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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산지 위키리크스엔 “이명박 ‘뼛속까지’ 친일·친미” “최태민, 박근혜 홀린 라스푸틴”도 있다!

어산지 망명 중 영국서 체포, 주진우 기자 "진실향해 고단한 길 걷는 어산지에 경의, 건강하세요“

고승은 기자 | 기사입력 2019/04/12 [18:49]

어산지 위키리크스엔 “이명박 ‘뼛속까지’ 친일·친미” “최태민, 박근혜 홀린 라스푸틴”도 있다!

어산지 망명 중 영국서 체포, 주진우 기자 "진실향해 고단한 길 걷는 어산지에 경의, 건강하세요“

고승은 기자 | 입력 : 2019/04/12 [18:49]
▲ 주진우 기자와 줄리언 어산지.     © 주진우 기자 페이스북

[저널인미디어 고승은 기자] “줄리언 어산지가 체포됐습니다. 그는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들을 공개한 후 영국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망명자로 살았습니다. 사실 구금된 7년 동안도 감옥이나 다름없었죠. 진실을 향해 고단한 길을 걷는 어산지에게 경의를..... 브래들리 매닝과 에드워드 스노든에게도. 줄리언, 건강하세요!“ (주진우 기자)

 

지난 2010년 ‘위키리크스’를 통해 각국 정부와 다국적 기업의 비윤리적 행태가 담긴 비밀문서를 폭로해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줄리안 어산지가 11일(현지시간) 영국에서 체포됐다.

 

어산지는 지난 2010년 당시 이라크에서 미군 정보 분석관으로 복무한 브래들리 매닝으로부터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관련 문서 및 국무부 기밀문서 등 약 70만건을 건네받아 자신이 만든 위키리크스 사이트를 통해 공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 자료들을 폭로한 혐의로 미국 정부는 어산지를 ‘반역자’로 규정해 공개 수배했다. 특히 지난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어산지를 공개비난 한 바 있다.

▲ 위키리크스는 힐러리 클린턴 관련 내용들을 폭로하기도 했다.     © 연합뉴스TV

어산지는 미 대선을 앞둔 2016년 8월, 러시아 정보기관이 해킹한 민주당과 클린턴 후보 진영의 내부 문건을 폭로한 바 있다. 이는 클린턴 후보가 트럼프 대통령에 패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자 당시 트럼프 후보는 선거 유세에서 어산지를 공개적으로 칭찬한 바 있다.

 

한국과 미국의 외교비밀도 어산지에 의해 공개됐다. 2010년 25만건의 미 국무부 외교 전문이 위키리크스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는데, 1966년 10월부터 2010년 2월까지의 외교 전문에는 한국 관련 문건도 다수 포함됐다.

▲ 이명박이 ‘뼛속까지 친일, 친미’라고 한 이상득 전 의원의 얘기, 버시바우 대사에게 했다고 한다. 이를 위키리크스가 공개했다.     © 다음 기사

특히 주목되는 내용 중엔 이명박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이 2008년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와 만나 이명박에 대해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라고 말했던 사실과 “박근혜는 ‘한국의 라스푸틴’인 최태민과 연관되어 있고, 최태민은 박근혜의 인격 형성기 동안 몸과 마음을 완벽하게 통제했다”는 버시바우 대사의 또 다른 문건이 이 때 공개됐다. 최순실의 부친인 최태민과 박근혜가 오래 전부터 매우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또 증명해준 셈이다.

 

라스푸틴은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말기의 요승이다. 그는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의 아들 알렉세이의 혈우병을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치유한 후 황제와 황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면서 황후의 총애를 받아 ‘비선실세’로 국정을 농단했다. 자기 측근들을 요직에 줄줄이 앉히곤 했으며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외신에서도 최태민과 최순실을 ‘한국판 라스푸틴’에 비유하기도 했다.

▲ 박근혜와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 그들의 긴밀한 인연은 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 MBN

한편 위키리크스는 소위 ‘아랍의 봄’에도 적잖은 역할을 했다. ‘아랍의 봄’은 2010년 12월 튀니지의 자스민 혁명부터 시작해 2011년 절정을 맞았다.

 

어산지는 2010년 벤 알리 튀니지 당시 튀니지 대통령 일가의 부패상을 공개했다. 민중 봉기로 알리 대통령이 축출되자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첫 번째 위키리크스 혁명”이라고 평가하고 나섰다. 이런 혁명의 열기는 인근 이집트와 리비아 등으로 퍼져 호스니 무바라크와 무아마르 카다피 등 수십년간 철권통치를 일삼던 독재자들을 몰아내는 데 역할 했다.

 

그러나 이집트에선 다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리비아는 나라가 동서로 분열되는 등 여전히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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