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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의 ‘남한단독 정부수립 반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김구 선생의 정신과 행동철학의 실천, 그리하여 ‘자주독립·통일국가’를 이룬다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8/03/06 [22:21]

백범 김구의 ‘남한단독 정부수립 반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김구 선생의 정신과 행동철학의 실천, 그리하여 ‘자주독립·통일국가’를 이룬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18/03/06 [22:21]

우리민족이 일제에 항거하여 ‘조선인이 자주민이며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세계 만망에 선포(‘독립선언’)한지 99년이 지난 엊그제 3월 1일. 수구의 무리가 대형 성조기를 높이 세우고 그 아래서 태극기를 휘저으며 소리치는 어이없는 광경(인터넷 영상)을 보다가 사십여 년 전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의 삼일절 아침, 어머니가 태극기를 달며 들려주셨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당시에는 ‘자주자강’(自主自强), 그 말뜻을 몰랐고 깊이 생각지도 않았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마라. 일본이 일어나니 조선은 조심하라”

 

제 99주년 3,1절, 광화문 광장에서 극우성향의 대형교회가 대거 동원령을 내린, 구국기도회에 참석한 교인들과 박근혜 추종자들이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열강, 외세에 의한 ‘영토상실·국토분단’의 비극적 역사, 
‘자주자강’(自主自强)을 통한 국가발전·민족번영 실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미국 중심의 자유진영(서방)과 소련 주축의 공산진영(동방)으로 분립되어 냉전(cold war)체제로 첨예하게 대립한다. 소련의 전격적인 베를린 봉쇄는 미국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결성을 촉발시켰고, 이에 대응한 소련의 바르샤바조약기구 창설로 인하여 동서진영의 대결, 냉전국면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한반도와 인도차이나반도(동부)의 남북분단, 중국의 공산화, 그리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단적으로 말해서 제국주의 미국과 소련이 획책한 패권주의의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역사는 과거로부터 현재를 지나 미래를 향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렇게 역사는 끊임없이 전진, 변화하지만 반드시 발전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고구려 북쪽의 광활한 고토(만주)를 중국에 빼앗겨 영토의 7할을 잃는 뼈아픈 역사였다. 이로써 동아시아의 판도에 대변동을 가져왔고, 중국이 동아(東亞)천지의 패권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그나마 삼국통일(676년) 이래 장구한 세월동안 ‘통일국가’의 면모를 지켜 온 것은 한겨레의 무한한 저력이고 큰 자부심이었다(후삼국은 분단시대가 아닌 쇠망한 신라에서 신흥국가 고려로 변환하는 30년여 단기간의 과도기였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 일제에게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고, 그 일본의 농간으로 부지불식간에 북간도마저 중국에 내주었다(간도영유권이 1909년 9월 4일, ‘청일간도협약’ 체결로 중국에 귀속된 사실은 명백하며 모든 정황상 원천무효다). 그도 모자라 1천2백년 ‘통일국가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으니 어찌 통탄치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한민족이 당한 통한의 비극, 남북분단은 세력팽창 일변도인 강대국 미국과 소련 등 열강, 외세의 이해관계(패권주의)에 따른 개입과, 이에 편승하여 기득권 장악, 세력 형성을 기도한 남북의 반민족적·반역사적 정치세력의 저열한 기회주의가 배태한 불행한 사태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온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일제 36년의 압박과 그 서러움에서 벗어난 환희의 환호성을 지르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대한 독립 만세! 만세!” 그러나 그해 11월 23일, 한겨레의 위대한 민족지도자 김구(金九, 자 연상 連上, 호 연하 蓮下·백범 白凡)는 조국의 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투쟁 결심하고 중국으로 떠났던 27년 만에 임정요인들과 함께 환국하면서 감격과 환희, 회한과 비분이 엇갈리는 착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우여곡절 속에서도 끊임없이 독립투쟁을 벌인 끝에 미국과 연합하여 일본,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데 이어 본격적으로 군사행동에 돌입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잃어 참전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적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그 비감하고 통분한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김구는 그런 참담한 마음에서, 범민족적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을 통하여 연합군으로부터 ‘대한독립’을 확약(1943년 11월 카이로회담, 1945년 7월 포츠담회담) 받는 최소한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귀국 후 이튿날,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국민들에게 ‘통일독립정부’ 수립을 소리쳐 호소하였다. “동포 여러분, 우리의 독립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정부를 세워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이룰 때까지, 전국의 동포들이 하나가 되어 나아갑시다.”


한겨레의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 
일생을 오직 한길 ‘민족의 자주독립·통일’에 바친 위대한 선구자

 

김구는 1876년 8월 29일, 효종 조의 권세가 김자점(金自點, 삼정승 역임)이 역모 죄로 사형을 당하자 화를 피해 선대로부터 은거하였던 황해도 해주의 터골(基洞 기동)에서 김순영(金淳永)의 아들(7대 독자)로 태어났으며, 모친은 곽낙원(郭樂園)이다. 한때 서당을 열었을 만큼 학문에 열정적인 부친에게서 가학을 하였고, 열다섯 살이 되어서는 서당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일찍이 부패하고 타락한 관리와 양반들의 수탈과 천대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과거급제하여 입신출세하는 것뿐이라는 일념으로 불철주야 과거시험 준비에 매진하였다. 


그리하여 열일곱 살 때인 1892년, 조선 최후의 과거시험에 응시했는데 부정부패가 극에 달한 조선 말기에 과거시험인들 공정할 리가 만무하였다. 그는 과거급제에 실패한 후에야 비로소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비록 낙방은 했을지언정 과거시험에 응시할 정도로 위성지학(爲聖之學, 유학)을 깊이 공부하여 투철한 ‘선비정신’을 길렀을 열혈청년 김구는 혼탁한 세태를 개탄하며 1893년 1월, 동학에 입문하였고 이듬해 가을에 최시형(崔時亨, 호 해월 海月, 동학 2대교주)을 상면한 후 보은 접주가 되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여 동학군을 지휘하였으나, 혁명의 실패로 1895년 2월,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安泰勳, 안중근의사 부친)의 산채에 은신한다. 김구는 그곳에서 고명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 호 후조 後凋)을 만나 그에게서, 진작부터 선인의 길(聖人之道 성인지도)을 가고자 결심했을진대, 초심을 잃지 않으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아울러 청나라(중국)로 가서 뜻을 같이 할 동지들을 만나 활동하라는 조언을 듣고 자신의 사명을 깊이 깨닫는다. 


얼마 후 ‘민족자강·자주독립’의 원대한 희망을 품고 중국을 향하여 먼 길을 떠났고, 만주에서 활약하는 의병부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하여 피신을 위해 전혀 뜻하지 않게 귀국하게 되었는데 1896년, 조선인으로 가장하고 칼을 옷 속에 숨긴 괴한(일본인 육군중위 스치다 조스케)을 우연히 만난다. 김구는 민비시해(‘을미사변’)의 공법으로 의심하여 그를 처치한 후에 글을 써서 길거리의 벽에 붙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해주에 사는 김구가 명성황후(민비)의 원수를 갚고자 이 왜놈을 죽이노라” 


귀가한 그는 부친에게 나라의 수치를 씻으려 하였으니, 의연하고 당당하게 처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후 몇 달이 지난 11월,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해주감옥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끝내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런데 고종의 특명과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민심 덕분에 사형은 면하였지만 조국독립의 뜻과, 그 사명을 실천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탈옥을 결행하여 성공한다. 이후에 김구는 신분을 감춘 채 ‘인재양성’을 위하여 여러 해 동안 국민교육 및 계몽운동에 진력하기도 하였다(1900~1908년).

 
그런 가운데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서 군권회복 운동에 투신하였다. 하지만 통탄스럽게도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가 경술국치를 당한 탓에 이듬해 1월에는 독립운동가(안악사건·105인사건 연루자) 160여 명이 집단 투옥되었고, 김구는 모진 고문의 극심한 고통을 참아 견디며 사명의식과 실천의지를 더욱 굳게 다졌다. 그렇게 5년간의 옥살이에서 풀려난 그는 1918년, 다시금 불원천리를 마다지 않고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의 신한청년단(당수 여운형 呂運亨)에 가입하였다. 


김구는 1919년 3월 1일, 독립혁명의 격랑 속에서 ‘독립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이 거대한 독립의지를 결집하여 항일투쟁을 벌일 수 있는 구심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1919년 4월 13일, 이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鎬), 이시영(李始榮), 김규식(金奎植) 등, 독립지사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임정 국무위원인 그는 항일투쟁의 청지기가 되겠다는 각오로 경무국장을 자청하여 맹활약했으며 1926년, 임시정부가 와해의 난관에 봉착하자 ‘위기상황 극복’의 인물로 지목받아 최고책임자인 국무령으로 선출되었다.

 
임정수반이 된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데 이어 항일투쟁을 독립전쟁으로 확대하고자 ‘광복군 창설’을 주도하고 조직 활동을 강화, 한국특무대독립군을 발족하였다. 김구는 1940년 3월, 임정 주석으로 선임되었고 이듬해 12월에는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동시에 한국광복군은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독립전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키 위하여 1942년 7월, 중국정부와 광복군 지원협정을 체결한 후 미국육군과 제휴, 군사동맹 체제를 갖춤으로써 연합군과 공동작전 수행에 만전을 기하였다.


한겨레의 원대한 희망과 역사적 사명, ‘자주독립·통일국가’의 실현
백범 김구의 정신과 행동철학의 실천

 

38선을 넘기전 기념촬영을 하는 김구선생 일행,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회담에 참석하고 5월 5일 서울에 돌아왔다. 그러나 5월 10일 남한 단정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고, 9월 9일 북한이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등 통일이 점차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들어갔지만 통일조국 실현을 위한 그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우리나라는 자치독립을 위한 정부수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제말기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민족주의, 사회주의 계열의 일치된 호응과 지지를 받으며 민족국가 건설의 목표를 향하여 일로 매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3상회의(미국·소련·영국 외상회담)는 남북한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결정하였다. 김구가 귀국하여 국민에게 호소했던 연설내용이 직감에 의한 것이었다면, 불행하게도 그 예감이 적중한 것이었다. 


신탁통치를 제안한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한민국의 둘도 없는 우방이고 혈맹의 동맹국인 미국이지만, ‘가스라·태프트 밀약’(1905년)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한 적이 있으니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마라”는 경계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약소국을 일방적으로 통치하려드는 이런 부당한 결정에 대항하여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에 김구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앞장섰고 이승만, 한국민주당 등이 적극 동조했으나, 뒤늦게 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세력이 신탁통치를 지지하면서 결국에는 반탁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통일독립국가’ 수립운동이 전개되었고, 유엔(국제연합)은 신탁통치를 위한 임시정부 수립이 무산(1·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되자 1947년 11월, 유엔감시 하에 ‘남북한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결의한다. 김구는 이를 적극 지지하여 11월 24일, “완전 자주독립 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 (김구, 논설 ‘나의 소원’) 그렇게 ‘통일정부’ 수립을 역설하며, 국토양단의 비극을 강력히 경고했으나 소련과 북한이 거부한다. 이것을 기화로 유엔소위원회가 주장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제안을 이승만과 한민당 등이 동의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급전직하로 빠져들자 김구는 1948년 1월 28일, 한국의 총선거를 위하여 내한했던 국제연합(UN) 한국위원단에 ‘통일된 완전자주 정부수립’이라는 제하의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에 관한 6개항의 결의문을 제출하였다. 이어서 1948년 2월 10일, 김구는 ‘남한단독정부 수립반대’의 주장을 결연하고 비장한 목소리로 울부짖듯 사자후, 열변을 토하였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구차하게 내 한 몸의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 하겠다” (김구, 성명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ㅡ 읍고 泣告, 눈물로써 고하다.)


그리고 한민당을 중심으로 추진되는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고, “우리가 살길은 자주독립 한길뿐이다!” 이렇게 힘주어 역설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4월 19일, 방북을 결행하였다. 그리하여 북한의 지도자들을 설득하며 4자회담(김구·김규식, 김일성 金日成·김두봉 金枓奉)을 가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5월 5일, 귀경하여 남쪽의 지도자들을 회유하려 했지만 닷새 후 남한 단독선거가 실시된다. 하여, 통탄스럽게도 일흔다섯의 김구가 노구를 이끌고 민족분열과 국토분단의 비극을 막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던 각고의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후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9월 9일, 북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실시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김일성을 수상으로 추대, 선임하였다. 그런 뒤 우리민족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했고,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민족분열과 국토분단의 사태는 고착화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백범 김구가 그토록 갈망했던 민족통일을 통하여 발전, 번영을 구가하는 통일국가를 이루는 일이 요원하게 여겨지기만 했다. 하자만 김구 선생이 그러했듯이 오로지 ‘평화통일’을 위하여 열절하게 꿈을 품고 이를 성취하고자 골몰하며 분골쇄신, 백방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고, 우리 민족 대다수의 변함없는 염원이므로 결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백범 김구의 사상과 행적을 비교적 상세히 살펴본 까닭은, 특히 지도자·위정자들이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자주독립’의 쟁취, ‘통일국가’의 건설을 열망하여 이를 실현하고자 고군분투하며 헌신했던, 그 정신을 닮고 행동철학을 본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연컨대, 백범의 투철한 정신과 실천의지를 우리가 구현하는 길은 첫째가, ‘자주적 평화통일’인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또 다른 이유는 몰지각한 어느 소인배들이 ‘민족자주·통일조국’에 대한 순수하고도 투철한 신념과 절절한 염원을 ‘반공이데올로기’로 덧씌워서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위대한 민족지도자를 용공·친소·친(종)북 분자로 호도, 폄훼하므로 진상을 제대로 밝혀 이를 바로 인식하기를 바라서이다. 아울러 통일국가를 위한 단독정부 수립반대와 방북회담을 시비하여 모함하는 수구세력은, 그 저의가 민족분열과 국토분단에 대한 책임회피이며 자기 합리화라는 의심을 받기 십상이니 은인자중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공산주의·종(친)북, 진보주의·좌파를 탓하며, (실제로는 명확한 개념도 없이) ‘이념경도’의 증상이 심한 일부 기득권세력은 우리 한반도와 한겨레의 미래가 달린 남북통일은 안중에도 없다. 국리민복과 멸사봉공은 남의 일인 듯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주의,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오로지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을 앞세운 행태를 서슴지 않는다. 


“천안함 폭침 주범 김영철 방한을 철회하라!” 자유한국당(대표 홍준표)의 이런 발설은 만일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해도 평화올림픽과, 이를 통하여 진전되고 있는 남북화해를 위해서는 자제했어야 옳다. 게다가 북한의 ‘천안함 폭침’에 대한 의구심도 간과할 수 없으니 더욱 그렇다. ‘MB(이명박) 정부의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한때 70%에 달했을 정도로 천안함 사건 진상은 처음부터 논란거리였다’ (2월 27일자 중앙일보 배명복칼럼 ‘김영철이 재점화한 천안함 논란’ ㅡ 김영철이 아니라 자유한국당이 그랬지 않았는가?) 


‘과학자로서, 이렇듯 과학적 근거와 반대되는 주장을 큰 목소리로 외치는 풍경은 우려스럽다’ ‘그 합조단(정부임명 민군합동조사단)의 주장은 과학적 근거와 반대되는 것이었다. 어뢰 폭발이 있었다면, 당연히 발생했어야 할 현상들은 전무했다’ ‘자유한국당이 천안함 침몰의 책임자를 묻기 시작했으니 이참에 천안함 침몰의 전모를 과학적으로 밝혀보자’ (2월 27일자 한겨레신문; 이승헌 버지니아대학 교수, ‘천안함 참사의 진짜 책임자는 누구?’)

 

민족적 자각, 발상의 전환과 이념경도의 타파로 ‘평화통일’ 여건조성 
‘상호호혜’의 협상을 통한 남북·북미관계 개선

 

우리가 흔히 역사의식, 역사적 사명을 말하고, (김구의 ‘사상과 행적’을 개관했듯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를 바로 알고 망각치 말아야 하며, 과거의 굴절된 역사를 반면교사삼아 민족적 사명을 명확히 인식하여 실천하기 위해서다. 물론 모두가 생각이 같을 수는 없고, 서로 다른 ‘사상의 차이’는 상호 존중하여야 마땅하다. 하지만 민족과 국가의 일치된 목표, 정의와 공동선은 사상과 이념을 넘어 의기투합하여 실천해야만 한다. 그런 관점에서 ‘민족화합, 남북통일’은 우리 한겨레의 역사적 사명인 것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소인배들은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를 모르거나 알고도 고정관념과 이기심 때문에 고쳐서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단히 어렵겠지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 발상의 대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위선과 형식주의, 독선과 권위주의, 교만과 이기주의, 그리고 탐욕과 집착을 깨부수는 ‘의식혁명’(copernican revolution)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교훈은 명확하다. 통렬한 반성, 대오각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북한의 국정 최고책임자를 비롯한 위정자들은 물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북한 핵·미사일 문제의 협상 당사국, 이른바 6자회담의 주역들은 소련 최후의 공산당 서기장, 러시아 최초의 대통령이었던 위대한 세계적 정치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원대한 사상(정신)과 혁신적인 행적(행동철학)을 본받아야 할 줄 안다. 왜냐하면 그는 자국 소련을 비롯하여 세계정세가 격동하는 ‘위기시대’의 징후임을 직시하고 통찰하여 고정관념을 깨고 기득권을 버림으로써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glasnost·perestroika, 개혁·개방 정책)를 결행하여 냉전체제를 종식시키고 세계평화를 지켜냈던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는, 이를 거울삼아 동계올림픽을 통하여 어렵게 남북관계가 회복된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미국과 일본 등 열강들이 대북압박, 재제를 고수하는 딜레마의 와중이므로 백범의 투철한 신념과 사명의식, 백절불굴의 인내와 의지를 깊이 고찰하여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범민족적인 자각에 의한 발상의 대전환과 이념의 경도를 타파하여 ‘평화통일’의 기반과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하여 우리 대한민국 정부가 미국과 북한이 예의 위압적이고 일방적인 태도를 지양, 상호호혜(give and take)의 협상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중재함으로써 남북·북미의 관계개선을 이끌어 내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21세기의 오늘날,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오명과 수치에 대하여 ‘경술국치’의 한을 씻고 나라의 독립을 열망하며 온 국민이 단결하여 봉기했던 99년 전 3월 1일, 깊은 통한에서 발로한 선열들의 원대한 뜻을 되새기며 통렬하게 반성해야 마땅하다. 더욱이 그 전도를 가늠조차하기 힘든 4차 산업혁명의 격랑을 뚫고 나가 한겨레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기약할 수 있는 길은 우리 민족의 염원이기도 한 남북한의 ‘평화통일’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까닭은 시계제로(0), 불확실성의 시대인 디지털혁명·4차산업혁명의 시대는 10진법이 아닌 2진법의 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남북통일’은 1 더하기 1은 2가 아닌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분야 발전의 무한한 가능성과 문화부흥의 가치 창출은 물론 영토(간도)회복의 기축역할을 할 수도 있는 ‘2진법의 비결’이며 방책이다. 이에 부응하여 목하, ‘11·12민주시민혁명’으로 세워진 민주정부 문재인정부가 ‘남북화해, 평화통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며, 그래서 온 국민이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하여 정부를 지지하고 협력해야만 한다. 


또한 각별히 유념해야 할 점은 ‘외교는 전쟁이다’ 그러므로 다른 국정과제와 정책문제들은 차치하더라도, ‘국방·외교’만은 사상과 이념, 당파와 계파 등, 모든 차이를 넘어 초당적이 되어야 한다. 특히 모든 지도자·위정자들은 국가안보와 평화번영을 위한 정부의 대북노선과 방위전략의 추진, 실행에 온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합심 협력할 수 있도록 솔선수범해야 할 것이다. 

 

대한글씨검정교육회 권혁시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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