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7일은 ‘러시아혁명’ 기념일이다. 그러나 그 혁명의 완결은 지난한 것이었다. 공산주의혁명, 볼셰비키혁명 또는 10월혁명으로도 명명한 이 혁명의 시발로부터 백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역사적 사실을 교훈삼아야 한다. 그리하여 1주년이 지난 현재 진행의 ‘11·12민주시민혁명’을 성공적인 결말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과 국민 특히, 한국정치의 시대적 사명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그로 인한 러시아혁명과 제정러시아의 붕괴, 그리고 소비에트 사회주의국가 연방(USSR,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이 출현하는 일련의 역사에서 재삼 확인할 수 있는 엄연한 사실은 시민혁명의 원인과 과정, 그 결과일 것이다. 특히 혁명의 원동력이 지도자나 소수의 리더그룹이 아니라 기층민중이 단결한 힘이고, 그것은 대개가 민생불안·경제파탄이 원인이며, 그에 대한 민중의 고조된 불만이 폭발하여 생겨나는 것이다(사회·경제적 요인).
그리고 사회적·경제적 불안정과 위기의 원인을 유발, 제공한 기득권·지배 세력이 무능하고 부패하여 지도력, 즉 정치적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여 민중의 질타와 타도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정치적 요인). 이렇게 민중봉기에 의한 혁명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혁명리더의 출중한 자질(인격·능력·비전)과 탁월한 리더십(인식·경청·선견지명)이 뒷받침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혁명의 개인적 요인).
민중의 봉기와 쟁투로 이룩한 혁명의 성공을 통하여 건설된 소비에트연방(소련)과, 그 위성국인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일거에 붕괴한 이유는 무엇인가? 반면에 북한, 중국, 베트남, 쿠바 등은 같은 공산국가인데도 현재까지 건재한 요인은 이디에 있는가? 더구나 핵·미사일 도발, 위협으로 대한민국의 안보불안을 증폭시키고, 한반도의 평화유지를 위협하는 북한 독재정권을 어떻게 분석, 판단할 것인가?
“알아야 면장을 하지”라는 시니컬한 언설은 “인사가 만사”라는 진리의 언명 못지않게 지도자·위정자들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필수덕목이다. 그러므로 ‘잘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인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정의’(定義)이며. 이를 기초로 하여 방편을 만들고 방책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부연컨대, 그래서 손자(孫子)는 거듭하여 말하였던 것이다. “전쟁은 나라의 대단히 큰일이다. 죽고 살 처지이며 존망의 길이 되니 잘 살펴서 알지 않으면 아니 된다” (兵者國之大事 병자국지대사 死生之地 사생지지 存亡之道 존망지도 不可不察也 불가불찰야. 孫武 손무, ‘손자병법’) ㅡ 따라서 되풀이하여 강조하건대, 특별히 일국의 집정자, 최고지도자는 두루 널리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의 역사적 교훈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황태자비가 암살당하였다. 일요일인 그날 오전 10시경, 황태자 내외가 기차역에 도착하였고 이들을 태운 자동차가 환영식장인 시청을 향하여 가던 중에 세르비아의 민족운동가 브리노비치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이 터져서 수행원 세 사람과 수십 명의 군중이 부상을 당했으나 요행히 황태자 부처는 무사하였다. 그러나 부상을 입은 수행원들을 문병하러 가던 길에 재차 테러를 당해 끝내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날은 1389년, 세르비아제국이 터키와 일전을 벌인 콧소바 전투에서 크게 져서 패망했던 국치일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 세르비아인들은 이 치욕을 상기하여 민족의식을 더욱더 강고하게 다져 나갔다. 그런 끝에 수백 년이 지나서는 터키에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연쇄적으로 러시아·터키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로 인해 세르비아인들의 미래는 열강의 국제적 역학관계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였다.
그런 와중에 두 차례의 발칸전쟁에서 세르비아는 막대한 전과를 거두어 국제관계의 영역을 확대하였다. 그렇게 민족정신이 투철한데다가 자존감과 자신감까지 되찾은 세르비아의 국민들은 부단하게 민족자위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정부가 억압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청년장교들이 비밀결사인 츠르나루케(흑수단 黑手團)을 조직하여 저항운동, 투쟁에 돌입하였다.
그러던 차에 사라예보의 황태자 암살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오스트리아는 이를 문제 삼아 세르비아 정부에 저항단체들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과 활동금지를 실행할 것을 최후통첩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이 요구에 대하여 부분적인 동의와 미온적인 대응에 그쳤고, 그래서 이들 두 나라는 국교를 단절하는 최악의 사태로 치닫게 된다.
이로 인하여 유럽 각국은 세르비아 편에 선 러시아를 필두로 하는 연합국과,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는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으로 갈라서고, 급기야 러시아는 동원령을 발동하였다. 이를 즉각 중지할 것을 촉구하였던 독일은 러시아가 불응하자 1914년 8월 1일,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전체가 전화에 휩싸였던 1916년,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블라디미르 레닌은 ‘제국주의론’의 저술을 마무리하였다. 그 내용의 핵심은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국방(국가방위)을 명분으로 일삼는 전쟁의 근본원인은 ‘자본주의’이며, 이로부터 비롯된 제국주의야말로 ‘사회주의혁명’ 전야의 임박이라는 점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미증유의 대전란으로 인하여 러시아는 1916년에서 1917년에 이르는 겨울에 경제난에 식량난까지 덮쳐 민생고가 극한에 달하여 전 국가적 위기가 초고조로 치달았다. 게다가 (농경지를 잃은) 이직 노동자들이 급증하였다. 1917년 초, 실업상태의 이들 노동자 20만이 들고 일어났고, 그달 12일에는 수도에 주둔하던 군대의 대다수가 반란에 가세하였다.
그리고 3월 14일, 저녁 무렵에는 수도 전역을 봉기한 노동자와 반란군이 장악하였으며, 내각은 총사퇴하고 정부요인들은 일제히 체포되었다. ‘3월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곧바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이 혁명은 러시아력(曆)에 의해 ‘2월혁명’으로, 이어서 11월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은 ‘10월혁명’으로도 불린다).
이토록 정국이 걷잡을 수 없는 혼미한 상황으로 빠져들자 러시아 황실은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야)하여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아우인 미하일 대공으로 하여금 섭정하게 한다’는 제안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혁명세력은 동생에게 직접 양위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당사자인 미하일 대공이 이를 거부한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로마노프 왕조’의 종말을 고한 것이며, 천년 역사의 러시아제국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역사의 뒤안길 사라지는 비극적이고도 격동적 사태였던 것이다.
얼마 후 4월 중순경, 레닌은 스위스에서 출발하여 우여곡절, 천신만고 끝에 러시아의 페트로그라드로 귀환하였고, 주로 ‘4월의 테제’로 일컫는 ‘현재의 혁명에서의 노동자(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에 관하여’를 발표하였다. 그가 여기서 제창한 종국적 목표는 ‘의회주의’의 공화국을 탈피하여 전 노동자·농민 대표의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설이었다. 이어 레닌은 소비에트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결성하여 볼셰비키혁명의 확산을 모색하였다.
1917년 7월 1일, 볼셰비키에 동조, 지지하는 40만의 노동자와 사병(대다수 노동자출신)들이 일으킨 데몬스트레이션. “전쟁반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이렇게 슬로건을 내세운 볼셰비키는 민중봉기를 추동하였다. 그런데, ‘소비에트’(평의회)는 사병과 노동자들로 조직되었고 전 러시아 민중의 대표임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볼셰비키’(소수파)는 러시아의 전쟁(참전)을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며, 이에 대한 탄압을 받아 약세를 면치 못한 탓에 소비에트에서 주도권 장악이 사실상 불가능한 처지였다.
40만 시위가 있은 보름 후인 7월 16·17일에는 50만이 넘는 대군중이 민중봉기에 나섰고 임시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전력투구하는 동시에 볼셰비키에 대한 탄압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더구나 군부세력은 수구적인 입헌민주당, 자본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반혁명을 기도하는 동시에 연합국 지지에 나섰다. 또한 중도적 입장을 견지했던 케렌스키와 코르닐로프 등, 정치인들이 반발하자 파면시키려 들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군사행동에 돌입한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가 지휘하는 군대의 용전분투로 반란군의 이탈, 노동자출신 병사들이 대거 합류하여 극히 수세적이었던 볼셰비키의 당세는 급상승하였다. 그런 가운데 9월에 즈음하여 러시아는 끝내 ‘경제파탄’에 이르고 말았다. 자본가들의 의도된 폐업(공장폐쇄), 극도의 식량난 속에서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 세력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멘셰비키(다수파)와 사회혁명당 등, 중도적인 사회주의 세력 역시 이에 합세하였다.
11월 6일, 임시정부는 군대를 다시 수도에 결집시켜 보다 강력하게 봉기 저지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중심으로 병사, 노동자의 봉기를 주도하여 주요기관들을 전격 접수하고 산하기관, 은행, 통신시설, 교통망 등을 점거하였다. 그 다음날 11월 7일, 오전 9시에 소비에트 혁명군이 네바다 강가에 정박한 순양함 ‘오로라호’를 공격하여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어서 군사혁명위원회가 지휘하는 혁명군은 임시정부를 타도, 전복시키고 소비에트정권을 수립하였다. 신생의 소비에트 혁명정부는 강화회의 개최, 토지소유제 폐지 등, 혁명강령, 공약을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러시아혁명’의 대장정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10월혁명’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11월 15일, 반혁명 세력의 반격으로 모스크바 격전이 벌어졌고, 그달 23일에는 전 러시아 농민소비에트대회를 열어 혁명정부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였으나 11월 25일, 헌법제정회의 선거에서 볼셰비키가 패배하고 사회혁명당이 승리하면서 난관에 봉착하기도 하였다.
반면교사가 된 사회주의 국가 붕괴와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러시아혁명은 사회주의 국가체제, 즉 소비에트연방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결정적 구분은 1918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전러시아공산당’으로 개칭한 데서 비롯하였다 할 수 있다. 사회주의는 역사적 과정에 비추어볼 때. 이상향(utopia)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었으며, 유대·그리스도교(박애·자유·평등 실천, 신천지 실현), 계몽사상(인간·사회·세계관 근대성 정립), 프랑스대혁명(시민의식 형성, 소유권 획득, 혁명적 실천경험), 산업혁명(산업노동자 시민사회 형성, 생산력 획기적 발전 증대)을 통하여 점증적 발전을 이루었다.
기실은 프랑스대혁명과 산업혁명의 중복적 격동현상이 사회주의를 발화시켰다. 프랑스혁명에는 이미 바뵈프에 의한 자코뱅의 반동이 ‘사회주의 논리’의 날을 벼리고 있었으며, 산업혁명의 폭발적인 생산력과, 이로써 급팽창한 노동세력이 넓게 터 잡은 ‘시민사회’(civil society)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이른바 사회공동체주의(teamwork)를 지향한다. 따라서 사회주의 운동의 구심 세력은 노동자·농민이고, 생산의 중추 기제(機制, mechanism)는 ‘계획경제’(command economy)인 것이다.
또한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공산주의 기초이론의 3대 요소는 변증법적 유물론·유물사관(철학적 기초), 노동가치설·잉여가치설(경제적 기초), 프롤레타리아 혁명론·무상계급 독재론(정치적 기초)이다. 이에 대한 백가쟁명 식의 광범위하고 다양한 반론이 끊임없이 제기되거니와,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관념론에 의한 인간세의 역사 발전을 규명하고자 했는데, 이것이 바로 변증법(정 正·반 反·합 合)인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같은 헤겔의 철학 사상을 ‘유물론’에 융합하여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을 정당화시켰다. 모든 사물(事物)은 부정(否定)의 연속, 모순의 극복과, 이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만 변화·발전하므로 인류역사는 투쟁의 역사라는 점을 강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하여 ‘투쟁적’ 공산주의를 이론화(정립)하기 위한 자의적 결론의 정당화를 목적으로 그 수단을 합리화시킨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로부터 파생한 기초이론과, 이에 대한 반론의 요지는, ①유물사관; 생산력의 원동력은 분명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도 공산주의는 생산력 자체를 원동력으로 보고 인간의 능력을 역사 발전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②노동가치설·잉여가치설; 카를 마르크스는 단지 노동량, 즉 노동시간에 비례하여 상품가치가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자본가는 과잉노동에 의한 잉여를 착취하여 이윤추구를 달성한다.
그러한 주장과는 달리 현실적으로 상품은 노동·자연·생산수단에 의하여 생산되며, 노동력뿐만 아니라 생산수단과 합리적 경영, 창의성 등을 통하여 이윤추구를 실행한다. ③프롤레타리아혁명론; 마르크스는 유물사관에 의해 공산주의 사회가 실현되는 것을 필연적 사실로 규정하였다. 그러면서 폭력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러시아혁명은 사회주의 국가체제, 즉 소비에트연방을 탄생시켰으나, 소비에트에 의한 사회주의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소련을 위시하여 동유럽 국가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주의 정부들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불과 3년의 짧은 기간 동안 현실 사회주의는 급속하게 붕괴, 종말을 고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국가의 연쇄적 붕괴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름대로 판단컨대)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여러 가지의 비판은 차치하고, 결정적으로 정치시스템(체제), 권력구조의 문제에서 기인하였다는 생각이다. 주지하다시피 흔히 말하는 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는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확립한 사상체계, 곧 ‘마르크스주의’(marxism)이며,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movement)이다.
그 주된 내용은 사유제를 부정하고 재산공유를 통하여 자본주의를 멸절시키기 위해 계급투쟁, 곧 무산자(프롤레타리아, 노동자) 폭력혁명과 무산자의 지배를 주장하는 사상인 것이다(공산주의의 어원은 communis이며, 이는 ‘재산공유’를 뜻할뿐더러 사회체제, 즉 전반적인 ‘제도’를 이른다. 전자의 의미는 고대 그리스시대, 후자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유래하였다).
아울러 유럽 공산국가의 성립이 공산주의 이론대로 노동자·농민의 단결과 그 힘에 의한 봉기(프롤레타리아혁명)가 바탕이 된 사실을 앞에서 개관하였다. 그러나 전 노동자의 이름뿐인(미명) 일당 독제체제로 전락한 것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실패의 주된 원인이 아닐 수 없다. 소련을 비롯한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의 권력은 공산당에 집중되어 있고, 공산당 조직의 중추인 정치국은 최고지도자에게 절대 복종한다. 레닌이 구상하여 실행한 이른바 ‘민주집중제“(democratic centralism)의 정치시스템, 권력구조인 것이다.
게다가 세계적화(赤化, 세계의 공산국화)를 목적으로 무력침공을 서슴지 않았고, 민족해방의 미명하에 동독, 체코,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등등, 독립적이며 독자적이지 못한 수많은 위성국가를 수립, 확대하여 붕괴의 도미노현상을 키운 것도 적잖은 원인이 됐음 직한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소비에트연방이 거의 한 세기 동안 추진하였던 사회주의에 대한 실험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소련이 다시 ‘러시아’로 돌아 간지도 이십년이 넘었다. 이제, 마르크스주의와, ‘무엇을 할 것인가’(레닌), ‘영구혁명론’(레블레온 트로츠키)은 사문화되다시피 했고, 마르크스·엥겔스의 저서들은 러시아인들 조차 거의 읽지 않는 고서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마르크스·엥겔스, ‘공산당선언’) 선언문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세계만방을 향하여 포효했던 그 슬로건은 지금에도 모든 노동자들이 마음 깊이 새기고, 실천해야만 할 지상명령이 아니던가.
그와 마찬가지로 비록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실패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그렇듯이 사회(공산)주의 역시 특장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한 게 분명하다. 앞서 거론한 공산주의 기초이론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간·민주·평등’,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적인 노동, 민주주의의 정치, 평등한 경제, 그 보편사상을 주장하고 추구하는 기본정신이 ‘마르크스·사회주의’의 더없이 중요한 가치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한 국가·사회의 문제와 폐단에 대하여 수정, 개선을 유인하는 비판적 역할은 물론, 보완적 기능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공산주의 국가 북한의 정체, ‘김일성주의’와 현재의 정치적 변화
핵·미사일 도발로 세계를 긴장시켰던 북한은 현재, 의외로 정중동(靜中動, 겉으로 고요한 가운데 부단한 모색)을 견지하여 일관하고 있는데, 손자병법의 ‘픙림화산’(風林火山)의 전략전술을 철저하게 구사하는 듯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안에 앞서 북한의 정체와 상황을 “잘 살펴서 알지 않으면 안 된다”(不可不察也 불가불찰야. ‘손자병법’) .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소련(소비에트연방)의 해체를 시발로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이 눈사태 나듯 연이어 무너졌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공산국가 중국과 베트남은 이미 자본주의를 채용한 터라 사실상 (정통의) ‘사회주의’는 지구상에서 종언을 고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현실에서의 사회주의가 종말을 맞은 1990년대, 북한은 그런 와중에서도 최악의 경제위기마저 극복하면서 건재를 과시하였다.
북한이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상황에서도 자본주의를 도입하지 않은 세계유일의 사회주의 국가로 존속할 수 있는 까닭은 중국, 베트남이나 쿠바와는 달리 특이한 사회주의 체제인 때문이다. 그것은 공산주의이면서도 마르크스주의와는 또 다른 ‘김일성주의’가 국가·사회, 특히 정치체제의 기반을 이루는 ‘주체사상’이다(대다수 북한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며 ‘사상적 주체, 정치적 자주, 경제적 자립, 군사적 자위’의 4대원칙이 핵심이다).
이는 북한 사회주의 특성인바 모든 사상과 이념의 일반적인 정태성(靜態性)을 탈피한 동태적 사상체계로써 강력한 동기부여(motivation)를 촉진하는 동태성(動態性)은 철저한 ‘인사관리’, 즉 인적자원(manpower, human resources)의 효율적 활용의 극대화를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를 통하여 확고부동한 ‘주의’(主義, ism), 곧 일관된 인식(사상·이념)과 태도(행동양식)를 견지하는 각 개인을 포함한 공동운명체로서 ‘집단의식’이 상승효과를 더했다 한다(이는 일당백의 정신력에서 미약한 ‘파시즘’, 결속주의와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1950년대, 철학적, 사회·역사적, 지도적 원칙에 입각하여 성립했던 북한 최고의 통치이념인 주체사상은 1960대 말엽, 김일성 중심의 유일체제 확립을 위하여 ‘김일성주의’로 확대함으로써 일반 정치이론 수준으로 변질, 퇴색하였다. 이렇게 본래의 주체사상이 발전가치와 기본의미, 합리성과 실용성을 잃게 되자 부득불 정통 사회주의를 대체한 ‘보편적 사상이론’으로 합리화시키고 있다.
아무튼 북한은 수많은 공산국가들의 붕괴와 파탄지경에 빠졌던 경제의 위기를 이겨내고, 앞서 말한 사상적 이론에 의거 국가·사회의 체제를 정비하여 보다 확고히 함으로써 국가 재건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단행한 인사개편을 포함하여 상당기간 동안 효율적인 인적자원 관리를 지속적으로 실행하여 악화된 정세변화에 적극 대응(response), 적소적재의 지위와 책무, 역할 부여에 만전을 기해온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유효한 주체사상의 동태성이 추동하는 ‘동기부여 이론’에 따른 인사관리의 원활한 작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필경 그래서일 터이다. 군비(軍費) 지출의 규모가 남한의 30분의 1도 안 되는 약소국 북한이 세계 최대강국 미국을 노골적으로 위협하며 대결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한반도에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일반상식, 보편국가에 대한 개념으로 북한을 인식하는 것은 오류일 수 있으며, 통상적인 방식의 대처는 패착일 가능성이 대단히 클 것이라는 생각이다.
북한 사회주의의 특유한 주체사상을 배경으로 작금의 사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이유는 아집과 편견, 고정관념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전쟁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잘 살펴서 알지 않으면 안 된다”(不可不察也 불가불찰야)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지피지기 百戰不殆 백전불태. 손무, ‘손자병법’) 이렇게 반드시 유념하여 상기해야 할 전술전략, 병법의 기본을 간과하지 않기를 바라서이다.
결론을 서두에서 먼저 썼으나, 우리나라의 국민과, 지도자·위정자들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역사적 사명인 ‘민주시민혁명’의 성공, ‘북한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부언하고자 하는 바는 첫째, 지금까지 살펴본 러시아혁명이 전해 주는 메시지는 혁명은 일반민중이 주도한다는 사실이다(러시아혁명 당시 볼셰비키 당원은 소수였고, 혁명지도자 레닌, 스탈린, 카메네프 등은 망명, 투옥, 유배 중인데도 전쟁반대를 외치는 민중의 자발적 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그러나 그 완결은 혁명의 리더, 최고지도자의 자질과 역량은 물론이고 적확한 목적의식과 투철한 신념, (레닌·트로츠키와 같이) 혁명에 관한 이론 정립의 뒷받침이라는 점을 잘 알아야 한다(그런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떠나서 북한은 나름대로 확고한 ‘김일성주의’를 정립하고 있다는 점을 직시, 유의해야 할 것이다).
둘째, 전쟁에 급급했던 러시아제국의 멸망, 특히 소비에트연방의 붕괴가 주는 교훈은, 아무리 원대 한 사상과 훌륭한 이데올로기(ideologie, 이념)를 갖추고, 이를 실현하고자 한들 ‘노멘클라투라’(소련공산당 귀족)가 상징하는 바 같이 국민을 기만, 국가권력을 독점, 전횡하여 독단과 가렴주구를 일삼는 독재정권은 필연코 멸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 천리(天理)다(어제 오늘 목도하는 중국의 시진핑과 북한 김정은의 국가권력 독점, 즉 일인 독재체제의 강화는 불행한 미래의 징후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지도자·위정자들은 이 불변의 진리를 깊이 인식, 상기하여 ‘국민주권’을 존중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데 힘써 그 소명을 다해야만 한다.
셋째,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불을 붙인 세르비아인들의 투철한 민족자결정신과 행동양식을 우리도 준행해야 마땅한데, 이미 우리나라의 평화주의자 안중근의사는 살신성인의 거사로써 이를 선행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국민, 더욱이 정치지도자들은 ‘안중근정신’과 그 행동철학을 본받아 실천해야 할 것이다.
넷째, 북한문제, 남북관계는 한반도의 미래가 달려 있고 한겨레의 명운이 걸린 국가 중대사이며, 남북통일은 누구도 부인치 못할 한민족의 변함없는 염원이다. 하여, 인내심을 갖고 장기적이며 미래지향적인 화해교류를 통하여 변화·발전을 추진해 나가는 노력이 절대로 필요하다. 특히, 한국 정부와 국민은 적극적으로 북한과 미국의 평화협상을 중재하여 북핵문제를 해결함은 물론, 나아가서 남북한의 평화와 공존·발전을 위한 주도적 역할을 마다하지 않기 바란다.
각설하고, 인류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런 가운데서 새로운 사태와, 이를 추동하며 대응하는 변화·혁신의 용틀임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과 국민은 역사에 기록될 ‘혁명의 시대’(age of revolution)를 추동, 주도한다. 어설프고 부담스럽기도 해서 선뜻 내키지 않을 테지만 우리의 삶, 우리가 쓰고 있는 역사가 ‘혁명’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지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럴진대 현 시대와 역사의 주역으로서 (러시아 민중이 그러했듯이) ‘민주시민혁명’을 기필코 완결하는 데 발벗고 나서야 하며, 다시 일어서서 ‘시민정치', 곧 국민주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한 국헌개정에 마음과 힘을 한데 모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