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조작’ 고문수사관 위증하자 법정 구속한 '이성은' 판사

보안사 출신 고병천, 무성의한 사과에 분노한 판사 "무엇을 잘못했는지 기억했으면 좋겠다”며 구속 집행

서울의소리 | 입력 : 2018/04/03 [09:37]

  구속된 고문 수사관 고병천

1980년대 재일동포 간첩단 조작사건 때 무고한 시민을 붙잡아 고문을 했지만 안했다고 위증했다가 재판에 넘겨진 전 국군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고문 수사관 고병천이가 2일 법정에서 구속됐다. 

 

지난해 12월13일 위증 혐의로 기소된 지 110일만, 2010년 12월16일 재일동포 조작 간첩 피해자인 윤정헌(65)씨의 재심 재판에 나와 “고문하지 않았다”고 증언한 지 7년 3개월만, 1984년 한국에 유학 온 대학생 윤씨에게 간첩이라고 자백하라며 고문한 지 34년 만이다. 판사가 재판을 받던 피고인을 법정구속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고문 수사관 고병천은 고문 피해자인 윤정헌씨의 재심 재판에서 “고문한 적이 없다”고 진술해 위증한 혐의로 기소됐다. 윤씨는 1984년 10월 보안사 수사관에게 끌려가 43일간 불법구금 상태에서 고문을 당하고 간첩으로 꾸며진 뒤 법원에서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고 약 3년을 복역한 뒤 출소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9단독 이성은 판사는 이날 오후 4시부터 위증 혐의로 기소된 고병천의 세 번째 재판을 열었다. 재판은 원래 고병천의 피고인 신문, 최후 진술, 검찰의 선고 의견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고병천을 위증 혐의로 고소한 윤정헌씨뿐 아니라 고씨의 고문 피해자 김정사씨, 최양준씨도 법정을 찾았다. 지난 재판에서 고씨가 “사과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병천은 진정한 사과의 기회를 세 번이나 놓치면서 피해자들의 수십년 묵힌 울분을 피할 수 없었다. 

 

고병천 구속은 고씨가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선처를 바란다면서도 정작 피고인신문 과정에서 당시 고문 상황에 대한 구체적 진술을 피하면서 이 판사가 구속을 결정했다.

 

고병천은 이날 법정에서 “이 사건(윤씨 사건) 관련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가혹행위에 관여한 것은 사실이다.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한 것은 동료와 선후배들 때문이었다”며 “진정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바란다. 윤씨와 다른 모든 분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문 피해자들 대리인인 장경욱 변호사가 김병진씨, 이헌치씨 등 피해자들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고문 사실이 기억나느냐고 묻자 고병천은 일부 피해자들에 대해 “기억에 없다”, “제가 안했다”, “잘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장 변호사가 ‘어떻게 고문했는지 이야기를 해보라’고도 질문했지만 고씨는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고 “잘 모른다. 죄송하다”고만 반복했다.

 

급기야 방청석에 있던 윤씨가 “이 재판은 역사”라고 말하며 직접 나섰다. 윤씨는 “오늘 사과를 한다고 해서 기대하고 왔는데 이것(고씨 태도)은 사과가 아니다”라며 “가볍게 형을 받고 이 재판을 빨리 끝내고 싶은 게 속마음 아니냐”고 고씨를 향해 항의했다.

 

이날 휠체어를 탄 채로 재판을 보러온 다른 고문 피해자 김정사씨는 “이 사람(고씨)이 저에게 직접 전기고문과 물고문, 구타를 했다”며 “40년 전 이야기지만 고씨는 다 잊었다고 해도 저는 하나도 잊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과는 무엇이냐”고 고병천을 꾸짖었다.

 

▲  고병천 구속 뒤 법원에서 기념 사진을 찍은 조작간첩 피해자    © 오마이 뉴스

 

이 판사는 결국 고병천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 판사는 “이 사건은 위증 사건이지만 본질은 위증에 한정할 수 없는 사건”이라며 “(고문 상황을) 기억하기가 매우 고통스럽고 피해자들 앞에서 진술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지만,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기엔 기억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고 말했다. 

 

이 판사는 고씨에게 “피고인이 누군가에게 잘해준 내용은 기억하고 있는데 불리한 내용은 기억을 안 하는 것처럼 보였다”며 “피해자들이 아픈 과거를 떠나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열쇠를 피고인이 쥐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했다. 

 

이 판사는 구속영장 집행 직전 또 다시 “다 잘못했다”고 말하는 고씨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가 중요하다. 그 무엇을 기억해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재판이 끝난 뒤 서울중앙지법 서관 501호 밖으로 나온 김정사씨는 윤정헌씨의 손을 잡았다. 김씨는 “고문 가해자가 사과하는 게 역사상 처음이라고 해서 일본에서 왔는데 사과를 안 했잖아…”라며 여전히 분노를 삭히지 못했다. 윤씨도 눈물 탓에 충혈된 눈을 닦으며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기는 하는데…다음에 또 뭐라고 할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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