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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던 丹心' 태극기 휘날리며 '독립군가' 울려퍼지는 신채호 선생 순국 83주기 추모식

"작은 손에 잡은 태극기 휘날리며.. 노래로 추모하며 숭고한 애국심 본받고 기리겠습니다."

정현숙 | 기사입력 2019/02/21 [16:10]

'뜨거웠던 丹心' 태극기 휘날리며 '독립군가' 울려퍼지는 신채호 선생 순국 83주기 추모식

"작은 손에 잡은 태극기 휘날리며.. 노래로 추모하며 숭고한 애국심 본받고 기리겠습니다."

정현숙 | 입력 : 2019/02/21 [16:10]

'단재 신채호 83주기' 태극기 손에 든 어린이들의 가슴 뭉클한 '독립군가'노래

 

역사어린이합창단이 '단재의 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 순국 83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단재 선생은 민족사학자이며, 언론인이자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우리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리고 21일인 오늘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차가운 뤼순(旅順)감옥 바닥에서 56세로 옥사 순국한 83주기가 되는 날이다.

 

21일 11시 서울 용산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신채호 선생 순국 83주기 추모식이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유인태) 주관으로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 및 회원, 유족, 시민 등 400여 명이 참석했다.

 

유인태 상임대표는 헌사를 통해 "83년 전 오늘, 그러니까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 당신께서는 저 뤼순 감옥 차디찬 옥탑 방에서 뜨거웠던 한 생애의 마지막 숨결을 고요히 거두어 드렸다"고 말했다.
 

이어 "감옥 울타리 너머 가까운 여관방에는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와 아들이 일제의 방해로 임종도 하지 못한 채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면서 "그때 차마 그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었을 당신의 마지막 분노를 기억하고자 오늘 저희들은 또 이 자리에 모였다"고 강조했다.

 

"83년 전 그날도 지금처럼 시나브로 봄이 오고 있었다"면서 "나라를 빼앗기고 이국땅을 떠돈 지 26년 그 누구보다 꼿꼿하고 불꽃처럼 뜨거웠던 한 사내의 열정이 온기가 되어 그리운 조국 산천에도 필시 봄이 오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옥방에서도 저 찬란한 미래의 조국에 대한 열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면서 "그러나 부끄럽게도 우리는 당신의 투쟁과 저 찬란한 역사 앞에 정녕 부끄럽지 않은 후예인가를 수없이 되묻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이 말한 후 "다행히도 남북으로 갈라졌던 나라가 서로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면서 "우리의 숨통을 조이던 숱한 외세로부터 스스로 우뚝 서고자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가고 또 달려오고 있다. 머잖아 당신이 그토록 열망했던 희망찬 나라도 이루어질 것"이라면서 헌사했다. 
 
도종환 문화체육부장관은 추모사를 통해 "민족의 자주와 해방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위대한 민족의 스승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순국 83주기 추모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면서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는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고 하셨다."
 
"이것을 민족의 자아로 확대하면 '민족적 아'와 '반민족적 자아'의 투쟁이라고 할 것이다. 반민족적 세력과 민족적 세력의 끝없는 투쟁이 계속된다. 지난해까지도 어제까지도 투쟁은 계속되어 왔고 3.1절 100년을 맞고 있는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권이 교체되어도 반민족적 세력은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고 또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반민족적 중심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면서 "아와 비아의 투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저는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추모식은 국민 의례에 이어 내빈소개, 단재선생 약력 보고, 헌사와 추모사 등으로 이어지면서 역사어린이 합창단의 노래로 피날레를 이루고 헌화로 끝맺음을 했다. 특히 역사어린이 합창단 20여 명의 앳된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단재의 노래'와 '독립군가' 합창이 울려 퍼질 때는 더욱 숙연한 마음으로 가슴이 뜨거워 지면서 뭉클해졌다.

 

 

불굴의 항일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가 걸어온 짧고 굵은 생애
 

단재 신채호 선생은 한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서훈됐다. 그의 유명한 어록들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등이 있으며, 남에게 고개 숙이는 것이 싫어 옷이 다 젖어도 똑바로 서서 세수한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1880년 지금의 대전 중구 어남동에 속하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의 진외가(外家)에서 출생한 선생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그의 아이 때의 이름은 '채호(寀浩)'였는데 나중에 '채호(采浩)'로 개명했다. 8세가 되던 1887년 부친상을 당한 선생은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했다.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이곳에는 선생을 기리는 묘역과 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할아버지가 차린 사숙에서 한학 교육을 받았던 선생은 10대 때 이미 사서삼경을 독파해 신동이라고 불렸다. 19세가 되던 해에는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후 백암 박은식 선생에게서 진보적인 유학경향을 접하게 된다. 유교문학의 한계를 깨달은 선생은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된다.


단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이승만의 외교독립론과 미국의 위임통치 주장을 비판하며 임정을 탈퇴,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해 활동하며 역사서 연구에 몰두했다. 몇 년 전 크게 인기를 끈 영화 ‘암살’과 ‘밀정’에 등장해 관심을 끈 의열단의 단장 약산 김원봉이 단재를 찾아와 아나키즘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론을 정립해 달라는 요구로 쓴 선언문이 바로 ‘조선혁명선언’이다.

 

신채호는 1923년 김원봉과 만나 의열단 활동에 뛰어들었다. 일제 고위 관료와 친일파 암살, 일제 통치기구 파괴 등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의열단으로서의 삶은 더욱 위험하고 안정적이지 못했다.

 


단재 친필.한국학중앙연구원


1905년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됐으나 관직에 관심이 없던 선생은 위암 장지연 선생의 초빙으로 '황성신문'에 논설기자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언론활동을 시작했다. 1906년에는 영국인 베델 선생이 사주로 있는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진이 됐고, 일제의 침략 정책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자유롭게 비판했다.

 

논설기자로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은 주필이 됐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일본의 삼대충노', '서호문답', '영웅과 세계' 등 애국적 계몽논설과 사론을 집필하고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 역사물을 연재했다. 글을 통해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셈이다.

선생은 언론활동뿐 아니라 여러 활동에도 직접 참여했다. 1907년 안창호 선생이 만든 신민회 창립위원으로 참가했으며,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족경제수호운동인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선생이 애국계몽사상가로서 보다 확고한 위치를 다지게 된 것은 민족역사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다. 선생은 민족사적 영웅들의 전기를 통해 국가 위기의 상황에서 제2의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을 고대하는 민족자존의 방도를 강구했다.

 

선생은 국권회복에서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국민의 애국심을 일으키기 위해 새로운 민족주의적 역사를 저술했다. 이때 만들어진 게 '독사신론'이다. 한민족을 주인공으로 역사를 체계화한 것으로, 일제의 식민주의 역사관을 거부하고 자주적이며 실증적인 한국고대사를 재구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10년, 더 이상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신채호 선생은 안창호, 이갑, 이종호 선생 등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는 중국 산동반도의 청도에서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김학만 선생 등이 설립한 권업회의 기관지, '권업신문'이 창간되자 이 신문의 주필로 취임해 활동했다. 

국외의 망명지도자들이 대동단결선언과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할 때 선생 역시 두 선언서에 서명했다. 이후 상해로 가서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의 모임에 참가하기도 했다.

 

선생은 그 후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밝히는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이 선언은 국내외 동포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독립사상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


평생 독립을 위해 힘쓰던 선생은 1928년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가 국제 위폐 사건에 연루되면서 체포됐고, 뤼순(旅順)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옥사 순국했다.

 

선생은 봉건 유생에서 자강 운동가로, 자강 운동가에서 민족주의자로, 다시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전환하면서 자기 발전을 부단히 꾀했다.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서,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하는 과정에서 사상적 전환을 한 것을 보면 퍽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로, 치열하게 짧고 굵게 살아온 불굴의 독립운동가요, 언론인이며 사상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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