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 논객 'coma'가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상복 경주빵' 이야기

서울의소리 | 입력 : 2017/05/27 [23:02]

이상복 경주빵 이야기

 

지인의 소개로 경주에서 50년 동안 수제 팥빵을 만들고 있는 이상복(64세) 선생을 만났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소박한 외모를 지닌 분인데,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 빵 이야기만 나오면 청산유수가 된다. 그만큼 빵에 관해선 할 이야기가 많고 한(恨)도 많다는 뜻이다.

 

이상복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64년 전에 경북 경주 산골마을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상복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없었다. 가장이 없는 상태에서 8남매를 키워낸 어머니의 고단한 삶은 미루어 짐작이 간다. 8남매를 키우기 위해 한지(韓紙)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이웃집 농사도 지었으며, 속말로 안 해 본 것 없이 다 했다. 하루하루 가족의 주린 배를 채우는 게 어머니의 목표였다. 그런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상복은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집안 사정상 중학교를 갈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복은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가 우연히 황남빵 가게에 들렀다. 가게 주인이 사연을 듣고 상복을 직공으로 채용해 주었다. 그때가 1964년, 상복의 나이 13세 때였다. 상복이 빵과 인연을 맺은 순간이었다. 

 

그때 인연으로 만난 사람이 바로 황남빵 창시자로 유명한 최용화 옹이다. 상복은 그저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 빵집에 취직했다. 그러나 상복의 성실함과 정직함에 감동한 최용화 옹이 상복을 정식으로 수제자로 삼고 자신의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거기서 뭐 하노?”

어느 날 상복이 진흙으로 반죽 연습을 하고 있을 때,

스승이 다가오며 고개를 갸웃했다. 

“밀가루가 귀해 진흙으로 반죽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허허허, 기특한지고...”

상복의 성실함에 다시 반한 스승은 자신의 모든 기술을 상복에게 전해주었다.

상복은 20년 동안 스승 밑에서 일하며 황남빵 기술을 익혔다.

“음식에는 기술이 아니라, 진실이 담겨야 한다.”

 

스승은 음식 만드는 것을 기술이라고 하는 표현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좋은 재료의 선택, 반죽, 적당한 온도 맞추기가 빵 만들기의 기본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빵을 내 가족이 먹는다 생각하고 정성스럽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어떠한 거짓과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집반찬의 맛이 아낙네의 손가락에서 나오듯 빵 맛은 화학 첨가제가 아니라 바로 장인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다.

 

“가르침대로 하겠습니다.”

상복은 스승의 말을 늘 가슴에 담고 빵을 만들었다. 여러 제자가 있었지만 상복을 유일하게 수제자로 삼은 것은 상복 특유의 소박함과 정직함 그리고 성실함 때문이었다. 무엇이든 절실해야 잘 하는 법, 중학교도 가지 못한 상복은 친구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이 몹시 부러웠지만 이를 악물고 빵 만드는 것에 열중했다.

 

“그렇게 재미있냐?”

상복이 자전거를 타고 빵을 배달한 후 휘파람을 불며 돌아오자 스승이 흐뭇하게 웃었다.

“자전거 타는 재미는 덤 아입니꺼.”

“그래. 무슨 일이든 즐기며 해야 한다. 누구도 즐기며 일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스승이 환하게 웃으며 가게로 들어가 다시 빵을 만들었다. 반죽을 조금씩 떼어내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었다. 손가락이 피아니스트처럼 움직이고 반죽 안에 듬뿍 들어가는 팥은 푸짐했다. 밀가루 반죽과 팥이 적절한 온도에 익어가는 시간은 상복의 인품이 익어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쩌다 거지가 지나가면 상복은 빵 몇 개를 건넸다.

 

“마음도 빵처럼 예쁘구나. 그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려는 마음, 그게 부처다.”

스승이 그 모습을 보고 불국사 쪽을 바라보았다. 절에서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 왔다.

 

“상복아, 니는 와 아직까지 그 노인 밑에서 일하노? 니 실력이면 독립해서 돈 많이 벌 수 있다 아이가.”

 

간혹 동료들이 상복에게 그만 독립하라고 했지만 상복은 스무 해 동안 스승 곁을 떠나지 않았다. 스승이 자신을 마치 친아들처럼 대해주고, 수제자로 인정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이 상복을 불렀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퇴직금 대신에 옆에 있는 작은 가게를 줄 테니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면 직접 운영하거라.”

 

그 말을 남긴 스승은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스승을 잃은 상복은 한동안 슬픔에 잠겨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처럼 의지했던 스승이 이 세상에 없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 엄습해왔다. 그때 상복의 나이 35세였다.

 

결혼을 한 상복은 스승이 창시한 황남빵으로 경주에서 가게를 열 수 없다 생각하고 포항으로 가 1988년 ‘경주 황남방’이란 상호로 가게를 열었다. 유명한 황남빵을 포항에서도 먹게 되자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언론에서도 황토음식으로 소개해 주었다.

 

하지만 독립한 지 11년이 지난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경주법원으로부터 ‘더 이상 황남빵 상호를 사용할 수 없으니 이만 간판을 내리고 2억을 배상하라’는 소장이 온 것이다. 스승의 가족 중 한 명이 소송을 제기한 것이었다.

 

“스승님이 저를 수제자로 인정해 준 것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상복이 따졌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상대측은 “당신에게 빵 만드는 기술을 전수해 준 것이지, 상호 자체를 물려준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로 재판에 임해 승소했다. 상복은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모든 것을 잃게 된 상복은 간판을 내리고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원망과 억분으로 잠이 오질 않았지만, 스승의 가족과 계속 싸우는 것도 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13세 아이를 거두어준 스승을 생각해서라도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 후 이상복 선생은 진주에 공장을 세우고 경주빵이란 브랜드로 빵을 만들었다. 지역 이름을 사용한 경주빵은 상호 특허권이 없어 아무나 사용했다. 이상복 선생은 최초로 빵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이상복 경주빵’이란 브랜드를 만들었다.

 

“지인에게 선생의 사연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했던가, 어느 날 중년 신사가 이상복 선생을 찾아와 ‘이상복 경주빵’을 사업화하자고 건의했다. 알고 보니 그 중년 신사는 한때 우리나라 출판계를 주름잡던 (주)한국교육미디어 최대환 회장이었다.

 

“나도 친구의 농간으로 사업을 말아먹었지만 이상복 선생의 사연도 참 기구합디다. 그래서 찾아왔소.”

 

이상복 선생에게 최대한 회장은 동병상련을 느낀다며 같이 사업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이상복 선생은 처음엔 믿음이 안 가 망설였지만 최대환 회장의 진심어린 제안에 감동해 수락했다.

 

진주에 있는 공장을 경주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사업이 전개되었다. 경주 첨성로 61번지에 본점이 생기고, 그 외 세 곳에 가맹점이 생겼다. 경주 버스 터미널 부근에 있는 ‘경주 시티 타워’ 빌딩 일 층에 대형 매장도 곧 생겨난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시기어린 해코지가 벌어졌지만 이상복 선생의 장인정신과 최대환 회장의 사업 수완 능력이 결합해 점점 사세가 확장되고 있다.

 

이상복 경주빵에서 통일빵으로

 

이상복 선생과 최대환 회장의 꿈은 일차적으로 ‘이상복 경주빵’을 브랜드화하고, 이것이 성공하면 ‘통일방’을 만드는 것에 있다. 남북이 다시 서로 화합하고 교류하게 되면 ‘이상복 통일빵’을 북한에 보내는 것이 꿈이다. 판매대금 5%를 통일적금으로 든다니,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아고라 논객에서 빵 장사로?

 

필자는 원래 무명작가 겸 대입학원 국어와 논술 강사였다. 하지만 2012년 대선에서 원하던 후보가 낙마하자 실의에 잠겨 생업을 접다시피 하고 인터넷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약 5년 동안 3,100개의 베스트 글을 아고라 토론방에 올렸다. 누적 조회수 1,700만 명, 원고지로 환산해보니 약 6만 매의 글을 썼다. 장편소설로 치면 약 40권 분량이다. 나는 신춘문예 당선 작가이지만 정작 소설집은 두 권밖에 내지 못했다. 그만큼 정권교체가 절실했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다행히 이번 대선에서 원하던 후보가 당선되었다.

 

하지만 나는 지난 5년 동안 가정 경제를 거의 돌보지 못했다. 대신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 경주에서 이상복 선생과 최대환 회장을 만난 나는 ‘그래, 바로 이거야!’하고 나도 이상복 경주빵 사업을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취지에 동감한 두 분이 흔쾌히 허락했다. 신춘문예에 시, 소설, 동화가 당선되었지만 아직 한국은 소위 ‘글쟁이’가 편안하게 살 곳은 아니다. ‘선비는 가난하다.’란 말이 결코 옛말은 아니었다.

 

숱한 시간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던 제가 이제 현실의 바닥에 발을 디디려 합니다. 우선 인터넷을 활용해 온라인 판매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곧 정식으로 개인 카페를 만들어 온라인 판매를 시작하겠지만, 그 전에 이상복 경주빵이 필요하신 분이 계신다면 전화를 주시거나 문자를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010-3633-4399(유영안)

 

자세한 사항은 아래 주소를 클릭하여 ‘이상복 경주빵’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고, 제품을 주문하실 때는 판매원에게 닉 coma(유영안)를 언급해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상복 경주빵 홈페이지

www.gjbakery.com

 

054-748-8877, 010-3633-4399(coma)

 

* 이상 coma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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