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무부 비밀보고서에서 드러난 박정희와 김종필

김종필일파 "박정희도 윤보선도 암살 제거 계획 시나리오" 비밀전문도...

선데이 저널 | 입력 : 2018/06/30 [22:26]

박정희는 김종필을 아끼면서도 끝까지 불신했었다

 

 

‘영원한 2인자’로 불렸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지난달 23일,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육사 8기생으로, 35세에 5.16쿠데타에 참여, 대한민국을 자신이 새로 설계했다고 말한 김종필은 자신의 처삼촌인 박정희와는 사랑과 증오가 엇갈렸다는 평가가 많다. 박정희가 항상 2인자로 인식됐던 김종필에 대해 늘 경계하고 적절하게 채찍을 휘둘렀다는 사실은 미 국무부 비밀전문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또 김종필은 약 50년 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산관리인으로 부터 1만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이 프레이저 청문회를 통해 제기됐으며 5.16 혁명직후에는 미국이 박정희D와 김종필의 누나와 결혼했다며 혼인관계를 잘못 파악하기도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김종필이 관련한 미국무부 비밀전문을 상세하게 살펴본다.안치용(시크릿 오브 코리아 편집인)

 

김종필이 지난달 23일 ‘자의반 타의반’으로 세상과 작별했다. 김종필이 죽자 한 측근은 현정부가 무궁화대훈장을 추서한다고 했다가, 무궁화대훈장은 전직 대통령에게만 수여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지자 발언을 취소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현정부는 무궁화장을 추서했지만, 쿠데타전력에 논란이 일면서 문재인대통령의 직접 조문은 이뤄지지 않았다.

 

말 많고 탈도 많았지만 한국 근대화에 일정부분 공도 있었던 사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써놓은 묘비로 인해, 자신을 미화시키는 데도 남다른 재주를 가졌던 사람이라는 논란도 자초하고 있다. 미국정부는 5.16 쿠테타로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두뇌역할’을 했던 김종필에게도 주목했고, 김종필에 대한 적지 않은 문서를 남긴 것으로 드러났다.

 

비밀전문에 기재된 박정희-김종필 애증관계

 

김영삼 ?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3김으로 불렀던 김전총리에 대해, 3김의 1명인 김대중 전대통령이 미국측에 박정희-김종필의 애증관계를 설명했고 그 내용은 국무부의 비밀전문으로 남아, 세상에 공개됐다. 김종필 전대통령이 지난 1973년 4월 미국무부 관리를 만나 박정희가 김종필을 불신하고 있으며, 윤필용사건의 본질은 이후락 후계자 옹립이 아니라 이후락 제거작전이었다는 견해를 밝힌 것으로 드러났다.'

 

▲ 1973년 4월 4일 미국무부비밀전문, ‘김종필이 신장치료를 위해 일본을 방문하려고 했지만 박정희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장을 담고 있다.

 

이 비밀전문은 1973년 4월 3일 미국무부관리가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난 뒤 그 다음날 김대중 면담록을 작성하고 주한미국대사관에 보내졌으며, 4개월 뒤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 때 DJ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알려진 당시 도널드 레나드 국무부 한국과장 등에게도 전달됐다. 이 전문에서 DJ는 김종필이 신장 치료를 위해 일본에 가기를 원했지만 박정희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밝혀 박정희가 김종필을 불신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김종필과 앙숙이었던 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은 1963년 6월 19일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부대사였던 윌리암 마지스트레티 부대사의 집에서 부대사를 만났던 것으로 드러났다. 마지스트레티부대사가 작성한 면담보고서에는 ‘1963년 2월말 4대의혹사건으로 외유를 떠난 김종필이 7월께 귀국하려 하자 박정희는 대선전 절대 귀국불가입장을 밝혔다’고 적고 있다. 또 ‘김종필이 새나라자동차 수입과 관련, 수입가격을 시세보다 2배 높이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 일본에 숨겼다고 김재춘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말했다’고 기록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은 이 자리에서 ‘김종필 지지자들이 김종필 조기귀국을 주장한 것은 김종필이 빨리 귀국해야 선거 뒤 출범하는 새 정부에서 자신들이 중요한 자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박정희는 이를 거부했다고 전했다.

 

또 김재춘은 ‘4대의혹사건의 하나인 새나라자동차사건과 관련, 일본차 가격은 한대당 9백달러이지만, 실제로 일본측에 한대당 1800달러를 지급한 뒤, 김종필과 추종자들이 약 1천달러의 차액을 돌려받아 일본 내 김종필계좌에 예치했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에 투자하려는 재일교포들에게 전체 투자금의 4분의 1만 한국에 들여가고, 5분의 3은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게 해주는 대신, 한국정부 지원금에 해당하는 4분의 3은 김종필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일본은행에 예치하는 방법으로 해외에 부정한 돈을 축적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체류 중 김형욱 측근에 1만 달러 받아

 

김종필이 지난 1970년 11월말 미국방문 중 시티뱅크를 통해 김형욱의 측근이 보낸 돈 1만달러를 받았다는 사실도 1978년 코리아게이트를 조사했던 미 의회 프레이저청문회를 통해 밝혀졌던 것으로 드러났다. 프레이저청문회 보고서를 확인한 결과 프레이저위원장은 퍼스트내셔널시티뱅크[현 시티뱅크]에 계좌조회를 요청, 시티뱅크 동경지점에 개설됐던 이현수씨의 계좌 입출금 내역을 제출받았으며, 이 내역에 김종필에게 1만달러를 전달한 내역이 발견됐다.

 

시티뱅크가 프레이저청문회에 제출한 서류 중 시티뱅크 동경지점이 1970년 11월 26일 시티뱅크 뉴욕지검으로 보낸 전문에 따르면 ‘11월 24일 전문관련내용’이라고 적은 뒤 ‘플라자호텔에 체류 중인 김종필씨에게 H.S.LEE씨 게좌에서 인출한 1만달러를 지급하라’고 기재돼 있다

 

▲ 프레이저청문회 보고서 ? 프레이져청문회가 김형욱을 출석시켜 김종필에게 만달러를 전달한데 대해 추궁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프레이저위원장은 1978년 7월 20일 청문회에 출석한 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에게 이 전문을 보여주며 추궁했다. 프레이저위원장은 ‘뉴욕과 동경의 시티뱅크에 개설된 H.S.LEE의 은행기록에는 김종필의 미국방문 중 이현수씨가 자신의 은행계좌에서 1만달러를 김 씨에게 지급할 것을 승인했고, 그 돈은 김 씨에게 현금으로 전달됐다’며 김종필에게 돈을 준 이 씨가 누군지 물었다.

 

김형욱은 ‘이 씨가 김종필에게 돈을 준 사실은 알지 못하지만, 이현수씨는 내가 잘 아는 영화수입사업가로서, 나의 돈을 관리했다’고 증언했다. 즉 김형욱의 재산관리인이 김종필에게 1만달러를 전달한 셈이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김전총리는 뉴욕아시안학회의 초청을 받아 1970년 11월 15일부터 부인 박영옥씨와 함께 미국을 방문했으며, 12월 7일까지 약 23일간 미국에 체류한 뒤 12월 8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시티뱅크가 김전총리에게 1만달러를 전달했다고 기록된 11월 26일 김전총리는 방미 중이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이현수씨가 김형욱의 재산관리인임을 감안하면 중앙정보부장직에서 쫓겨난 김전부장이 김전총리에게 1만달러를 전달하고, 권력핵심 으로의 화려한 부활을 꿈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전통리는 1만달러를 받은 지 4개월 뒤인 1971년 3월 공화당 부총재가 되고 2개월 후인 같은 해 5월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케네디 브리핑북에 ‘朴 혼인관계 잘못 기재’

 

5.16 혁명직후 박정희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방문할 때, 미행정부는 케네디에게 보고한 브리핑북에서 ‘박정희가 김종필 당시 중정부장의 누나와 결혼했다’고 잘못된 사실을 기재한 것으로 드러났다. 1961년 11월 박정희의 방미와 관련, 미행정부가 작성한 브리핑북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누나와 결혼해 아들 1명과 딸 2명등 3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고 적혀 있다.

 

이 브리핑북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유양수 최고회의 외교분과위원장[CIA- P- 146666]등에 대한 인물정보를 담고 있으며, 박정희에 대한 자료는 CIA인물자료에 있는 사진등을 포함해 모두 3페이지였다.

 

이 브리핑북에 따르면 박정희의 CIA 인물정보 등록번호는 142532였으며 한국 육군의 장군으로 기재돼 있다. 이 인물정보에는 1917년생인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육사에 진학한 뒤 가나가와의 일본육사로 전학해 1944년 졸업 후 1년 남짓 일본육군에서 복무했으며, 해방 직후 한국으로 돌아와 1946년 12월 육사 2기로 졸업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박정희는 남로당 당원으로서 1946년 대구폭동당시 경찰에 의해 처형됐던 그의 형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로 기울었으며, 1948년 여순반란사건직후 공산주의자임이 발각돼 군법회의에 회부됐으나 명석한 청년장교라는 점이 그의 구명에 도움이 됐다고 적혀 있다.

 

바로 여기서 대구 폭동 당시 경찰에 의해 처형됐던 그의 형이 바로 박상희로, 후일 김종필의 장인이 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브리핑북에는 박정희가 김종필의 누나와 결혼해 아들 1명, 딸 2명 등 3명의 자녀를 두고 있으며 군인월급으로 살다보니 매우 곤궁한 상태라고 기록하고 있다. 브리핑북이 명백히 사실관계를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 브리핑북대로 라면 박의장은 김종필부장의 매부이지만 실제로 김종필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 영옥씨와 결혼한, 박정희의 조카사위이다.

 

이 브리핑북이 작성된 시점은 5.16혁명이 일어난지 4-5개월이 지난 시기였지만, CIA인물정보가 작성된 시기는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어쨌건 혁명이 발생한 지 한참 지난 시점에서 미국대통령에게 보고된 자료에서 사실관계가 잘못 기록됐다는 것은 당시 미국정부가 한국에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종필일파 박정희도 윤보선도 암살 제거 계획 시나리오

 

▲ 1963년 10월 15일자 미국무부 비밀전문에는 주한미국대사관이 윤보선전대통령의 비서로 부터 김종필일파가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이 박정희를 앞서면 박정희를 암살한뒤 윤보선을 살해한다는 암살계획을 제보받았다고 적고 있다.

 

또 1963년 민정이양을 표방하며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개표 중 윤보선이 박정희를 앞서면 김종필일파가 투표당일 자정이후 박정희를 살해한 다음 윤보선까지 암살하고 다른 지도자를 내세워 군사정부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첩보가 주한미국대사관에 입수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제5대 대통령선거당일인 미동부시간 1963년 10월 15일 새벽 5시28분, 한국시간 15일 오후 6시28분, 미국무부에는 주한미국대사관이 보낸 491호 전문이 접수됐다. 10월 15일 윤보선의 비서 이재항이 주한미국대사관에 제보한 내용이라고 기록된 이 전문에는 놀라운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재항은 공화당관계자가 윤보선후보에게 전한 내용이라며, 10월 15일 자정께부터 도시지역의 투표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며, 만약 이때 윤보선이 박정희를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면 김종필일파[KIM JONG PIL FACTION]가 박정희를 먼저 살해한 다음 윤보선을 암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주한미국대사관에 제보한 것이다. 이재항은 ‘이같은 암살음모는 자정이후부터 언제든 실행가능하며 음모의 목표는 다른 리더십 하에서 군정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재항의 제보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쿠테타주역들이 정권교체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으며, 여차하면 김종필이 박정희까지 살해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내부의 권력투쟁도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박정희도 김종필의 이같은 복심을 알았음인지, 그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제상자리에 앉히기도 했지만 항상 다른 권력핵심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김종필을 견제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무부 비밀전문과 프레이저보고서등은 박정희와 김종필이 서로 불신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 박정희와 김종필은 이승에서 다시 만난다. 김종필은 박정희에게 무슨 말을 던질까!

 

선데이 저널 안치용(시크릿 오브 코리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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