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의 파수꾼' 동암 아들 "독립운동 집안 숨기려 성을 바꿔 살았다"

"차(車)씨인데 신(申)씨로 알고 살았습니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18/11/20 [14:27]

임정의 최고지도자였던 도산과 백범을 측근에서 도운 '임시정부 파수꾼'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 투쟁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은 없어져야

 

살 얼음장 같던 일제 강점기하 중국 상해 임시정부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이상룡, 홍진, 이동녕 선생같은 강직한 임시정부 지도자의 영도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들을 도우면서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밤낮으로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졌던 음지의 독립 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아마 임시정부는 끝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동암 차리석 선생. 역사공간
 

 

독립운동가 동암(東岩) 차리석(車利錫) 선생, 독립운동가나 후대의 사학자들은 그를 '임시정부 파수꾼'으로 부른다.

 

동암의 생애가 임시정부 역사로, 1919년 9월 독립신문 기자로 독립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뒤, 1945년 9월 9일 임시정부 환국 준비를 하다가 임정 청사에서 과로로 쓰러져 순국할 때까지 오로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

 

순국하기 직전의 직함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비서장'이었다. 독립 운동가들의 가정이 대부분 평탄치 못하였는데 동암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방을 맞아 조국으로 돌아온 백범 김구가 취한 조치 가운데 하나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순국한 동지들의 유해를 봉환한 일이었다. 1946년 일본에서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유골을 봉환, 효창원에 봉안한 백범은 48년 중국에 묻힌 동암 차리석과 석오 이동녕의 유해를 모셔왔다.

 

석오의 유해는 유족의 집에, 그리고 동암은 백범의 숙소인 경교장에 안치됐다. 동암의 유해가 경교장에 안치된 것은 서북 출신인 동암에게 서울에 연고가 없는 이유도 있지만, 백범이 누구 못지 않게 아낀 후배 동지였기 때문이다.

 

백범이 중국내 독립운동가 중에서 가장 먼저 챙겼던 동암 차리석(1881~1945). 동암은 임정 지킴이로서 생애를 임시정부에 헌신했지만, 항상 2인자였던 탓에 역사에서 묻혀 있었다. 평생을 임시정부에 몸담으면서도 이렇다할 '고관대직'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정에서 그가 맡은 직책은 임정 비서장과 국무위원 정도. 그러나 임시정부에서 동암의 존재는 이동녕 이상이다. 임정 수립에서 해방까지 27년간 임정을 떠나지 않고 임정의 살림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정 요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를 '임시정부의 지킴이'이라고 불렀다.

 

동암 차리석은 1881년 평남 영원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학당에서 신학문을 익힌 동암은 학교 시절 독립협회 평양지회에 출입하며 조국의 현실에 눈을 떴다.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도산 안창호의 영향 때문이었다.

 

1907년 도산을 만나 신민회 창건에 동참한 동암은 평양 대성학교 설립과 청년학우회 핵심인사로 활동하다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중국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동암은 1919년 여름 상해 망명을 결행한다. 상해에서 동암은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지방선전부의 이사로 일했다.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결성식. 앞줄 가운데 김구 주석, 그 왼편 지청천 광복군총사령관

  오른편 차리석 비서장.

 

1930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된 동암은 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유랑길에 접어들자 임정 수호에 나선다.

 

당시 임정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가흥, 남경, 장사, 광주, 유주, 기강 등을 떠돌며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동암은 이 시기 의정원 부의장으로서 때로는 의장 대리를 맡고, 국무위원을 겸하면서 누란의 위기에서 임정을 이끌어갔다.

 

1940년 기강에서 중경으로 이전하면서 임정은 비로소 정부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동암은 대한민국임시헌장을 통과시키며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는 한편 의정원의 기능을 크게 확대시켰다. 중경 시절 김구 주석이 강력한 지도체제를 확립하고 '독립운동의 대부'로 등장하기까지에는 동암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임시정부의 파수꾼이었던 동암은 임정의 최고지도자였던 도산과 백범을 측근에서 도왔다. 동암은 해방 직후 김구 등과 함께 임정의 환국을 준비하던 중 45년 9월9일 중경에서 과로로 숨졌다.

 

20일 '시사인' 보도에 의하면 임시정부 비서장 차리석은 일제가 항복한 지 21일 만에 쓰러져 남은 가족인 부인 홍매영과 아들 영조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부인 홍씨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이유로 닥칠 위험을 직감하고 아들 영조씨 성을 신씨로 바꿨다.

 

1942년 봄, 중국 시안에 있던 임시정부(임정) 광복군 훈련소에서 한 젊은 여성이 허드렛일을 도왔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남편을 일제 경찰의 흉탄에 잃은 홍매영이었다. 서른 살 홍매영은 망명 생활을 하던 동암 차리석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차리석은 평양 숭실학교 졸업 후 신민회에 가입했다.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조작 사건인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19년 평양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차리석과 홍매영은 화촉을 밝힌 지 2년 뒤인 1944년 1월17일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조국 광복 소식을 가져다줄 하늘의 축복이라며 아명을 ‘천복’으로 지었고 중국인 작명가에게 부탁해 ‘영조’라는 본명까지 지었다. 임정 요인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았던 차영조가 태어난 지 20개월째, 1945년 8월15일 드디어 광복을 맞았다.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의 아들 영조씨(사진)는 친일파가 득세하는 모습을 보며 ‘꿈에 그리던 조국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시사인 인터뷰에서
 

임정 비서장으로 살림을 맡던 차리석은 환국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임정 27년 역사가 깃든 서류 더미 선별을 하던 차리석은 1945년 9월5일 밤 과로로 쓰러진다. 병원으로 실려간 차리석은 자신이 못 일어나리라는 걸 직감하고 홍매영을 불러 유언을 남겼다.

 

“젊은 당신한테 큰 짐을 떠안기고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 미안하오. 해방된 나라로 돌아가면 정부건 국민이건 당신과 어린 영조 하나 정도는 외면하지 않을 것이오. 내가 죽어도 부디 맘 편히 귀국해 새 삶을 시작하기 바라오.”

 

나흘 뒤 9월9일 그는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순국했다. 그는 충칭에 임시 안장됐다. 백범 김구는 동암의 영전에 “귀국 후 정식 정부가 수립되면 반드시 고국으로 모셔가겠다”라고 약속했다.

 

1945년 11월 부산항을 통해 어머니와 함께 귀국한 차영조는 이제 74세 할아버지가 되었다. 광복 후 그는 어머니 홍매영 여사와 어떻게 살아왔을까? 기자와 만난 차영조씨는 품속에서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어머니 홍매영 여사가 임정 사무실 앞에서 돌이 갓 지난 그를 안고 찍은 사진이었다. 옆에는 아버지 차리석과 백범이 지켜보고 있었다.

 

충칭에서 귀국한 임정 인사들에 대한 미군정 당국의 대우는 한마디로 철저한 무시였다. 부산항을 통해 입국한 뒤 어머니와 차영조가 머문 곳은 서울 충무로에 있는 한미호텔이었다. 정부 수립 전이라 백범이 미군정과 협상 끝에 우선 일제 적산가옥이었던 한미호텔을 받아내 귀국한 임정 가족의 임시 거처로 삼았다.

 

“생계 대책이 막막하니 어머니가 한미호텔 1층에 양담배 좌판을 깔고 미군 양담배 장사를 했어. 미군정 경찰 단속이 심했지. 어린 나는 좌판 곁에서 놀다가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좌판을 걷어차면 어머니랑 거리를 기어 다니며 흩어진 양담배를 주웠던 일이 아직도 생생해.” 어머니는 수시로 중부 경찰서에 붙들려가서 조사받았다.

 

해방된 조국은 더 이상 아버지가 유언하던 ‘꿈에 그리던 조국’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친일파들이 득세했다. 친일파 청산을 위해 설치한 반민특위가 오히려 친일파의 공격을 받았다. 어머니는 어린 차영조에게 “고국에 돌아왔어도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불안하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 와중에도 백범은 충칭에서 순국한 동암 차리석의 영전에서 한 약속을 앞당겨 이행할 결심을 한다. 이를 위해 백범은 서울 효창공원 자리에 독립운동가 묘역을 조성했다.

 

“백범이 1948년 5월에 남북 협상하러 평양에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오자마자 아들 김신에게 ‘중국에 들어가서 석오 이동녕 선생과 동암 차리석 선생 두 분 유해도 모셔오라’고 명하셨지."

 

"1948년 9월 아버지 유해가 이동녕 선생 유해와 함께 돌아왔고, 백범 선생 주도로 사회장 장례식이 거행됐어.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조의금 1만원을 냈더라. 백범은 무직인데 2만원, 친일파 거부 박흥식이 3만원을 냈고.” 당시 아버지 장례식장 연단에 오른 백범은 이렇게 추모했다."

 

“차리석 선생은 해외 혁명운동가 가운데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시기로 유명했다. 탁월한 사무처리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은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 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5년 9월12일, 중국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차리석 선생 장례식 사진. 시사인
 

동암을 효창공원에 모신 백범은 1년 뒤인 1949년 6월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고 만다. 백범도 1년 만에 이곳에 안장됐다. 김구 선생마저 암살당하자 어머니 홍매영 여사는 충격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이유로 어린 아들에게 닥칠지도 모를 위험을 직감했다. “백범이 암살당하고, 의열단 김원봉 선생이 반민특위에 끌려가 악질 일제 고등경찰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나와 격분해 월북하신 것을 본 어머니는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하셨지. 6·25 전쟁이 나자 피란을 간 부여에서 내 성을 차(車)씨가 아니라 신(申)씨로 바꿔서 학교에 넣으셨어. 차씨의 한자 위아래 획을 하나씩 떼버리면 신씨가 돼.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들은 나를 신영조라고 불러.”

 

피란지 충남 부여에서 차영조의 삶은 신산했다. 6학년 때 어머니가 행상을 하다 중풍으로 쓰러졌다. 어린 영조는 학업을 그만두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일했다. 부여에서 여관과 식당 등을 전전하며 허드렛일을 하고, 오일장이 서면 국밥 배달 일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어. 왜 독립운동을 하셔서 가족을 이리 고생시키냐고.”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때는 광복 후 17년이나 지난 1962년이었다.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통성이 약하니까 고심했겠지. 독립유공자를 일부 인정해주기 시작한 거야.” 이때부터 모자에게 정부 지원금이 나왔다.

 

“하루 세끼 챙겨 먹을 정도”의 적은 돈이었다. 곧은 성품으로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했던 어머니 홍매영 여사도 어린 영조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고생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남편의 옛 동지를 찾아 나섰다. 외면하는 이도 있었지만, 도움을 주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독립운동가 최동오의 아들 최덕신 전 외무부 장관이었다. 임정 법무부장을 역임한 최동오는 만주에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화성의숙 숙장을 맡아 활동했다(이때 김일성은 6개월간 이곳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최덕신은 이승만 정권 시절 군에 있다가 박정희 정부 초기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순화동에 있는 외무부 장관 공관을 찾아가 차리석 아들이 왔다고 했더니 안에서 최덕신 장관의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죽었던 놈이 살아서 나타나다니’라며 기쁘게 반겨주셨어. 이분은 임정 시절에 내가 태어난 사연을 알고 계셨거든. 중풍 걸린 어머니 소식을 듣고는 차비를 두둑이 주시며 곧바로 부여에 내려가 모셔오라고 했어.”

 

이때부터 차영조는 어머니와 함께 외무부 장관 공관의 부속실에 들어가 생활했다. 최덕신 장관의 어머니뿐 아니라 부인 류미영 여사도 차영조 모자를 챙겨주었다. 우선 차영조를 야간 고등공민학교에 넣어주었다. 차영조는 낮에는 공관 청소 등을 돕는 한편 저녁에는 고등공민학교를 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최덕신 장관은 퇴임해서 사저로 돌아갈 때도 차영조 모자와 함께했다. 차영조가 2년제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자 최 전 장관은 상업고등학교에 편입시켜주었다. “그 학교 교장선생님 집이 최 장관 바로 윗집인데, 하루는 교장선생 집을 찾아가 ‘내 아들인데 나이가 좀 많지만 공부를 시키고 싶다’며 설득해 중간에 편입시켜주셨어. 그리고 바로 독일 대사로 나가셨지.”

 

최덕신은 1963년 9월 외무부 장관을 그만둔 뒤 서독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최덕신은 동백림 사건 이후 서독 대사에서 물러난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눈 밖에 났고 미국으로 떠났다. 최덕신·류미영 부부는 1986년 자진 월북했다).

 

최 전 장관이 서독 대사로 간 뒤에도 그의 자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차영조는 고교 졸업 후 곧바로 한국전력(한전) 검침원으로 취업했다. “당시 한전 박영준 사장의 부친이 내 아버지와 임정 동지였어. 최덕신 장관 어머니가 얘기를 넣어줘서 박영준 사장을 찾아갔더니 인사부장을 불러 바로 검침원으로 채용해주셨지.”

 

10년 동안 검침원 생활을 하던 차영조는 추석날 아버지 성묘하러 효창공원에 들렀다가 아버지와 함께 묻힌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 이석희 당시 대우그룹 부회장을 만났다. 이석희 부회장은 그의 근황을 묻더니 대우그룹으로 스카우트를 제의했다.

 

“그렇게 대우 가서 중동 건설 현장에 파견 나가 10년간 일했어.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대개 어렵게 살고, 나도 어린 시절 어렵게 컸지만 돌아보면 난 아버지 영광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 한전 검침원도 그 인맥으로 갔고, 대우로 간 것도 다 아버지 덕분이었으니까.”

 

그가 대우에 입사해 중동에 나가 있던 1979년 어머니 홍매영 여사는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얼마나 강직하신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됐는데도 가시는 날까지 손수 밥 짓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을 해결하셨어.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한 것도 독립운동이라는 김구 선생의 권유에 따라 운명을 개척하셨는데, 아직도 어머니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못 받고 있다는 게 자식으로서 한이야.”

 

그는 임정 수립 99주년이던 지난 4월13일 효창공원 순국선열 묘역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대접을 받았다는 감격 때문이었다. “효창공원 묘역에서 열린 그날 기념식에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해 후손과 동행하자고 했지. 아버지 묘소 앞에서 헌화 분양하는 국무총리 뒤에 서 있다가 ‘이게 얼마 만에 받는 예우인가’ 생각했더니 감정이 거대하게 물결치더라고.”

 

그는 10월1일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로 바꾸는 운동에도 적극 앞장서고 있다. 대한민국의 뿌리인 임정에서 국군의 뿌리를 찾지 않으면 일본군이 우리 군의 뿌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신흥무관학교가 육군사관학교(육사)의 뿌리가 되어야지. 그래서 이번에 육사에서 신흥무관학교 107주년 기념식을 열고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이회영 선생 흉상을 세웠어요. 육사 생도대장이 건배사 한마디 해달라고 해서 ‘금년부터 졸업하는 생도는 임정에 뿌리 둔 광복군, 독립군의 후예로 졸업하니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했지. 육사 생도가 이제부터는 독립군이 뿌리라는 얘기에 이의 제기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더라고.”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배경에는 망각속에 사라진 독립운동가들의 피와 눈물이 있어서다.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 투쟁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은 이제 더는 나오지 않아야 하고 그에 걸맞은 대우로 독립운동 가문에 예우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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