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부녀는 동족의 아픈 역사를 헐값에 팔아넘긴 것”

친일파들의 동상, 기념비와 기념상 그리고 학교명, 거리명을 정비해야 한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17/06/30 [00:37]

언론인으로도 잘 알려진 정운현(중앙일보, 대한매일, 오마이뉴스, 팩트TV)은 근 30년간 친일 연구를 해 온 역사학자다. 계보로 보자면 국내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인 고 임종국 선생의 뒤를 잇는 ‘2세대’ 연구가이지만, ‘1.5세대’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고 임종국 선생이 계획했던 ‘친일파 총서’가 나오지 못한 채 연구의 맥이 끊기게 됐고, 정운현은 임종국 선생의 성과를 기반으로 연구를 진행하며 자료 보급에도 힘을 기울였다. 


1948~9년, 반민특위 활동의 성과로 나왔지만 목록만 전해오던 ‘민족 정기의 심판’, ‘친일파 군상’. ‘반민자 대공판기’. ‘반민자 죄상기’를 발굴해 <친일파 죄상기>(공편,94,학민사)를 냈고, 반민특위 재판기록 영인본 17권을 10년에 거쳐 풀어 <풀어서 쓴 반민특위 재판기록>을 냈다(전4권,편역,2009,선인). 이들을 포함해 정운현이 펴 낸 친일파/독립운동 관련 책들만 1990년에 시작한 친일파 시리즈로 시작해 총 24권에 달한다.

정운현은 지난해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개정판)를 마지막으로 친일 연구 단행본 작업을 끝내며 “집 짓는데 주춧돌 하나 보탠 정도에 불과하다. 이제 그나마도 막을 내릴 때가 된 듯 하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2015년말 아베 신조 내각과 박근혜 정부 사이에 이뤄진 ‘위안부 합의’는, 일본 군국주의 세력과 한국 친일세력의 오랜 공생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내 친일 연구의 1인자인 정운현을 만나 위안부 합의와 친일파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들어봤다. 

 

▲ 반민특위 재판기록 영인본(왼쪽) 사진과 정운현이 펴 낸 <풀어서 쓴 반민특위 재판기록> 커버


- 친일연구에 몸담게 된 계기는?

“80년대말 주간지를 통해서 임종국을 알고서였다. 그 이전엔 친일파라 하면 을사오적 밖엔 몰랐다. 이후 춘원, 육당 등 민족지사들로 알려진 인물들이 친일파임을 알고 배반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30년간 자료수집과 공부를 했다. 그간 10여 권의 친일파 관련 책을 펴냈는데 대략 할만큼 했다고 본다. 더 이상 친일파 관련 단행본 출간은 안 한다.” 

- <임종국 평전>을 내신 바 있다. 임종국 선생을 간략히 소개해주신다면? 

“고려대 정치학과를 나왔고 처음엔 고시 준비생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경찰로 근무했는데, 길거리 시체들을 보고 정치인들의 무능을 탄식했다. 집안형편과 건강문제로 고시를 포기했다. 임종국 선생은 문학적 소양이 있었다. 대학시절에 이상전집 3권을 펴냈다. 졸업 후엔 출판사에 입사했다. 한국시인전집을 펴내면서 일제 당시 문인들의 행적을 조사하게 됐다. 1965년 한일협정을 계기로 이듬해 친일문학론을 출간했는데, 문단과 지성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초판 1500부를 소화하는데 13년이 걸렸다.(10.26 후에 재판 찍음). 1.000부는 일본에서 팔렸다. 이후 고단한 친일연구의 길로 들어섰다.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만60세, 1989년에 별세하셨다. 금년이 28주기다.”

- 박정희 관련 책을 많이 내셨다. 박정희 연구에 몰두하신 이유는? 

“중앙일보 부설 현대사연구소 기자로 근무하던 시절 정치부 기자들과 특별팀을 구성해 ‘박정희 시대’라는 장기연재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 때 나는 박정희의 출생부터 5.16쿠데타까지, 즉 박정희의 전반부 삶 전체를 맡았다. 그런데 그에겐 이 시기가 중요했다. 친일, 좌익, 쿠데타 등이 모두 포함됐다. 이를 계기로 그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당시 취재기록을 묶어 <실록 군인 박정희>를 출간했다. 금년이 박정희 탄생 100주년, 위인전 말고 좀 더 종합적인 인물탐구서가 나와야 한다.” 

- 박정희가 우리 현대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말한다면? 

“관점, 측면에 따라 그 시선은 다양할 것이다. 공도 있고 과도 있다. 경제건설, 자주국방 등이 공이라면 장기집권, 독재, 군사통치 등은 과다. 18년간 장기집권한 탓에 공이 커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과가 훨씬 더 많다. 기성세대들은 ‘가난극복’ 하나만을 강조하는데 박정희 시대 재벌 위주의 경제정책이 오늘날 부의 편중과 극심한 빈부격차의 단초를 제공했다. 재임중 북한 김일성과 적대적 공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분단을 고착화했고, 일제시대의 경험을 통치의 기조로 삼아 제2의 일제시대를 구가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9혁명을 군홧발로 짓밟고 독재정치를 연속한 독재자다.” 

- 한일청구권 협정이 굴욕협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집권 후 가난극복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졸속적인 한일협정을 체결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은 1952년부터 시작돼 1965년까지 14년동안 일곱 차례나 열렸다. 도중에 일본 측의 망언 등으로 곡절이 여러 차례 있었다.

박 정권 출범 초기 미국의 원조가 대폭 삭감되자 민생고 해결과 경제건설을 위해 조상들의 핏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에 눈독을 들이고 국교정상화를 추진했다. 자신의 오른팔인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해 오히라 외상과 무상3억, 유상2억 달러로 마무리 지었다. 장면 정부 시절 제시한 23억 달러와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다.

그러나 박 정권에게 행운이 따랐다. 한국전쟁 특수로 자본을 축적한 일본기업들이 해외진출을 노리고 있던 데다 당시 일본 정계에 부산적기론, 즉 부산에 적기가 꽂히면, 한국이 공산화되면 일본도 위험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견해가 일본 조야에 널리 공유돼 있었다. 게다가 미국 또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일 안보벨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결국 한미일 3국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한일국교 정상화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 

 

정운현


- 위안부 문제는 한일관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나? 

“한일협정 당시 위안부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한국 측에서도 이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피해자의 증언도 없었고 관련 연구도 전혀 없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초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의 한겨레신문 연재로 처음 거론됐고 그해 11월 정대협이 결성되면서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국제사회에서 선진국의 일원으로 행세해오던 일본으로서는 지극히 수치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 인정이나 사죄는커녕 부인과 변명으로 일관해왔다. 그러다가 1993년 고노 요헤이 일본 관방장관이 위안부 동원과정에서 군의 개입과 강제성을 인정한 소위 ‘고노담화’를 발표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듯 했다. 그러나 이후 들어선 자민당 극우정권은 이를 짓밟고 다시 극우사관으로 회귀하면서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였고, 한일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 아베 신조와 박근혜 정부간 위안부 합의의 역사적 뿌리는? 

“양국 극우정권의 왜곡된 역사관이 야합한 결과일 뿐이다. 일본은 일본대로 이 문제를 털고 싶었고, 한국정부 역시 한일 간의 갈등으로 남아있는 이 문제를 나름으로 매듭을 짓고 싶었던 거다. 정식문서로 합의한 것도 아니니 합의라고 할 수도 없다. 단돈 5억불에 한일 과거사를 정리한 박정희나 10억엔에 위안부 문제를 합의한 박근혜는 그 뿌리가 같다고 할 수 있다. 부녀는 두 차례의 매족 조약을 통해 동족의 아픈 역사를 헐값에 팔아넘긴 셈이다. 아베는 일본 자민당정권이 낳은 극우정객의 극치인 셈이다.”

- 위안부 합의를 한 양국 정상을 보면 박근혜는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의 딸이며, 아베 신조는 1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다. 

“기시는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산업부 차관을 지낸 인물로 일본의 전시경제체제 구축에 기여한 인물이다. 일본육사를 졸업한 박정희는 만주국 보병8단에서 중위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두 사람은 만주국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박정희가 한일협정을 추진할 당시 기시는 정계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배후에서 적잖은 도움을 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기시는 아베의 외조부이며,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다. 생물학적으로도 두 사람은 선대의 DNA를 물려받은 셈이다. 지난 2015년 말 한일 간의 위안부 협상은 ‘제2의 한일협정’이라고 할 수 있다. 1965년 한일협정도 국민적 합의 없이 양국 정치인들이 밀실에서 야합한 결과여서 굴욕외교라는 비난을 샀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15년의 위안부 협상 역시 피해자들과 국민적 감정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것이어서 정당성이 크게 결여됐다고 본다. 전면 파기하고 재협상해야 마땅하다.”

- 박근혜가 ‘국정교과서’를 추진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명박 정권 때 싹을 틔운 국정교과서는 박근혜 정권 들어 본격 추진되었으나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였고, 최근 새정부 출범 후 결국 폐지되었다. 박 정권이 국정교과서를 채택한 것은 사사롭게는 부친인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왜곡시키기 위한 음모에서 기인했다고 생각된다. 친일과 독재의 흠결을 지닌 박정희, 나아가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이를 권력의 힘을 빌어 비틀고자 했던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다 권력의 근본이 된 극우세력들로부터 등 떠밀린 점도 없지 않다고 본다. 그의 주변에는 온통 뉴라이트 세력들 뿐이다. 이들은 박정희를 산업화의 영웅으로 포장하면서 친일과 독재의 역사를 자랑스런 역사로 왜곡하였다. 제대로 된 역사관조차 없던 박근혜가 이들의 등에 올라탔으니 관찬(官撰) 국정교과서를 통해 역사 획일화, 역사왜곡에 나선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고 할 것이다.” 

- 박근혜의 역사전쟁은 일본 우익의 교과서 공격과 매우 유사하다. 

사상적 모태요, 역사관의 뿌리는 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뉴라이트는 일본 극우파의 역사관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의 전쟁책임을 주장하는 지성계의 목소리를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군국주의와 천황제 신봉자들로 과거 식민통치 시절 일본제국의 영화를 회고하며 극우적 행태를 찬양하였다. 이들의 주장 가운데 하나가 ‘식민지 근대화론’인데 이미 일본 역사학계에서조차 폐기된 이 이론을 들여와 일본 극우파에 동조하고 나선 것이 한국의 뉴라이트 들이다. 그 뿌리는 친일과 맞닿아 있다. 일본의 극우파가 후소샤 역사교과서를 통해 황국사관을 들고 나왔다면, 한국의 뉴라이트는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통해 친일과 독재의 역사를 미화, 강변하고 나섰다. 시대와 국적을 넘어 한일 양국의 극우세력들이 역사전쟁을 선포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양국 모두에서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해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

- 친일파 청산의 현주소는? 

“당사자들에 대한 법적, 인적 청산은 대체로 마무리 됐다고 본다. 현재 친일파라고 부를만한 인물 가운데 생존자는 백선엽 등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다만 부수적인 친일잔재는 더러 남아 있다고 본다. 친일파들의 동상, 기념비, 그리고 기념상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해당인물 못지않게 추앙의 대상이 되고 해마다 이런저런 행사 때마다 기려진다는 점에서 그 폐해가 가볍지 않다고 본다. 한 예로 매년 미당 서정주 문학상이 시상될 때마다 그를 기리고 추념하는 일이 반복된다. 친일의 흠결이 있는 인물에 대한 기념은 국민적 토론, 합의가 필요해 보인다. 그밖에 친일파의 이름을 딴 지명, 학교명, 거리명 등도 정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잠재의식 속의 일제잔재, 친일잔재를 떨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노예근성으로부터 탈출하게 될 것이다. 젊은이들 중에서도 은연중에 일제시대를 찬동하는 언행을 보면 이 나라의 미래가 우려스럽다.”

미디어 오늘 :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7535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