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70주년 제주기행, ‘사라진 마을 곤을동’ 이야기

임두만 | 입력 : 2018/04/10 [21:07]

[신문고뉴스]임두만 편집위원장 = 제주시 화북동 인근 해안, 화북천이 바다로 빠져 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던 작은 마을 하나가 19491월 아주 없어졌다. 마을 이름은 곤을동. 곤을동이란 이름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 곤을동 안내판 (C) 임두만

 

그 곤을동이 지금은 집터였음을 알 수 있는 올레와 돌담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돌담으로 둘러싸인 잡초밭 한 가운데 4.3유적지란 팻말이 세워져 있다.

 

팻말은 '곤을동'에 대해 제주시 화북1동 서쪽 바닷가에 있었던 마을이라며 ”4.3이 일어나기 전 별도봉 동쪽 끝자락에 위치했던 '안곤을' 마을에 22가구, 화북천 두 지류 사이에 위치한 '가운데곤을'17가구, 화북천 '밧곤을'28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곤을동이 불에 타 폐동이 된 때는 194914알과 5일 양일이었다고 적고 있다.

 

▲ 제주특별자치도가 세운 팻말 (C)임두만

 

동네 주민들은 당연히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던 평범한 제주 양민들, 이 양민들은 자신들이 죽는 이유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끌려가서 학살을 당했다.

 

팻말에는 “194914일 오후 3-4경 국방경비대 2연대 1개 소대가 느닷없이 마을을 포위했다. 이어서 이들은 주민들을 전부 모이도록 한 다음 젊은 사람 10여 명을 바닷가로 끌고 가 학살하고 안곤을마을 22가구와 가운데곤을’ 17가구 모두를 불태웠다고 적고 있다. 학살자들은 바닷가 이 작은 마을에 나타난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군인들이었다. 그들의 학살 명분은 '빨갱이 소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적지 소개문에는 이들 군인들이 마을 주민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울 때 그들이 '빨갱이였는지, '빨갱이들을 도왔던 마을'이라든지의 소개는 없다. 그냥 끌고 가서 죽였으며 마을을 불태웠다는 점만 적고 있다. 팻말을 세운 주체는 제주특별자치도...따라서 제주도 자체조사 결과 그냥 학살당하고 불태워진 마을이었음이 분명하다. 분명한 국가권력에 의한 학살.

 

▲ 청명한 4월임을 청보리가 말해준다 (C) 임두만

 

팻말의 소개 글은 이렇게 다시 이어진다.

 

다음날인 15일에도 군인들은 인근 화북초등학교에 가뒀던 주만들을 인근 화북동 동쪽 바닷가 '연디밑'에서 학살하고 '밧곤을' 28가구도 모두 불태웠다. 그후 곤을동은 인적이 끊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개 글은 제주시 인근 해안마을이면서도 폐동돼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이 된 곤을동에는 지금도 집터, 올래(집과 마을 길을 연결해주는 작은 길)들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4.3의 아픔을 웅변해주고 있다로 끝나있다.

 

▲ 옛 마을을 되실린 그림 입간판 (C) 임두만

 

이 팻말이 있는 바로 옆 잡초밭에는 당시 마을의 모습을 그림으로 재현한 입간판이 서있다.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마을과 집이 작은 돌담길로 연결되어 있던 작은 마을의 모습을 그려 놓은 정경이다.

 

내가 제주를 찾은 전 날, 서울은 kbo창립 37, 즉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긴 지 37년만에 처음으로 미세먼지 경보로 안해 프로야구가 순연되었다.

 

하늘은 잿빛이었으며 사람들의 얼굴도 잿빛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은 그 잿빛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미세먼지를 담고 내리는 비라서인지 구질구질하다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운 봄날....그런데 재주의 봄날은 달랐다. 하늘은 화창했으며 바닷물은 그래서 더 잉크빛이었다.

 

▲ 곤을동 앞 쪽으로 펼쳐진 잉크빛 바다 (C) 임두만

 

70년 전 그 봄날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돌담을 사이에 두고 피어나는 노란 유채꽃도 있었고, 밭에는 파란 보리도 키를 훌쩍 키운 채 이삭을 냈을 것이다. 그 봄날 남자들은 고기잡이 이야기를 하고, 여자들은 보리가 익기 전의 보릿고개 배고픔에 지천에 널린 쑥과 푸성퀴라도 한줌 더 캐려고 동분서주했을 것이다.

 

그랬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총알에 구멍 뚫린 시신이 되어 길가나 운동장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구더기 밥이 되거나, 바닷가에 버려져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들이 살던 집은 불태워 없어졌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이들은 대한민국 국군이었다.

 

201849, 그들이 살았던 집터에 풀이 무성하다. 거센 바람이 한바탕 풀을 흝고 지나간다.

 

▲ 목이 부러져 죽은 동백꽃...길에 떨어져 발에 밟혔다. (C) 임두만


마을을 지나서 오른 별도봉 산책길인 올래 18코스에 피었다가 진 동백꽃들이 떨어져 죽어있었다. 그 길 끝자락에 샘터가 있었다. 곤을동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할 때는 끊이지 않던 물이었단다. 그런데 지금은 물을 쓰지 않아도 끊겼다는 안내문과 함께 머리가 부러져 죽은 동백꽃이 딩구는 모습...

 

그 모습들이 70년 전 곤을동의 슬픔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상흔을 뒤로 하고 별도봉으로 올랐다.

 

▲ 곤을동을 지나서 별도봉으로 오르는 계단이 가파르다. (C) 임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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