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가 죽으면 가장 두려울 사람...'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무죄판결에 약이 바싹 오른 이승만이 볼멘소리를 하자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라”

김형민 SBS CNBC PD | 입력 : 2018/08/14 [09:18]

 

일본도 명색이 근대적 법치국가였으니 재판을 거치지 않고 교도소로 온 사람은 없었다. 그럼 당시 그 많은 독립운동가들, 각종 사상범들, 노동운동, 농민운동 관련자들은 누구의 변호를 받았을까? 여기서 우리는 일제강점기 헌신적이고도 열정적인 변호를 펼쳐 식민지 조선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변호사 세 명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허헌(1885~1951), 이인(1896~1979) 그리고 김병로(1887~1964).

 

최초로 두각을 드러낸 건 허헌 변호사야. 허헌 변호사는 3·1운동 이후 체포된 민족 대표들의 재판에서 유명한 ‘공소불수리’ 주장을 펼친 적이 있다.

 

일제 검찰은 3·1운동의 주역들을 처음에는 일반 형사법상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려다 ‘내란죄’ 같은 중범죄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일본 법률상 일반 형사범죄는 지방법원이 1심, 내란죄는 고등법원이 1심이다. 그래서 사건이 고등법원으로 이관됐는데 3·1운동이 해외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일본의 만행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면서 일본은 국제 여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일본은 다시 보안법 위반으로 유턴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제 당국은 공식적인 송치 결정 없이 사건을 이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그 틈을 허헌 변호사는 과감하게 찌르고 들어갔다. “이 사건 기록이 지방법원에 공식적으로 넘어온 게 아니잖소? 일본법에 따르면 그렇소. 공소불수리(공소 기각)를 요청하오.” 일제 당국은 하마터면 민족 대표들을 풀어줘야 할 위기에 몰리는 등 크게 한 방을 먹었다.

 

이인 변호사 역시 1923년 변호사가 된 이후 일제강점기에 억울한 범죄자가 된 식민지 조선인들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09년 이재명 의사의 이완용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하다 도주했고, 이후 15년 동안 암약하며 이완용을 노리다 공소시효를 며칠 앞두고 체포된 이동수를 변호한 사람이기도 하다. 변호 과정에서 불온한 행동을 했다 하여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하고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련돼 감옥살이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김병로. 김병로는 나라가 연일 기울어가던 1887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을사늑약 이후 의병에 가담해 항일 투쟁에 나섰지만 좌절하고 법률 공부를 선택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학교에서 법학을 가르치다가 판사로 임용됐고, 1년여 후인 1920년 판사직을 떠나 변호사로 변신하게 되었다.

그는 변호사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첫째, 아무리 일본 경찰이라도 변호사를 쉽게 폭행하거나 구금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둘째, 변호사 수입을 사회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쓸 수 있고, 셋째, 공개 법정에서라도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며, 인권 옹호와 사회 방위를 위한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김병로가 자신이 변호사가 된 이유를 한 치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그의 행적이 입증해. 각종 독립운동 사건은 물론이고 노동자·농민으로서, 최소한 인간으로서 생존권을 박탈당한 이들의 문제에 민감했다.

 

전라도 서남해 바닷가 암태도에서 일어난 소작쟁의부터 개마고원 자락의 함경남도 고원의 농민들의 항쟁, 그리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백정들의 인권 투쟁에 이르기까지 김병로는 팔도가 좁다 하고 돌아다녔다. 그의 호가 거리의 사람, 가인(街人)이었던 게 이해가 간다.

 

1945년 해방이 왔지만 분단 역시 함께 들이닥쳤어. 일제강점기 내내 함께했던 인권변호사 트리오도 남북으로 갈리고 만다. 허헌은 북한을 택했고, 이인은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이 되고, 김병로는 초대 대법원장으로 사법부 수장에 올랐다.

 

 

이승만은 깐깐한 법률가 김병로가 사법부의 수장이 되는 것을 마땅치 않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인이 “대법원장은 김병로”라는 데에야 천하의 이승만인들 도리가 없었다. 과연 김병로의 무게는 해방 전과 후가 다르지 않았다. 대법원장 김병로는 헌법을 수시로 짓밟던 행정부 수반 이승만에 견결하게 맞섰으며 사법적 정의를 통해 행정부의 오만과 횡포를 견제했으니까.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승만이 야당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납치한 뒤 여당 의원만으로 개헌을 통과시킴)’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 뿐이다”라고 강조했던 것은 그 허다한 일례의 하나일 뿐이다. 연이은 법원의 무죄판결에 약이 바싹 오른 이 대통령이 볼멘소리를 하자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라”고 맞받은 에피소드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전설로 남아 있다.

그를(양승태) 어찌 김병로의 후배라 할 수 있나.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는 1957년 12월16일 퇴임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동안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해온 것은 전국 법원 직원에게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한 점입니다. 나는 모든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은 영광이며 또 그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명예롭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때 대법원장은 퇴임식으로부터 몇 년 전, 출장을 간 판사가 지방 변호사한테 접대를 받고 관행일 뿐이라고 주장하자 노발대발하여 인사조치 해버렸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 거리를 누비며 조선 사람들이 흘리는 피눈물을 닦으며 일본 법률을 무기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던 거리의 변호사 가인 김병로,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던 김병로는 그렇게 대한민국 사법부의 초석을 엄격히 다지고 권위를 드높였다.

 

이토록 걸출한 인물이 사법부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면 사법부의 역사는 그만큼 명예로운 탄탄대로여야 했겠으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법부의 역사는 진창으로 빠져들었다. 군사독재 시절 대법원장은 대통령의 ‘법무참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다수 판사들은 정보기관이 내미는 쪽지대로 판결을 내며 ‘정찰제 판결’의 꼭두각시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 사법부의 권위와 명예가 그나마 회복되었으리라 여겼던 나의 기대는 얼마 전 폭로된 제15대 대법원장 양승태와 그 대법원이 자행한 ‘재판 거래’ 의혹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권력자의 비위에 맞춰 재판을 기획하고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했어요” 꼬리를 살랑거렸다면, ‘대법원’이 어찌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가 가꾼 사법부의 후신(後身)일 수 있으며, 그 판관들을 두고 어찌 김병로의 후배들이라 감히 일컬을 수 있단 말이냐.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언젠가는 저승에서 김병로 대법원장을 만나야 할 텐데, 그때 양승태 판사는 걸음아 날 살려라 달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인 김병로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쫓아올 테니까. “내가 뭐라고 했느냐. ‘법관이 국민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최대의 명예 손상이 될 것이다.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김병로 대법원장 퇴임 연설 중)’고 하지 않았더냐.”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이승만과 맞선 대법원장  SBS 카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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