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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곳곳에 심어 놓은 일제의 밀정 공작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서훈까지 받은 밀정들의 암약.. 버젓이 현충원에 안치 서훈 취소해야

정현숙 | 기사입력 2019/08/21 [09:05]

"상해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곳곳에 심어 놓은 일제의 밀정 공작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서훈까지 받은 밀정들의 암약.. 버젓이 현충원에 안치 서훈 취소해야

정현숙 | 입력 : 2019/08/21 [09:05]

일제의 집요하고 끊임없는 밀정 포섭.. '임시정부 와해 전략'

KBS 시사기획 창 '밀정' 2부.  20일 방영된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화면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가 보기에 '반드시 사라져야 할 암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대한 독립운동의 거목들의 주변에는 늘 밀정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통치를 하는데 눈엣가시였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일제는 임시정부를 파괴하기 위해 곳곳에 밀정을 심어 놓고 갖은 술수를 써 공작을 펼쳤다. 백범 김구 선생이 경무국장을 맡았던 임시정부 조직 안에도 밀정이 있었고, 약산 김원봉 선생의 바로 옆에도 밀정이 붙어 있었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항일 무장 독립운동가로 선봉에 섰던 약산 김원봉 선생은 월북 이후 행적 논란으로 서훈을 받지 못했는데 그의 밑에서 의열단이 일으킬 회의 정보와 거사 정보를 일본에 낱낱이 밀고했던 악랄한 밀정 김호는 건국훈장까지 받고 독립유공자가 된 참담한 현실을 보여줬다.

 

20일 밤 방송된 KBS 시사기획 창’ ‘밀정 2부 – 임시정부를 파괴하라에서는 지난주 1부에 이어 제목 그대로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제가 밀정을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와해 시키기 위한 치밀한 공작을 다뤘다.

 

1919년, 독립을 향한 조선인의 뜨거운 열망은 상해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 깜짝 놀란 일제는 더 많은 밀정을 투입해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한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독립운동가를 밀정으로 회유하는 전략을 세운다.

 

그 전략의 선봉에 있던 사람은 1918년부터 2년간 조선군 총사령관을 지낸 '우쓰노미야 다로', 사이토 총독에 이은 2인자로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군 최고 지휘관이다.

 

우쓰노미야는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밀정으로 포섭하는 전략을 택했다대표적 사례가 범재 김규흥이다김규흥은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어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까지 받은 인물이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직후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는 김규흥을 다섯 차례 만나 만찬을 함께하며 포섭에 들어간다밀정비를 지급하며 마음을 사려 했고, "임시정부를 파괴"하고 "독립운동가를 회유"하라는 임무를 김규흥에게 내린다.

 

그의 공작 과정은 그가 남긴 일기에 고스란히 적혀있다. 그는 '배일거두(排日巨頭)', 즉 유명 독립운동가를 집으로 불러들여 수차례 밀정으로 회유한다. 노모에게 선물을 사주라며 100엔을 주기도 했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어림잡아도 수백만 원 이상의 거금이다. 

 

김규흥과 우쓰노미야의 이 같은 부적절한 만남은우쓰노미야가 남긴 일기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그동안 학계에서도 이를 근거로 김규흥의 친일 논란이 있었다KBS 탐사보도부는 김규흥이 1919년 말 상해로 돌아간 뒤우쓰노미야 사령관에게 실제 두 차례 편지를 보내 상해임시정부 상황을 세세히 보고한 사실을 처음 확인했다. 그의 친필 편지로, 한국에 공개되는 건 처음이다.

 

김규흥은 편지에서 조선과 일본이 하나임을 뜻하는 '일선융화'를 역설했다. 또 상해임시정부의 동향을 보고하고, 거액의 돈을 요청하기도 했다.

 

김규흥이 우쓰노미야에게 보낸 편지. KBS

 

"우쓰노미야 사령관 각하에게."

 

"상해임시정부는 200명이었으나 대부분 귀국하고, 현재 남은 사람은 60명입니다. 이중 극렬분자는 40명에 이릅니다.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선 20~30만 엔이 필요합니다."

 

"김달하와 함께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을 북경에 모아서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계책을 갖고 있습니다. 활동비로 김달하에게는 3만 엔, 저에게도 2만 엔을 주시길 바랍니다."

 

훗날 밀정으로 밝혀져 처단된 '김달하'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밀정 김달하와의 긴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활동이 소문났는지, 자신이 의심받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함께 전한다.

 

"상해에 있는 단원들로 인해 때때로 강박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밀활동이 드러나 난처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잠시 다른 곳으로 피신합니다."

 

밀정으로 포섭된 것으로 의심되는 김규흥. KBS
우쓰노미야 다로 조선군 총사령관(1918~1919)

 

김규흥은 편지에서 △상해임시정부의 세력이 점차 위축되고 있다는 점과 이른바 '극렬분자'가 40명 정도로 분류된다는 점, △(훗날 밀정으로 드러나 독립운동 진영에게 처단된) 대표적 밀정 김달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회유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전하고 있다.

 

상해 일본 총영사관은 끊임없이 밀정을 생산해 내는 이른바 '밀정 공장'이었다. 집요하게 임정 내부에 밀정을 침투시켰고 김구 선생의 경호원까지 밀정으로 포섭했다. 세 차례에 걸쳤던 김구 선생 암살 시도. 모든 공작에 일제는 밀정을 동원했다.

 

가운데 앉은 분이 백범 김구 선생이다. KBS

 

의열단을 조직해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선 약산 김원봉 선생, 1926년 작성된 일본 기밀문서를 보면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함께 한구로 왔고, 김원봉은 북경을 거쳐 광둥으로 향했다."면서 "상해 프랑스 조계 31공학에서 의열단 총회가 개최될 것이다. 참석자는 40~50명이다"라고 적어 사무실 위치는 물론 행적 하나하나 철저히 비밀이었던 의열단의 내부 정보가 밀정에 의해 누출됐다.

 

문서에 적힌 밀고자는 의열단원 김호, 본명 김재영으로 의열단과 청년동맹회에 참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김원봉 선생의 후손은 의열단 동지가 밀정이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김태영/김원봉 선생 후손은 "굉장히 놀랐어요. 밀정이라는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그런 짓인데 기막힌 일이죠, 말이 안 되는 얘기죠."라고 말했다.

 

요즘 영화 '봉오동 전투'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백두산 호랑이'로 불렸던 명장 홍범도장군도 당시 '봉오동 전투'를 앞두고 결의를 다지고 있을 때 어김없이 일제가 심어 놓은 밀정의 마수가 뻗쳐 있었다. '봉오동 전투'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와 함께 항일 무장 투쟁의 빛나는 금자탑이다.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가 있기 10년 전부터 지속적인 일제의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1912년 작성된 일본 기밀문서, 밀정이 된 홍 장군의 부하가 밀고한 내용이다.

 

"홍범도는 러시아 말을 타고 있다. 완장에는 붉은색 선 두 줄이 둘러져 있고, 견장은 청색이며 '통령감'이라고 적었으며 "홍범도가 사는 곳은 혜산진 대안 일리에서 약 30리 떨어진 신약수동이다."

 

한국에 은밀히 파견된 홍범도 부하들의 구체적인 신상정보까지 낱낱이 담겨있어 충격을 주고 있으며 밀정은 독립운동을 와해시키려는 일제의 핵심 전략이었다.

 

100년 전 당시에는 이 같은 신상정보들이 독립운동가 검거에 긴요한 자료가 됐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일제는 또 홍범도의 부하(원상학, 표창순, 김한보 등)들이 일제강점기 한반도 상황을 은밀히 알아보기 위해 조선으로 침투했다는 사실과, 이들의 신체적 특징까지 파악했다. 일제의 집요한 정보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KBS 탐사보도부가 일본과 중국의 기밀문서 5만장을 장기간 분석한 결과  찾아낸 밀정 혐의자만 895명으로 이들의 이름을 지난 방송에서 공개했다. 앞서 상해 임시정부의 정황을 낱낱이 일본군 사령관에게 밀고한 김규흥과 도산 안중근 의사의 동지 우덕순, 김좌진 장군의 비서 이정, 의열단장 김원봉의 부하로 있으면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김호 등이 현재 독립유공자로 분류돼 현충원에 버젓이 안치되어 충격을 준다. 

 

현충원에 독립유공자로 안치되어 있는 밀정 김규흥의 묘. KBS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밀정.. 서훈 취소는?

 

김규흥과 우덕순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독립운동가였다가 일제에 밀정으로 포섭되어 해방 이후에는 밀정의 기록은 다 지워지고 다시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받아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형편이다.

 

특히 과거에, 그러니까 1960년대의 경우에는 서훈 심사가 더 부실했었고, 친일 청산도 제대로 되기도 전에 한국전쟁을 맞았기 때문에, 이런 사례들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또 2000년대 이후 일본 자료가 더 많이 공개되면서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 알려지게 된 측면도 있다.

 

이들 밀정 가운데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광복 이후에 사회적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도 적잖이 알려져 있다. 밀정의 경우 첩보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해방 이후 신분세탁을 통해 군과 경찰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갔다는 사실은 학계에서도 인정하는 편이다. 그러나 밀정의 특성상 가명을 여러개 쓰고 말 그대로 암약했던 존재기 때문에, 누구라고 특정하기가 쉽진 않아 계속 추적 중이다.

 

일제가 밀정에게 상당한 액수의 비용을 지급했는데 처음부터 밀정으로 고용돼 고정적으로 월급 받고 일한 밀정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한 사람들로 두 부류로 나뉜다. 어떤 의미에서는 동지로 잠복하면서 변절한 후자의 폐해가 더 크다고 볼 수도 있다.

 

일본 기밀문서를 보면 이들이 얼마나 치밀했는가를 엿볼 수가 있다. 고용한 밀정이 믿을 만한 사람인가를 계속해서 확인하고, 그렇게 판단될 때 확실한 어조로 해당 정보를 승인해주고 대가를 치르고 있다.

 

밀정의 정보로 일제가 작전을 벌여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한 대표적 사례로 김좌진 장군의 최측근 비서로 있으면서 밀정으로 암약했던 이정의 밀고 내용을 보면, 독립군의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이홍래 선생이 교묘하게 변장해서 어디어디를 돌아다니면서 어떤 방식으로 돈을 모으고 있다고 세세하게 밀고하고 있다.

 

이정의 밀고가 있고 나서 한 달 뒤에 이홍래 선생은 일제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밀고했던 이정과, 밀고 대상자였던 이홍래 선생의 위패가 현충원에 나란히 안치돼 있는 씁쓸한 현실이다. 부실한 서훈 심사에 대한 지적이 잇따르면서 가짜 독립유공자를 둘러싼 논란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 밀정을 추적하는 것은, 친일청산의 의미로도 읽히면서 서훈 취소로 가야 마땅하다는 여론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훈장을 주는 것보다, 줬던 훈장을 취소하는 게 현실적으로 더 어렵다는 데 있다. 그러나 학계 전문가들은 이번 밀정 취재를 높이 평가하고, 탐사보도부에서 장기간 추적해 확보한 자료가 워낙 구체적이어서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KBS 보도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아직까지는 원론적인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니까 독립유공자들에 대해서 과연 근거가 있는지 조사를 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당초 1차 발표 시점이 7월이었는데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고, 관련 취재를 해보면 난관이 많은 입장이다. 예산, 인력, 전문성, 많은 측면에서 문제가 있어 보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보훈처의 적극적인 대처가 더욱 필요해 보이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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