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백주년과 르네상스, 그리고 한국의 민주시민혁명

르네상스, 종교개혁처럼 ‘의식혁명·정치혁명·변화관리’를 실행하여 ‘민주시민혁명’을 완성한다

권혁시 칼럼 | 입력 : 2017/11/01 [20:18]

1517년 10월 31일, 벌써 북유럽의 가을은 오한을 느낄 만큼 추워져 있었다. 그 찬 공기를 맞으며 몹시 야위어 보이는 젊은 사제(수도사 신부) 마르틴 루터가 자신이 봉직하는 교회의 출입문 가운데에 한 장의 반박문(‘95개조’)을 내붙였다. 이 교회는 비텐베르크성(城)에 딸려 있었는데, 비텐베르크는 독일 중부지대 작센의 북쪽으로 흐르는 엘바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이다. 


당시에는 인구가 2천 남짓한 소읍이었으나, 독일에서 1,2위의 세력을 다투는 작센 선거후(選擧侯, 황제선출권 행사)가 주재하는 도성이 있었다. 바로 이 거성(居城)에 맞붙어 성(城)교회의 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1502년, 권력의 정상 대신에 선거후를 선택한 프리드리히 3세는 비텐베르크대학을 창립하였다. 그리고 인재양성에 주력하여 북유럽 각지, 스위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등에서 선발된 1600여 명의 학생을 교육하는 최대의 대학으로 육성하였다(당대 최고의 쾰른대학은 재학생수가 3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마르틴 루터 초상화


루터는 1506년, 신앙심 깊은 가풍의 영향 탓인지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엄격한 규율의 아구스티누스수도회에 입회한 얼마 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512년에는 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교수가 되었으며 교회의 선교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훗날 ‘종교개혁’(religious reformation)에 앞장선 루터는 칼시토트, 멜란히톤을 비롯한 이 대학 동문들인 최대의 지식인그룹으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우리 주요, 선생이신 예수(Jesus Christ)께서 ‘회개하라’ 명하셨을 때 그 회개는 우리의 삶 전체가 돌아서야 함을 명령한 것이다” “독일 교회는 독일 사람들의 교회다. 그럴진대 독일 교회 헌금을 로마의 사적 소유로 여기지 말라” “교황이나 그 어떤 사람도 사후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 사람은 모두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


루터가 라틴어로 작성하여 교회 대문에 붙였던 ‘95개조’는 독일어로 번역되어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독일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생각지도 않게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반박의 주적이 된 로마교회(가톨릭 교황)는 루터와 작센의 선거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 철회를 강권하였으나 거부당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요한 에크가 등장하여 루터에게 논전(論戰, 맞장토론)을 제안한다. 


신학교수인 요크는 특출 난 지식인이었고, 논리적이고 예리한 능변가였는데, 1519년 6월 31일부터 18일 간 벌어진 토론회에서 내용상으로는 루터를 제압하였다. 그렇기는 했으나, 이로 인해 루터가 일방적으로 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표명함으로써 명성을 드높이고 지지자들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할 수 있다.


특이 한 바는, 루터는 직접적인 활동은 뒤로 한 채 저술을 통하여 ‘종교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당시로서 적이 놀라운 점은 남다른 다작(多作)을 계속하여 3년간(1517~1520년) 60여 권의 많은 책을 저술하였고, 발매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 3대 종교개혁 문서로 일컬어지는 ‘독일 국민이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고함’,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의 바빌로니아 유수(幽囚, 억류)’는 루터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이렇게 루터에 의해 불타오른 종교개혁은 그야말로 들불처럼 그 불길이 유럽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그리하여 인문주의와 에라스무스에 보다 관심이 컸던 스위스 출신의 합리주의자 쯔빙글리로 이어졌고, 구태를 타파하는 데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던 혁명가적 기질을 타고난 파렐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에 나섰다. 그는 이전에 이미 모오우의 성서신학자 그룹의 멤버였던 르페브르의 영향을 받아 베른에서 종교개혁을 성공시키기도 하였다.


제네바를 ‘프로테스탄트의 로마’로 만들었다는 프랑스 출신 존 캘빈은 프랑스와 1세의 신교파 탄압에 반감, 회심하여 법률학을 포기하고 인문주의자로 변신하였다. 그러던 차에 가나길의 강권에 이끌려 종교개혁에 투신하였다. 영국의 헨리 8세는 (종교개혁과는 크게 연관이 없으나) 로마 교황청의 왕비 캐더린과의 이혼무효 선언 포고에 반발, 영국 교회에 대한 국왕수장령을 의회로부터 의결 받아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이탈, 영국 국교회(성공회)로 독립하였다. 


한편 로마 가톨릭교회는 1522년, 새 교황으로 선출된 하드리아누스 6세가 주도하는 교회의 악폐척결을 위한 위원회가 발족되었고 1537년, ‘교회를 바로잡기 위한 권고’를 제출하기에 이른다. 특히, 스페인의 이나시오 로욜라는 ‘예수회’(Jesuit 제수이트 교단, society of Jesus)를 창설하여 그의 동료들과 합심 협력하여 ‘반동(저항) 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 catholic reformation)에 헌신함으로써 교회를 완전히 정화, 정상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만일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탄압에만 급급하여 스스로 적폐청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몰락을 면치 못했거나, 오늘날 같은 위상을 되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종교개혁, 르네상스를 주도한 지도자들의 혁명적 리더십, 
지도자·위정자들, 리더십을 발휘하여 ‘의식혁명·정치혁명’을 이룩해야 한다

 

실은 루터가 활동하던 이전에도 종교개혁이 시도되었고, 그 선구자는 영국 옥스퍼드대학 교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프라하대학 학장으로 이 대학의 학풍에 영향을 받은 휘스였다. 그들은 종교적, 사상적 또는 권력체제의 핵심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며 로마 가톨릭교회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위클리프의 성서 영문번역, 무소유, 신도·사제 평등, 성체변화설(화체설 化體說) 부정이 중요한 논점이었고, 휘스의 혐의는 가톨릭 교리 가운데 화체설에 대한 반대, 비판이 유일하였다. 


이들은 1415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몰려 파문되었고, 위클리프의 유해와 휘스는 동시에 화형에 처해졌다. 이에 반발한 체코인들이 단결하여 봉기했으며 장장 20여 년간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에게 대항하여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에 더하여 루터의 주장·신조 중에는 위클리프·휘스의 그것이 대부분이므로 그들이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평가받을 만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이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응하여 일어난 가톨릭교회의 ‘반동(저항) 종교개혁’으로 계승되기도 한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로마교회는 민족독립 운동의 성격을 띠기도 했던 체코의 저항을 완전히 진압치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과 요구를 일정부분 받아들여 타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교황권의 쇠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독일 이외의 전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으며, 일반민중의 민족의식 고조와, 이에 따른 국왕에 대한 지지에 의해 로마교회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이로써 고위성직자 임명권, 교회과세, 교회관련 사법권 등, 전반적인 정치·경제적 지위를 상실하여 교황의 권한이 극도로 약화되었다. 


그런 데 반해 독일은 3백 여의 연방국, 제국도시로 분열, 분립한데다가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력 역시 유명무실하여 교황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로마교회의 착취가 독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하여 독일 일반 민중들의 불만이 비등해졌던 탓에 다른 지역에 비해 종교개혁의 호조건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1500년 전통의 가톨릭교회가 그 정체성을 잃고 심하게 흔들린 이유를 단적으로 말하면, 작금의 우리나라 같이 ‘부정부패’가 만연한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 많은 요인 가운데서도 결정적인 원인은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부재, 공백 현상이었다. 당시에 유럽사회에서 주도적으로 ‘지식인·지도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가톨릭 사제(성직자)들이 1347년부터 1500년대 중반까지 장기간에 걸쳐 창궐했던 페스트(‘신의 저주’) 구제에 나섰던 탓에 대다수가 병마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후로 자질이 한참 부족한 자들이 대거 사제로 충원되었고, 신성하고 엄정한 교회는 지적능력과 절제력을 상실하여 권력과 재력을 우선시하는 세속화, 곧 부정부패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이 비극적인 역사를 통하여 다시금 우리가 교훈삼고 각성해야 할 바는 국가·사회의 지식인·지도자들이 부재하거나, ‘지(知)의 의무’, 곧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구실을 다하지 못하면 ‘부패망국’(腐敗亡國)을 도저히 피할 수 없을뿐더러 온 국민이 발 벗고 나선 ‘민주시민혁명’ 역시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초기의 학설에 따르면 ‘르네상스’(renaissance)를 반종교 운동으로 단정했을 정도로 종교개혁에 인문주의의 영향과, 인문주의자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르네상스가 배출한 인문주의자들은 알프스 이북의 종교적 특징이 두드러졌는데, 프랑스의 르페브르 데타플르, 영국의 토머스 모어, 네덜란드의 울리히 에라스무스 등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그 유명한 ‘우신예찬’을 쓴 에라스무스는 ‘유토피아’의 작가 모어와의 친교를 통하여 지적·윤리적 관점에서 종교개혁의 동력과 역할의 기반 마련에 기여하였고, 이 대목이 루터와 적이 상이한 점인 것이다. 그는 사변적인 스콜라 철학을 비판하였고, 불가타 성서의 오역을 찾아내기도 하였는데, 이를 루터가 성서연구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또 한 사람 프랑스의 저명한 인문주의자 르페브르는 1507년에 복음주의의 견지에서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그리하여 루터와 마찬가지로 그는 신약성서(1522년), 구약성서(1525년)를 연이어 프랑스어로 출판하여 성경을 민중에게 보급함으로써 프랑스 일대에 성서의 대중화를 이루는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한 인문주의를 배태한 것이 르네상스이며, 이는 프랑스어로 ‘재생’(再生)을 의미한다. 19C의 역사가 미셀 레라카의 저서 ‘프랑스사’의 한 소제목이었던 이 단어가 시대에 관한 정의(定義, 개념)의 효시가 되었던 것이다(르네상스 당시에도 중세의 시대, 문화와 구분 짓고자 ‘리나시타’(재생)를 썼다 한다). 


르네상스는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과는 달리 아이러니컬하게도 로마 가톨릭교회가 종교개혁을 저지, 방어하는 데 튼튼한 보루의 역할을 다하였던 이탈리아가 발원지다. 중세 말기까지 이어졌던 봉건주의 국가·사회, 교회(가톨릭)의 교의·교리(敎義 敎理)의 지배, 그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즉 사람의 본능적 속성마저 긍정하고 인정하는 ‘인간성 회복’을 추구하는 열절한 주의주장이 르네상스의 핵심 사상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세속적으로 변질된 교회가 시초부터 중시했던 ‘정신세계’로 대전환하기를 갈망하는 커다란 외침이었다. 아울러 이탈리아인으로서는 대한의 국민이 일제에 항거했듯이 독일제국의 압제에 반발하여 자주와 독립을 갈구하는 열망의 용솟음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최근의 학설, 특히 대다수의 인본주의·현실주의자들은 르네상스 운동에 내재한 반종교성을 부정하며, 비종교적이고 교회 외적 현상이었음을 강변한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르네상스 정신의 내면에는 ‘종교의 순화, 혁신’의 기류가 관통하였고, 따라서 이를 통하여 종교개혁으로 면면히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목해야 할 바는 봉건적 정신의 어두움을 걷어내고 봉건사회를 옭아맸던 속박의 밧줄을 끊어버리고 근대 세계(근세)의 문을 열어젖힌 주역은 의외로 상인(商人)들이었다는 점이다. 철저한 합리주의에 기초한 ‘상인정신’이야말로 르네상스의 지도 이념이자 핵심 사상이었다.

 
이를 ‘상인도’(商人道)라 하거니와, 현대의 저널리즘이 흔히 말하는 얄팍하고 약삭빠른 상혼(商魂)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늘날의 상사치들 같이 물불가리지 않고 이익을 얻는 데 급급한 게 아니라, 모험가(merchant adventurer)·개척자(pioneer·frontier)로서의 정신과 실천이 그 모토이며, 경영은 물론 전 영역의 생활방식을 주도면밀한 계산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이는 ‘이성주의’의 일단이며, 르네상스 정신의 근원으로 모든 영주, 정치인, 문학자, 예술가들까지 지배하였다.


여기서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은 르네상스의 원동력이었던 대상인들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초기의 ‘혁명적 리더십’을 본받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불굴의 혁명의지를 갖은 지도자의 역할이 절실한 상황이며, 강력한 리더십이 발휘되어야 현재 진행의 ‘민주시민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 따라서 국민들은 모든 지도자·위정자들이 철학과 신념이 탁월하고, 투철한 역사의식, 시대정신과 사명감, 불굴의 실천의지를 갖춘 용감하고 지혜로운 혁명의 리더, 정치지도자로서의 막중한 사명과 역할 다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발상의 대전환, 인고의 정신과 진취적 기상 
르네상스 대상인의 ‘모험가·개척자’ 정신과 실천의지를 본받아야 한다

 

14C 말, 태동기로부터 르네상스가 외생적으로 시원(始原)의 기초가 된 것은 유럽, 더욱이 동방세계와의 교역(상거래)을 독점한 베네치아(베니스)를 필두로 한 이탈리아 상인이다. 베네치아의 함대는 지중해의 재해권을 장악하여 해상운송을 독점하였다. 1380년, 키오치아 해전에서 강력한 라이벌인 제노바의 해군을 완전히 격퇴함으로써 패권을 차지했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해외무역을 통하여 생기는 막대한 이익으로 부강해졌고, 이로써 문화적 발전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러한 통상무역에는 인고(忍苦)의 정신, 진취적 기상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었다. 부연하면,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이겨내는 인내력, 사회의 극히 폐쇄적인 관습,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진취성 등, 그런 특출한 능력과 기질을 가져야만 했다. 


더욱이 주류를 이루었던 해상무역은 한 사람이 일반적으로 선주·화주(貨主)·선장을 겸하였다. 그래서 모험심과 용감성, 대담성, 결단력은 기본이고 항해술에 더하여 측량법, 천문학, 기상학에 능통해야 하며 거센 선원들을 이끌어 복종시킬 수 있는 신뢰와 위엄을 갖춘 인간적인 매력과 아울러 군대의 지휘자·통솔자로서의 자질이 요구되는 것이다.


훗날의 대영제국에 비견되는 베네치아에서는 내 노라 하는 대상인의 아들이라 해도 ‘신의 가호와 자신의 역량으로 위험을 극복한 자’에 한하여 후계자가 될 수 있었고 시정(市政)에 관한 의사결정권을 부여하였다. 이처럼 민주적인 대상인(大商人) 정권이 안정적인 통치를 수행함으로써 수백 년에 걸친 르네상스시대에 내란을 겪지 않았던 것은 베네치아가 유일했을 정도다. 


그러나 16C에 터키의 침공을 받아 식민지를 잃고, 신항로가 개척되어 동방무역의 독점권이 약화되면서 베네치아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 시기에 주로 모직물 가공무역으로 번성한 피렌체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였다. 특히 15C 말기, 위대공(偉大公)으로 칭송받던 로렌초 메디치의 시대는 피렌체의 전성기였다. ‘메디치가’는 정치적 계산으로 교황청에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로써 로마는 시인 아리오스토, 조각가 미켈란젤로로 대표되는 문예인들을 길러냈다. 그래서 15C는 ‘피렌체의 르네상스’, 16C는 ‘로마의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데, 이를 적극 후원했던 로렌초는 승부에 목숨을 거는 상인이면서 언제나 진두에 서는 무인이었다.

 

베네치아와 피렌체의 모든 지도자들이 발휘하였던 그러한 시대적 기풍이 인간정신의 해이와 약화를 방지하여 르네상스를 위대한 문화로 발전, 부흥시켰던 것이다. 이렇듯 르네상스는 치열성과 엄정성으로부터 태동한 문화이며, 그러하지 않고서 감히 지도적 위치에 서는 것은 나라와 국민에 대한 배신이며 위선이다. 르네상스를 주도한 인문주의 사상은 바로 이 같은 ‘시대정신’이 원동력이 되었는바 이를 전범삼아 지금, ‘민주시민혁명’을 이끌어 가는 우리 지도자·위정자들은 치열하게 각성하고 반드시 상기하여 실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14C말에서 15C는 상인의 영웅시대가 저물어가고 상인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하였고, 16C 초기에 최고조에 이른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그 완성인 동시에 부흥의 마지막 불꽃이 휘황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로 그즈음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다 같이 유럽 세계에서 중세를 지나 근대(近代, modern times)를 향하여 나아가는 역사적 전환점으로서의 의의가 대단히 크다. 뿐만 아니라, 뚜렷한 공통점은 강고한, 그러나 극히 수구적(守舊的)인 중세에 강력하게 대항하는 ‘문화적·사상적·정치적’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인간사의 모든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역사의 대전환 과정이었던 것이다. 르네상스가 경제발전, 정치변동의 시너지효과로 일어났던 ‘문화혁명’, 즉 문예부흥이었다면 종교개혁은 “중세 사회에서는 현실 세계의 일체가 신(하느님)의 자유의사로서 지배되고 있었다”는 말처럼 종교중심의 사회에서 일어난 ‘정치혁명’이었다. 이 화두는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거리가 되고 있을 만큼 모든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가 분명하다.


그런 탓인지 그리스도교는 하느님보다 국가를 더 존중하고 나치스의 만행을 묵과하였으며 자본주의의 폐해를 방조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근대사회와 근대정신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게르만 사회와 독일정신의 창시자 중에 한 사람’이다”(뤼시앵 페브르, ‘한 인간의 운명’) 이런 루터가 16C 종교개혁 시대를 열었고, 서양역사의 전환점을 이룬 위대한 개혁자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지 500년이 지난 오늘, 그리고 한국의 ‘민주시민혁명’ 1주년을 맞은 이때에 비교적 상세하게 르네상스와, 이와는 필연적 관계인 종교개혁에 관하여 살펴본 까닭은 그 핵심인 ‘의식혁명’(aquarian conspiracy), ‘정치혁명’(political revolution), 그리고 ‘변화의 관리’(change management)의 중요성을 바르게 인지하여 제대로 실천하기를 바라므로 해서이다. 

 

대한글씨검정교육회

권혁시 이사장

한 해 전에 온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일으킨 11·12민주시민혁명은 ‘의식혁명’이다. 이를 통한 자각, ‘의식’으로써 오랫동안 군사독재정권의 압제에 억눌렸던 대한민국 국민이 스스로의 힘으로 무도무능하고 부정부패한 정권을 전복, 축출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정권, 정부를 용납지 않겠다는 민주시민의 결연하고 확고한 ‘의식’의 발로였던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제 1조) 그 명정한 헌법정신, 정언명령을 상기, 의식하여 실천해 나가야 한다. 


‘의식혁명’의 차원에서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에서 특별히 주목하여 교훈삼아야 할 점은 ‘교육개혁’이다. 루터는 전통교회 가톨릭의 모든 폐단이 교육문제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하고 혁신적 교육방식을 실시하여 종교개혁의 기초로 삼았다. 그 결과, 종교개혁은 교육의 보편화를 구현하였으며, ‘공교육’의 효시가 될 만큼 독일의 교육발전의 전환점이 되는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거듭 바라건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실현과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하면, ‘시민정치’(citizen politics)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의식혁명’을 선결하여야 한다. 이는 ‘교육혁명’이 기초이므로 요컨대, 독일의 모범적인 교육제도 전반을 벤치마킹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혁명을 통한 부정부패 척결(‘적폐청산’)로 정의와 원칙을 바로 세워야 ‘정치혁명’이 실현되고, 그래야만 비로소 현재진행형의 ‘민주시민혁명’은 성공을 거둘 수 있으며, 그 핵심은 참여정치, 곧 ‘시민정치’의 실현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투표를 비롯한 국민소환(국민파면), 국민발안(국민창안), 분지방분권화, 직능비례대표 확대(국민대표성 강화) 등, 직접민주제를 ‘국헌개정’을 통하여 대폭 보완함으로써 보다 완전한 ‘혼합민주정치’(mixture democratic politics)로 정치시스템에 대한 과감한 변혁을 단행해야 한다. 아울러 정치·경제를 비롯한 국가사회 전반에 대한 ‘변화의 관리’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종교개혁의 본원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오로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 같이 사랑하라” 그리하는 것만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의 실천인 것이다. 하여 그리스도교는 지금, 다시 개혁의 기치를 들어야 한다. 현대의 그리스도 교회가 ‘중세 말기의 교회보다 더 중세 교회 같은 교회’로 전락하여 악화 일로에 있다 게 세간의 중론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머뭇거리지 말고 지체 없이 ‘21C 종교개혁’을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이 독사의 족속들,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너희들에게 일러주었더냐? 너희가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세례자 요한 John the Baptist, 공동번역 ‘신약성서’ 마태오복음 3장 7·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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