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5·18 폄훼·모독 망언 국회의원 엄중문책, 역사왜곡 처벌법 제정

권혁시 칼럼 | 입력 : 2019/02/15 [22:39]

왜곡된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공표, 국민의 '역사의식'을 정립한다

 

 

오랜 동안 금지되었던 '임을 위한 행진곡'(백기완 작사, 김종률 작곡)의 제창을, '11·12민주시민혁명'에 의해 세워진 '시민정부'의 문재인 대통령이 지시하였다. 그래서 1997년 이후에 처음으로 제 37주년(2017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모두가 한마음 한목소리로 힘차게 노래하였고, 이를 지켜보던 온국민도 (마음속으로나마) 그 노래를 함께 불렀을 터이다. 그것은 '민주시민혁명'(촛불혁명)의 완결을 위해 정의와 평등을 향하여, 진정한 민주국가,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의 건설로 나아가는 결의와 맹세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민주항쟁과 그 정신을 기리는 민중가요이고, 노동자의 노래다. 불의에 대한 결연한 저항정신의 발출이며, 정의와 자유를 향하여 민중이 모두 하나가 되어 ‘앞서서 나가는’ 주체적 의지 표명의 메시지다. 그래서인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전 세계인들의 애창곡이 되었는 바, 누구와도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정의와 자유, 평등의 실현에 대한 신념과 결의를 의연하고 담대하게 표출시킨 까닭이리라.

 

그러므로 '정의와 자유'를 향한 도도한 역사의 물결과 뜨거운 국민의 열망을 거스르는 수구 적폐세력의 망발망언, 경거망동을 결단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윈스턴 처칠 ㅡ 이 경구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언명으로 알려질 만큼 역사왜곡은 이런저런 부당한 이유로 번번히 자행된다). 그런데, 느닷없이 '5·18민주화운동'을 폄훼, 모독하는 망언이 일반인도 아닌 국회의원의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역사를 잊지 않기는커녕 오히려 왜곡을 서슴지 않는 반역사적, 반민주적이며 헌법정신을 유린하는 작태를 어찌 묵과할 수 있겠는가.

 

누구도 부인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은, 1978년 10·26사태(박정희 대통령 암살)로 군사독재정권이 종말을 고하고 반민주적 유신체제가 무너지면서 대한민국은 민주정치를 대망하는 격변기(이른바 '서울의 봄')를 맞는다. 그러나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주동한 12·12사태(군사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쿠데타세력(신군부)은 과도정부(대통령 최규하)를 무력화시키고, 국민의 오랜 숙원이던 민주주의의 실현을 억지시키면서 정치권력의 장악을 획책하였다. 이에 극력 반발한 국민저항이 학생운동을 필두로 전개되었고, 급기야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사북사태)으로 확대되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일원에서의 데모를 비롯한 학생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상황이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극렬해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신군부는 그 이튿날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발표하였고, 집권 야욕에 사로잡힌 반민주 세력은 국민의 광폭적이고 대대적인 항거에 대항하여 군사력을 동원, 민주인사들을 대거 체포, 투옥시키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대응은 특히, 광주지역에서 학생,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그리하여 '5·18민주화운동'이 불붙게 되며, 그 과정은 대략 5단계의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제1국면, 항쟁의 발단; 5월 18일, 휴교령이 내려지자 사전에 결의한 바대로 학생들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집결하였다. 하지만 군대(공수부대)의 저지로 인해 광주역에서 재집결하여 시위를 벌였으며, 시위행렬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계엄군은 재차 진압에 나섰다. 공수부대의 무력에 의해 부상자가 속출하여 첫날의 시위는 무산되었으나, 오히려 시민·학생들의 분노를 촉발, 증폭시켜 항쟁으로 확대, 반전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제2 국면, '민중봉기'로 급반전; 19일부터는 학생데모에 시민들이 대거 동참하면서 봉기의 국면으로 급격히 격화되었다. 공수부대의 무장폭력에 격분한 일단의 학생과 시민들이 경찰, 군대와 거세게 맞서는 가운데 시위는 갈수록 격렬해졌다. 이때에 계엄군은 간선도로, 주요시설 등을 점령하여 시위군중를 포위하였고,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위해 시위대는 화염병, 돌, 쇠파이프 등으로 초보적인 무장 대응을 시도하였다.

 

제3 국면, 항쟁의 격화, 무장투쟁; 노동자, 도시빈민 등의 적극적인 가세와 함께, 이들이 선봉에 서면서 20일, 무기를 탈취하여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방송국, 신문사, 경찰소 등 공공기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으나, 계엄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그렇게 급박한 와중에 시민대표와 도지사가 협상했지만 결렬되었고, 계엄군의 계속된 발포로 인하여 사상자가 갈수록 늘어났다.

 

제4 국면, 전라남도 전역확산; 격분한 시위대가 급기야 시가전에 나서기를 불사하고 항쟁이 전남지역 전체로 확대되면서 21일, 오후부터는 농민들마저 가담하기 시작하여 투쟁은 확산 일로로 치달았다. 그래서 지휘부까지 구성한 시위대는 고립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포, 영암, 나주 등지로 진출했으며 22일, 오전에는 총공세를 벌여 도청과 경찰청에 주둔해 있던 공수부대를 격퇴시키고 광주시 전역을 장악하였다.

 

제5국면, 22일부터 27일까지 6일간의 공방 끝에 계엄군이 광주를 다시 점령하였다. 광주를 장악했던 시위대는 생필품공급, 치안확보 등 자치활동을 펴는 한편, 23일부터는 매일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어 시민항쟁의 목표, 곧 '민주주의와 생존권확보'를 재확인하였다. 하지만 급조된 수습대책위원회는 이러한 시민의 여망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 보다는 원상회복과 사태진정에만 주력한 탓에 광주시민과 위원회의 분열을 자초하였다.

 

이렇게 되자 광주시민들은 범시민궐기대회에서 수습대책위원회를 거세게 비판하며 25일, 투쟁지휘부를 다시 구성하는 동시에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대한 대응에 만전을 기하고자 조직을 체계화시켜 시민군으로 재편하였다. 그러던 중 27일 새벽 0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중무장한 병력을 총출동시켜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벌였다. 그런 끝에 수많은 사상자의 피로 물든 10일간의 역사적인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신군부는 정권탈취의 야욕을 노골화하면서, 이렇게 시민들의 정당한 항거를 일축하고 국가보위의 임무수행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군대를 동원하여 살상도 불사하는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승자가 역사를 바꾼다'던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던가? 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면서 왜곡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부세력과 어용 언론들이 광주시민항쟁을 중심으로 역사를 왜곡하면서 박정희 군사정권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한 탓에, 철옹성처럼 보였던 전두환 정권 역시 6·10민주항쟁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진다.

 

일찍이 반민주적인 군사독재정권을 합리화시켜 유지하기 위해 박정희정권 역시 근·현대사를 왜곡(국사교과서 국정화)하였다. 하지만 '부마항쟁'에서 촉발된 10·26사태로 유신독재체제가 붕괴되면서 그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처럼 군부세력의 광주폭거로부터 굴절된 역사가 다시 반복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군부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국내에서는 일체 보도가 안 된 군대(계엄군)의 만행에 의한 참상이 (후일 '푸른 눈의 목격자'로 불린) 독일 제1공영방송의 언론인이며 (촬영)기자인 위르겐 힌츠페터에 의해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의 의의, 군부의 만행 적시 공표 - 국민의 역사관 확립
폠훼·모독 망언 국회의원 엄중문책, 5·18역사왜곡 처벌법 제정

 

15년의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지난 후 1995년 12월 21일,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어서 1997년 4월, 대법원은 광주사태로 호도했던 광주민주항쟁을 군부집권의 목적인 12·12군사반란(쿠데타)에 의한 5·18내란으로 판결, 사법적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해 5월 9일, 정부는 5월 18일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하여 '5·18민주화운동'을 기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97년 12월 17일,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공로자에 대한 서훈을 취소했으며 그 자격을 박탈하였다.

 

특히 UN(국제연합)은 2011년 5월,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는데, 한국은 물론 아시아 전체의 민주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준 'May 18 Democratic Uprising'(민주적 봉기)으로 평가하였다(여타 외국의 대다수 언론들도 거의 같은 견해를 나타냈다). 그런데도, 이 역사적 사실로서의 민주항쟁을 '5·11연구회'의 5·11분석반은 폭도에 의한 폭동으로 조작(북한군 개입설 추가), 날조하였고, 그 왜곡된 시나리오가 인터넷에 유포, 횡행해 왔다.

 

이런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갈수록 정도가 심해 지고 있다. 그럴진대 이를 직시하여 정치권은 단순히 관련자(국회의원) 문책, '5·18역사왜곡 처벌법' 제정에만 급급해서는 안 된다. 이념(ideology) 경도, 매카시즘 책동, 사적명리 집착, 과거사 정당화 등에 휘말려 역사왜곡을 사실로 믿는 국민들과, 그렇기를 바라는 부류들이 적잖은 실상을 간과치 말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에 대한 일련의 왜곡현상을 일으키는 근본원인이다.

 

따라서 '5·18민주화운동'(민주혁명)의 명확한 역사적 사실을 적시, 공표하여 국민의 '역사의식' 정립과 홍보·교육은 물론, 효과적인 정책대안을 강구해야 한다(앞에서 광주민주항거의 전개과정을 살펴본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아울러 세간에 오랫동안 떠도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왜곡을 기정사실화하여 폄훼, 모독한 망언이 국회의원의 입에서 발설된 사실에 대해서는 관련법 제정과 동시에 주저치 말고 단호히 엄단에 처해야 마땅하다.

 

국민대표자인 국회의원의 그런 인식, 발설은 조작·왜곡된 역사에 대한 '공적인정'으로 오인할 가능성이 농후하고, 이를 확대재생산(기정사실화)할 위험성이 대단히 크므로 해서다. 또한 5·18민주화운동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거나 정치화를 획책하는 부당한 작태를 막기 위한 법제정이 다시금 말찬치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독일의 '홀로코스트 부정 처벌법'의 정신과 취지를 면밀히 검토하여 전범삼기를 제언한다.

 

그런 까닭은, 형법 제130조 제3항 "국가사회주의(나치) 지배 하에서 범하여진 국제형법 제6조 제1항에서 규정된 종류의 행위를 공공의 평온을 교란하기에 적합한 방법으로 공연히 또는 집회에서 찬양, 부인, 경시한 자는 5년 이하의 자유형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 독일은 이 법조문과 같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부인, 부정하는 이른바 '아우슈비츠 허위'로부터 '홀로코스트 부인'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광주시민의 항쟁은 앞서 전개과정에 언급했듯이 '민주주의 구현,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민중봉기였다. 아울러 한국 현대사에 있어 최초의 무장항쟁이었으며, 반독재투쟁·민주화운동의 시발점, 시원(始原, 1987년 6·10민주항쟁의 근원)이라는 대단히 큰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광주민주항쟁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갖가지 양태의 '폭동설'의 목적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신군부의 군사쿠데타(반란)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술책이라는 것쯤은 삼척동자라도 알 만한 사실이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는,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다"(김대중, 노무현) 이 발언은 전두환 일당의 광주폭동에 대한 언명을 합성, 조작한 영상을 통해 유포되었다. 하여, 명명백백한 역사적 사실로서 광주민주항쟁은 시민에 의한 민주화운동이었으며, '신군부 세력이 주도한 폭동이다' (서울고법 96노1892사건 판결문) 무엇보다 확실한,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은 신군부가 광주항쟁 이전에 헌정질서를 파괴한 쿠데타(군사반란) 세력임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결론심아 이를 해석컨대, 광주시민의 항쟁은 유린 당한 헌법정신을 정립하고 훼손된 민주민권을 회복하기 위한 국민저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연하거니와, 5·18민주화운동은 아시아 '민중혁명'(popular revolution)의 효시인 동학농민혁명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은 3·1독립혁명(날짜에 불과한 '3·1절'을 개칭해야 한다), 4·19혁명으로부터 발원하였다. 그리고 다시 6·10민주항쟁, 11·12민주시민혁명으로 면면이 이어진 도도(滔滔)창창(蒼蒼)한 민주주의 역사의 물줄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갖은 시련과 역경, 그 고난과 고통을 견디어 이겨낸 끝에 기필코 민주주의를 쟁취한 위대한 대한민국의 '주체적 민주시민'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러한 무한한 자부심과 용기로 모든 사설과 역사왜곡을 단호히 배격하고 사명의식과 실천의지를 다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민주시민혁명'을 성공적으로 완결시키는 데 진력함으로써 '5·18민주화운동'의 지대한 역사적 의의를 구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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