재 신채호 선생의 가르침이다.

 

글 ㅣ 임연규(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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