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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민족분열의 원흉인가? 애국자인가? 사이비 교주인가? 깽 두목인가? (1):서울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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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민족분열의 원흉인가? 애국자인가? 사이비 교주인가? 깽 두목인가? (1)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1/07/07 [12:03]

이승만은 민족분열의 원흉인가? 애국자인가? 사이비 교주인가? 깽 두목인가? (1)

서울의소리 | 입력 : 2011/07/07 [12:03]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축출 된 것은 논문 때문입니다.
 
그의 논문은 미국이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에 관한 논문으로 미국이 한국을 신탁통치 해달라는 논문이었고, 이에 격분한 임시정부에서는 만장일치로 그를 탄핵 했지만 이승만은 나는 대통령 이므로 너희들의 탄핵은 인정 할 수 없다 며 무시하자, 신채호 선생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다면,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격분했다고 합니다.
 
또, 전명운 장인환의사에 대한 이야기는 더 있습니다. 우선 교민들은 전명운 장인환의사를 구명하고자, 당시 하와이 바나나농장 에서 어렵게 일한 동포 들이 정말 목숨 같은 돈을 모으게 됩니다. 애국지사를 죽일 수 없다는 애국심'에서 동포애가 발휘된 것입니다. 그러나 동포들 중 아무도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가 없었고, 황색인종을 도와줄 백인은 없었습니다. 다행이 하버드 석사'요, 프린스턴 대 철학박사인 이승만을 찾아갔고, 이승만은 수락합니다.
 
그러나 1등급 호텔에서 자신이 머물게 해달라는 현실에 맞지 않는 조건을 내세워 교민들은 모금한 그 피 같은 돈으로 그의 조건을 들어 줍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쓸데없는 곳에 돈만 쓰고 시간만 허비하다, 마지막엔 나는 살인자를 변호하는 통역은 할 수 없다! 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칩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행위에 망국의 한을 품은, 교민들을 타국 땅에서 믿었던 이승만 땜에 또 한 번 피눈물을 흘리며 나라 없는 절망에 땅을 치며 통곡을 해야만 했습니다. 

▲     © 서울의소리
1904년 민영환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온 이승만은 1905년,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그의 포부는 남달라 미국사회에 유명 인사들과 교류를 위해 틈나는 대로 편지와 메모로 자신의 입지를 폭 넓게 굳힌 것 같다. 그것은 테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조그만 동양의 고학생이 만났다는 사실에서 입증되며, 후에 2차 대전의 영웅 맥아더를 만난 사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가 5년 만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함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한 그가 천재적 기질을 갖고 애국을 한 사실은 1904년 이전 1898년 정부전복을 꾀한 죄목으로 투옥됐다가 민영환에 의해 미국으로 유학 온 것 외엔 뚜렷한 것이 없다. 1908년 3,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 장인환의사가 미국인 친일파 스티븐슨을 살해했을 때 이승만은 이들의 법정통역을 살인재판으로 명명하고 무참히 거절해 버렸다. 그리고 안중근의사의 의거도 테러로 간주하고 맹비난했는데, 어떤 이유에서 일까?

1,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그는 교육과 선교활동에 뜻을 밝힌 것으로 보아, 종교적 문제로 거절했을 수 있고,

2. 자신의 외교적 입지를 곤란하게 하므로 통역을 거절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던 거절을 함으로써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사회에서 자신과 테러를 차별화시키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럼, 그는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사회에서 어떤 외교활동을 펼쳤을까? 미국 외에 접촉한나라는 몇 나라나 될까? 전혀, 소득의 결과가 없다. 그는 하와이 로건너와 박용만이 이끄는 국민회를 장악하고 법정투쟁을 벌리는데 이는 나라를 위함이 아니요,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든든한 친위대를 양성시키는 수순이었을 뿐이었다.


▲     © 서울의소리

$$ 이 승만 의 야심 과 비열한 욕망 $$

그의 야심이 드러난 것은 1919년 3월 1일 고국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3. 1운동이 일어나자 그를 따르는 교민들을 규합하여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한인대회의 발언이었다. 그는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뒤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독립운동을 획책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한국독립은 국제연맹에 청원서를 내고 위임통치를 받은 후에 해야 할 일이며, 독립이 된다면, 반드시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표방할 것이라고 역설을 하며 가장 양심적 평화를 사랑하는 박애주의자처럼 2박 3일간 미국각지에서 몰린 교민들을 기만하며 치렀다.
 
이 날 이승만은 미국의 신화 같은 초대대통령 워싱톤이 앉았다는 의자에 앉아건방을 떨며 새한국의 초대대통령이 자신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며 대통령 취임식 까지 했다. 이때는 이미 임시정부의 직함인 국무총리 직을 박탈당하고 퇴출당한 아무것도 아닌 신분인데도 임정의 대통령 직함을 그냥 사용했다. 이것은 분명한 사기인 것이다. 마치 그의 행위는 그리스신화의 기회의신 카이로스를 연상 시켰다.


▲ 1919년 3.1절을 기화로 미국 필라델피아 에서 열린 한인대회의 이승만과 그가 규합한 순진한 교민들. 몇 안 되는 이들을 모아놓고 대통령 취임식을 했다.     © 서울의소리
▲ 죠지 워싱톤의 의자와 그 의자에 앉은 이승만     © 서울의소리
$$1918 년"국민군단"과 박용만 사건 $$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 태생으로 일본 동경으로 유학, 1904년, 보안회 에 입회하여 일본의 개척권 요구 에 항거하는 운동에 참여, 한성감옥에 투옥됐는데 그는 그 감옥 안에서 이승만과 운명적으로 만나 결의형제가 되었다. 1904년 출옥한 박용만은 이승만과 동일시점에 미국으로 출국하여, 1906년 헤이팅스 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고 1909년 네브라스카 에서 한인소년병 학교를 설립하였다.
 
1911년 신한민보의 주필을 거쳐, 1913년 하와이로 와서 신한국보의 주필이 되었다. 그는 군대를 양성해 일본본토를 공격해 독립을 이룩하자! 고 외쳐 교포사회에 감동을 일으켰다. 교포들의 감동으로 그는 1913년 6월11일 하와이 호놀룰루시의 큰 산 너머 코올라우(Koolau)구역 아후이마누에 위치한 파인애플 농장(1360에이커)에 대조선군단이라는 독립군을 창설하였다. 그는 생도들에게 낮에는 일을, 밤에는 군사훈련을 시켰다. 애국심에 독립이란 감동이 더해져 교포사회의 지원은 상상 이상이었다.
 
박용만은 1차적으로 하와이 항 에 정박 중인 일본함정 츌운호를 격침시키는 목표를 세웠는데, 때를 같이해 이승만은 하와이의 독립운동 자금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백인우월주의에 돈 없는 황색인종이 무슨 방법으로 외교를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로지 돈의 힘이었다. 그는 미국본토에서 박용만'의 대의에 참여와 협조를 빙자해 하와이로 건너 와, 그곳애서 교육 사업으로 학교를 세워 역사와 세계사를 가르치고 교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를 기억하는 교포들의 증언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그는가는 곳마다 분열'과 대립의 상징이었으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증언 했다. 신앙에 있어서는 자신이 믿고 만든 교회와 감리교중 하나만 선택하라며, 교회를 분열 시켰으며, 이것은 자신이 세운 자신의 우상화 종교를 믿고 자기를 추종하는 사제가 되라고 강압적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이는 박용만과 대조선국민군단의 와해를 획책키 위한 고도로 기획된 야비한 이승만 식의 전략이었다. 급기야 이승만파와 박용만'파로 갈리어 분열 됐는데,


▲ 이승만은 하와이교포들사이에 반목과 적개심을 불러 일으켜 서로 앙숙이 되게 철저히 양극화 시켰다.     © 서울의소리

분열된 하와이교포들은 반목과 적개심을 불러 일으켜 서로 앙숙이 되게 이승만은 철저히 양극화 시켰다. 하와이 교민 1세대들은 분열로 인한 큰 고통의 상처로 남게 되었고 이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이라는 걸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 KBS에서 어렵잖게 취재한 증언을 들어보자.

▲     © 서울의소리

 
 
 
 
 
 
 
 
 
 
 
 
 
 
 
 
 
 
 
 
 
 
 
 
 

$$ 밀고성 증인이 된 이승만 $$

이승만! 이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기 보다는 평화를 빙자해 동족의 피의 대가를 자신의 업적으로 치부하는 비열하고 악랄한 무뢰한에 지나지 않았다. 평화와 외교를 지향한 그가 하나님을 앞세워 행한 일은 종교와 동족분열, 그리고 그토록 증오하던 테러리즘을 손수 자행한 장본인이었다. 또, 그는 증인이 아닌 밀고자로 전락하는데........국민군단의 위용이 나날이 높아지자, 주미 일본영사관 에선 어찌 알았는지? 미국국무장관에게 한국인의 군사훈련에 항의를 하여 무기불법 소지 문제로 교민의 대표인 박용만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이승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때 이승만이 증인으로 나와, 박용만이 미국영토에 군사학교를 설립한 것은 하와이에 정박 중인 일본군함 츌운호를 격침시키기 위함이며, 미국과 일본 사이에, 사변을 일으켜 양국 간 외교를 깨려하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진술했다. 그로인해 박용만은 유죄판결을 받아 몰락하고 대조선 국민군단 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승만은 눈엣가시 같은 박용만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하와이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박용만을 추종하던 애국심에 불타는 사람들은 동조를 거부하자, 본격적인 테러와 폭행을 감행했으며 총기난사 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승만의 증언은 밀고성 고발이며 결의형제의 결속을 배반하고, 교포사회의 애국심을 무참히 짓밟은 반역행위였다. 어떠한 변명과 구실도 대신할 수 없는 선택이었으므로, 굳이 변명을 한다면, 이는 마치 씨저를 살해한 브루터스의 웅변과 같을 것이다. 하와이와 같은 좁은 땅에서 외교를 위한 동족을 범법자로 만든 파렴치한 짓이었고, 개인의 야심에 애국심을 뭉개버린 그의 독선적인 욕망의 극치였다. 그의 테러행각은 오늘날 잘 포장되어 애국과 한국의 국조 로, 모래위에 누각처럼 서게 됐다. 그를 옹립한 뉴라이트의 공로다.

 $$ 대 조선군단의 해체와 박용만의 몰락, 그리고 이승만의 교민 테러 $$





▲     © 서울의소리

▲ 사진에 보이는 빽속에 야구배트가 있는걸 보아 폭행직후"기념촬영"을 한 것 같다.     © 서울의소리
동시대에 시카고 에서 악명을 높이던 이태리계 깽두목 알 카포네와 다를 게 무엇인가? 사진에 보이는 빽속에 야구배트가 있는걸 보아 폭행직후 기념촬영을 한 것 같다. 누굴 해한 것인지? 기념사진을 찍은걸 보면, 대단한 인물에게 폭력을 가한 것 같다. 대한민국 국조의 경력치곤 너무 소름끼치게 비열하다.
▲ 좌측은 교민들에게 돈을 갈취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이다. 우측은 자랑스러운"박용만의"대 조선군단"의 훈련장면이다     © 서울의소리
이 분이 박용만 씨다. 임은 1928년 베이징에서 흉한의 습격을 받고 살해 되었다. 누가 살해했는지 명확치 않다. 1925년 베이징에서 이승만의 대통령직을 탄핵한 후 3년 뒤였다. 이들의 결의형제 맹세는 이렇게 끝났다


▲ 이승만 과 그를 지지했던 어리석은 동지회다. 이들은 같은 동족에게"테러와 총기난사를 서슴지 않았다.     © 서울의소리

이승만은 자신의 욕망을 달성키 위해"전명운"장인환"의사, 및"안중근 의사까지"살인자로 규명하고 활동시킨 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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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인 하와이교민들을 갈취한 수단들 $$

▲ 이승만은 교민들에게 돈을 각출하기 위해 공채를 발행하여 돈을 걷어 들였다. 우측엔 우표 © 서울의소리

교민들의 돈으로 귀족처럼 외교에 힘쓴다는 명목 하에 호의호식하며 직함(대통령)에 맞게 생활하는 이승만, 그러나 교민들은 사탕수수 밭이나, 파인애플 공장에서 힘들게 벌어 기탁하고 강제로 채권과 공채를 사야만 했다. 그 돈은 몽땅 이승만의 주머니로 입금됐으며 고생하는 교민들에 비해 아주 핸섬한 젠틀맨 이다.

▲     © 서울의소리
$$ 이승만의 라디오 방송의 효과와 이용 $$

1941년,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벌어지고 일본이 패망하자, 이승만에겐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것은 라디오 방송이었다. 아무런 내막도 몰랐던 고국의 동포들에게 그의 일성은 희망을 넘은 열광의 기쁜 소리였다

▲     ©서울의소리
하와이의 사정을 알 길 없는 고국의 동포들은 이승만의 라디오 소리에, 이승만은 이 나라 이 민족을 구원할 구세주 인양 대단한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그의 외교능력이 포장된 라디오 방송이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우매한 국민들은 이승만을 너무 몰랐었다. 예나 지금이나 매스컴'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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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승만을 우상화 하며 행적을 포장하는데 열을 올리는 친일사관에 젖은 노예집단들이 우리나라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 이때 임정에선 총리와 대통령직을 박탈하고 주미외교위원회 위원장에 위촉했으나, 그는 떠들지 말라 며 자칭 대통령직을 고수했다. 우리헌법 전문에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기록됐는데, 이때는 상해임시정부의 법은 절대적이었음에도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고, 떠들지 말라 고 밀어 붙였다.
 
무법자의 일방적 추태인데도, 오늘날 추종자들은 한술 더 떠 헌법전문 마저 고치려 한다. 그 첫 번째 행태가 1948년을 건국절로 명명하고 이승만을 국조로 옹립, 임시정부 역사를 대한민국과 별개의 고난의 항쟁사로 묶어, 김구,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의사를 세계적인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라덴과 동격으로 비하시킴을 당연하다고 외치고 있다. 고려대 한승조, 육사22기 紙萬圓, 박효성, 안병직, 류석춘, 복거일, 이명희등 을사5적과 같은 맥락의 인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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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영웅 맥아더의 후광 $$

해방 후 이승만의 귀국은 글자 그대로 금의환향 이었다. 해방직후 신탁통치를 위해 미국에선 하지중장이 우리나라를 통치할 때 이므로 제일 높은 사람이 하지 중장'이었는데, 하지가 이승만에게 경례를 붙이자, 한국 사람들은 전부 놀랐다

하지 보다 더 높은 사람, 이승만! 그것은 2차 대전의 영웅 맥아더 에게 편지와 메모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직위로 인간적 교우를 다졌던 터에, 맥아더의 배려로 하지에게 대통령의 예우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와 이승만과 충분한 교감이 있은 직후의 일이라 이상할 것은 없는 사실이나 그때의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알리가 없었고,
 
다만 라디오를 통해 독립을 위해 미국에서 열심히 애국한 애국자로 각인되어 있었기에 더욱 이승만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기에 충분했다. 귀국한 이승만에게 러브콜울 한 무리들은 친일파 들이었다. 하지중장의 입장에서도 통치의경험이 있는 친일파 들을 처벌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승승장구 남북단일 독립국이 아닌 남한단독정부에 열을 올려 장애물을 제거해 나갔다.
 
여운형 도 암살되고, 김구도 제거하고, 동족상잔의 비극 6.25, 장기집권에 최대난적 신익희의 돌연사, 조병옥의 위수술중 사망, 죽산 조봉암의 빨갱이 죄목으로 사형집행, 3.15 부정선거, 4.19 혁명,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 시켰는가? 4.19혁명 중, 하와이로 도주, 망명, 죽은 후 시체로 귀국, 이분을 대한민국의 국조로 모신다니……. 국민이여, 지금은 눈을 부릅뜨고 역사와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볼 때 입니다.

자칫하면, 맥아더도 제2의 국조로 섬겨질까 두려워 집니다. 이승만의 등장으로 이득을 본 집단은 친일파 들입니다. 그들은 국가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1%에 해당하는 귀족으로 그들의 권력과 재력은 국가의 명운울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역사마저 자신들의 입맛대로 고쳐, 마치 자신들이 애국의 선봉에 희생자인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내가 믿는 기독교 에 이런 무리들이 선발대라니…….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룟유다의 후예들이란 사실 앞에 어이없어 목 놓아 울분의 기도만 할뿐입니다. 과연, 이들의 행위가 성경적 일까요? 의문 입니다.

▲     © 서울의소리
맥아더가 없었다면…….이승만이 쉽게, 또 빨리 귀국 할 수가 있었을까요? 또, 민족분단이 됐을까요? 친일파의 득세가 가능 했을까요? 그리고 독재가 계속 됐을까요? 두려운 것은 맥아더를, 제 2의 국조로 섬길까 두렵습니다. 그는 한낱 전쟁 광 이었을 뿐입니다. 기독교인이 전쟁광을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이승만도 살아생전에 자신의 많은 동상을 세워 국민들에게 우상대접을 받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적 이지도 않고, 더더욱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서 오는 걸 까요? 우리나라 역사에 3명의 장로 대통령이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모두 하나님 섬기기에 실패한 대통령 같습니다. 이승만 때는 민족 분열로 동족상잔의 6.25, 김영삼 때는 I M F의 재앙, 이번 이명박 장로는 어떻습니까? 강부자 내각 광우병 소고기, 니므롯의 창조물 대운하 경제는 I M F 보다 더 심각합니다. 국가분위기는 공안정국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외교는 아부 자체 입니다. 어찌 우리의 문제를 미국에 매달립니까? 회개가 필요합니다. 내재한 개인의 욕망과 우상'을 떨어내십시오.

▲ (그리스 신화 의"제우스'의 아들"기회의신"카이로스)     © 서울의소리
앞 머리털 만 있는 카이로스, 뒷머리 털은 없습니다.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데 수평을 유지하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등엔 균형에 마지않는 큰 날개와 양 발 뒤꿈치엔 조그만 날개가 있습니다. 커브나 턴울 할 때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까? 불안전한 기회는 기회가 아닙니다. 기회처럼 보이는 함정일 뿐 입니다.
 
$$ 오만과 독선의 독재와 종말 $$

▲     © 서울의소리
우측사진은 3.15 정부통령 선거 에서 전국적으로 야당참관인을 내쫓고 투표함을 교체하여 개표를 하였는데, 여당당선표가 유권자수 보다 많아 표를 줄이는 촌극 도 연출됐으며, 부정선거가 극명해 지자 마산서 부정선거 반대운동이 벌어진 후 행방불명된 김주열 군의 시신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발견됐다. 서울 종로에선 고려대 학생들을 정치깡패 들이 집단으로 폭행하여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주동이 된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름하여 4.19혁명 이다.

오른쪽 사진은 경무대(청와대)에서 이화장으로 피신하는 이승만 일행의 사진이다. 당시 이 신문엔 4.19 혁명을 데모로 표기 했는데, 이때는 일시적 데모로 간주하고 기사를 올렸지만, 날이 갈수록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성공적 혁명이 되었다. 그것도 자랑스러운, 독재를 몰아낸 민주혁명 이었다. 그러나 2008년 현재엔 뉴라이트가 혁명이 아닌 데모라고 비하 시킨다. 꼭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다시 이시대로 회귀 하겠단 것인가?

 

▲     © 서울의소리
이 날의 혁명은 처절했다. 이때 본인은 학교를 땡땡이 치고 소공동 경남극장 에서 죤 웨인, 스잔헤아워드, 주연의 징키스칸 영화를 1회 관람을 하고 시청 앞으로 나오다 혁명대와 휩쓸려 전차를 타고 효자동 경무대 앞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경험을 했다. 6.25전쟁 때도 경험 못한 극한의 경험이었다. 총에 맞아 튀는 피! 비명조차 못 내며 쓰러 지는 학생들! 당시 고교생 이던 나와 친구는 너무 놀라 눈알이 뒤집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 현장의 참상이 여러 날 꿈속에서 나를 괴롭혔다.
 
밑에 사진은 부정선거로 당선된 부통령 리(이)기붕이 그의 장남 육군소위 이강석'의 총에, 일가족 모두 사살되고 강석은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어찌 보면 이승만 보다는 자신들의 만행을 일찌감치 깨닫고 선택한 용단이라 하겠다. 리기붕의 가족은 이랬다, 父 이기붕, 妻 박 마리아,長 男 이강석, 次男 이강욱 이었다. 원래 이기붕은 국일관 지배인 출신으로 부통령 재목이 아니었다. 항상, 허약한 체질에 용기보다는 YES MAN의 전형이었지만, 그의妻 박마리아 는 놀부妻와 같은 기질의 여인으로 한때, 정계를 시끄럽게 한 그녀는 이승만 에게 자신의 長男인 이강석을 養子로 입적시키고 李起鵬의 출세를 진두지휘 한 여인 이었다.

▲     © 서울의소리
밑에 사진은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 다. 그는 경무대 곽영주 에게 발탁되어 반공청년단, 화랑동지회, 등 반공이 들어가는 단체는 모두 연관됐으며, 주로 야당 탄압이 그 주목적이었다. 마치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펼쳤던 폭력테러 집단을, 그대로 계승한 것 같다. 옆의 사진은 경무대를 빠져나와 이화장'에서 주위동정을 살피는 이승만 이다.

▲     © 서울의소리
남산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 이동상은 시골서 서울 관광을 오면 꼭 둘러 절하며 숭배케 하던 동상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동상을 세우고 참배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닌가? 이것은 기독교적' 이지도 않고, 더더욱 성경적 이지 않다.

▲ 좌측의 검정뿔테 안경의"허정"(당시 국무총리)씨와"하와이"로 쫓겨 가는 이승만     © 서울의소리
그러나 성난 학생과 국민들은 이동상을 두들겨 부숴 버렸다. 목이 떨어져 땅바닥에 뒹군다. 그런데 뉴라이트에선 다시 세종로 복판에 이 영감탱이 동상을 또 세운단다. 경제도 어려운데 그 돈을 헐벗은 서민들한테 사용 할 것이지, 옆의 사진은 사형직전의 경무대의 작은 왕 곽영주의 사진이다. 이정재, 임화수, 등 깡패는 모두 사형 시켰다.


▲  그때 정치깡패들은 모두 잡아 시가행진을 시켰다.   © 서울의소리

▲ 이기붕의 집을 불태우는 학생과 국민들     © 서울의소리
그러나 국민이 쫓아낸 이승만은 하와이로 도망친 후 그곳에서 도 교민들에게 그리 좋은 대접은 받지 못했다 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하와이를 택했다.
▲     © 서울의소리

귀소본능 이랄까? 온갖 만행을 저질렀어도 하와이 는 그를 대통령의 발판을 만들어 준 곳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교민들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그것은 대통령이 된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가?
 
그리고 기획 없는 통치철학을 통해 동족분열과 정적 제거, 제주 4.3사건, 여순반란 사건, 6.25 동란, 44,5입사건, 3.15부정선거, 12년간 그의 정치적 행태가 말해주듯, 철권통치의 교훈이었다. 정권연장에 급급하여 온갖 해선 안 될, 민주주의의 역행하는 군주식 독재 는 그를 파멸로 이끌었고 종당엔 하와이로 도망쳐 1962년 병속에서 자신의 왕국을 회상하며 1965년 시체가 된 뒤에야 조국 땅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린 기억해야 할 것이 그의 독재로 혼란에 빠졌던 우리민족과 정치적 후퇴를 생각 안할 수 없다. 더욱이 이분을 국조로 섬기기 위해 임정을 무시하고 법과 역사를 바꾼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다.
 
각성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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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암살된 인물들 $$


▲ 좌측에"古下 송진우 선생, 1945 년 12월 30일 새벽에 "한현우(한홍건, 또는 한원률)에게 암살당함 우측은"夢 陽 여 운형 선생, 1947년 7월19일 암살됨, 한민당 白衣社 고문 金 斗 漢이 이필형에게 사주     © 서울의소리
古下 송진우 는 독립운동 보다는 친일의 흔적이 너무 많은 친일파로 1890년 전남 潭 陽에서 출생, 김병노, 최남선, 장덕수 등과 사귀며 1919년 3.1운동에 동참을 완강히 거부하며 일본의 비위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불참했다 한다.(박찬승, 충남대 교수)그런 송진우가 1936년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東 亞 日 報가 무기정간울 당하자, 자신도 동어일보를 떠났다.

그러나 1945년 8월 10일 일본 총독부로 부터 정권인수 교섭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것은 너무 많은 친일적 행태로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그는 신탁통치 결의안이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에서 통과 되여, 온 나라가 찬반 논란으로 들썩이자 한현우가 1945년 12월 30일 새벽,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암살했다.

그러나 장택상은 김구 선생이 한현우를 사주해 암살했다고 덮어씌우려 했지만, 한현우는 좌익에선 여운형 우익에선 송진우를 지목하여 암살하려 했는데, 여운형은 실패했고, 송진우는 성공했다고 진술함으로써 김구선생의 혐의가 풀릴 수 있었다. 하지만, 한민당은 장덕수의 암살건이 일어나자 김구선생을 법정에 세운다. 이 건도 무혐의 다.
 

$$ 夢 陽 여 운 형 암살 사건 $$

여운형은 1886년 4월 22일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 1909년 광동학교 설립, 1919년 上海 臨時政府, 임시의정원 의원, 1920년 高麗共産黨에가입, 1944년 朝鮮 建國聯盟 委員長, 1945년 조선건국 準備委員會 조직, 人民黨 조직, 1947년 勤勞 人民黨 조직, 여운형은 7년 전인 1940년 조카인 여경구와 日本 天皇 히로히또를 만나 朝鮮의 獨立을 역설 했다고 한다. 대단한 용기이며 담력이다. 모
 
두 엎드려 구걸하기 바쁜데, 죽을지도 모를 倭國에서 호통을 치다니, 그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과 달리 美國과 蘇聯의 信託通治를 주장했고, 민족 단일정부를 원했지만, 그의 路線은 좌파였음으로 親日派들에 의해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살해 됩니다. 이는 빨갱이가 집권하면, 모두 죽게 될 運命에 처한 친일파 들의 백색테러 조직, 白衣社의 고문 金斗漢이 한지근(본명 :李弼炯)에게 권총을 주어 射殺케 했으며 首都 警察廳長 장택상이 개입 된 걸로 27년이 지난 1974년에 밝혀짐으로써 李承晩의 하와이 실력이 발휘된 것 같습니다.

이들은 이승만을 둘러싼 100% 친일파로 大 韓 民 國 建國의 핵심세력 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나라를 팔은 자 들과 찾으려고 피 흘린 자들이 어찌 같은 하늘을 이고 살겠습니까? 우리나라의 건국은 단추가 잘못 끼워진 양복과 같습니다.

▲  박헌영과 여운형   © 서울의소리

$$ 雪山 장 덕 수 암살사건 $$

雪山 장덕수, 1947년 12월 2일 암살됨. 張德秀는 1895년(고종32년)황해도재령 출생, 1911년, 朝鮮總督府 판임관 시험에 합격하고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 政經學部를 졸업, 1920년 東亞日報 초대 主筆이 되었고, 1923년 美國으로 건너가 李承晩,許政과((3.1 민보))를 발간, 1928년 콜롬비아 대학에서 哲學博士 학위를 받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敎搜를 거쳐, 1935년 동아일보 副社長이 되었다. 1939년 親日團體인 시국 대응전선 사상보국 연맹 京城分會 제 4 분회장. 1940년, 國民總力 조선연맹 參士, 1941년, 조선임전 보국단, 準備委員, 1945년 7월에는 國民義勇隊,경성부 연합 幹部, 등으로 撤低한 친일활동을 하다 宋鎭禹, 金性洙와 한국 民主黨을 이끌었으나 친일파 정당 이란 비난을 받다. 1947년 12월 2일, 서울 鍾路 警察署 경사 박광옥, 배희범 에게 죽임을 당했다.

▲     © 서울의소리
희한한 일이 李承晩씨는 당시엔 호화로운 장덕수의 葬禮式에 얼굴을 비친 사진이 있다. 그러나 송진우, 여운형의 장례식 사진은 보질 못했다. 보관할 가치가 없어서인가? 아니면..........???? 어찌됐던 여기 모인 人士 들은 몽땅 親 日 派 들이요, 존재함으로 부담되는 사람들이다.
 
장례사를 낭독하는 분! 어디서 본 듯한 분이다, 난, 李明博씬줄 알고 깜짝 놀랐다. 시대가 다른데……. 누굴까???? 그러나 人材 難 脈으로 張 德 秀 씨의 암살을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 (張德秀암살사건으로 재판정에서 증언하는 金 九 선생, 이 재판은 군정청에 의해 진행 되었다.< 1948. 3.15>     © 서울의소리
 
 
 아 - 아! 白 凡 김구!



▲     © 서울의소리


                         $$ 원통하고 억울한 누명과 죽음, 竹山 조봉암 $$

▲선고 공판을 기다리는 조봉암선생     ©서울의소리

竹山 조봉암 선생은, 1898년 9월 21일 인천 강화에서 출생, 1915년 강화군청 급사, 쏘련 모스크바 동방노동자 공산대 修學, 1919년 3.1운동으로 1년간 복역, 후 渡日, 1922년 볼셰비키 運動을 위해 귀국, 共産主義 그룹가입,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의 高麗 共産黨 창립 代表, 준비위원회 합류, 1925년, 朝鮮共産黨 조직 參與, 같은 해, 高麗共産靑年會 대표, 1932년, 마르크스 레닌,(ML)黨 조직, 日本 경찰에 체포돼 7년간 복역, 1945년, 인천에서 地下運動으로 구금, 8.15 解放으로 出獄, 공산당의 理論 뿐인 虛構를 깨닫고,
 
1946년, 공산당 脫黨으로 訣別 선언, 1948년 5월, 제헌 國會의원, 1948년 8월부터, 1949년 2월까지 初代 농림부 장관, 1950년 6월부터 1951년 7월, 2대 民議員 副議長 /2대 국회부의장, 1952년 -1956년 대통령 출마, 1956년 11월 진보당 創黨, 위원장, 1958년 1월, 진보당 間諜사건 연루. 1959년7월31일 國家 보안법 위반으로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死刑, 1991년, 國會議員 86명 서명, 조봉암 사면, 복권청원.


▲ 조봉암선생의가족사진. 우측 서 계신분이 조봉암 선생, 옆이 부인, 그리고 딸들, 앉은 장인 장모     © 서울의소리
$$ 공산당을 청산하고 초대 농림부 장관에 취임하여 $$

농지 개혁법, 양곡매입법은 일본인의 농지수탈과 富農의 행패로 혹사당한 소작인과 빈농들에겐 희망의 법이요, 광명의 빛으로 떠올랐다. 죽산의 진보적 농정은 국민의 상당한 신뢰로 자연스럽게 이승만의 오만과 독선적인 독재를 비판하게 됐고,1952년 전쟁의 와중에 치러진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아주 근소한 차로 낙선됐다.
 
그러나 이때부터 죽산은 이승만의 킬러로 부상, 이들을 불안과 초조로 얼어붙게 했다. 그 후 1956년 다시금 제3대 대통령선거에 진보당 당수로 출마함으로써 수구와 보수 일변도의 정국에 진보의 기치를 내 걸음으로써 한국 憲政史에 새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이승만에겐, 이때의 불안한 승리가 1960년도의 제4대 대통령 선거가 큰 부담이오, 위기로 또다시 부상했다.

$$ 간첩 양명산 사건 $$

바로 이때 지축을 흔드는 간첩 양명산사건이 터졌는데, 사건의 핵심은 죽산의 경력을 이용, 죽산이 북으로 부터 양명산울 통해 공작금을 받아 정치자금으로 사용했으며, 북의' 지령대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명산은 법정에서 진술을 여러 번 번복하여, 검찰들을 당혹케 했으며, 죽산의 변호를 맡은 변호인단은 양명산이 관제(官製)빨갱이 라는 것을 밝혀냈는데, 양명산은 양이섭으로 미정보국(HID)공작원 이라는 사실도 밝혀내기도 했다.
 
이 사건은 최초의 관제빨갱이 사건이었다. 후에 이 사건이 본보기가 되어 군사독재정권에선 자주 사용하는 메뉴가 되기도 했다. 

$$ 살아있는 양심의 전설 故 유병진 판사 $$

당시 사건 담당 판사는 故 유병진 판사로 1심판결을 맡았는데, 유판사는 지금도 법조계에 살아있는 전설로 통한다. 유병진 판사는 사건의 성격이 정치적 관제빨갱이 사건임을 간파하고, 죽산과 양명산 에게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박기출(부통령 입후보자)등은 무죄를 선고 했다. 결국 유병진 판사는 法服을 벗고 말았다.
 
이후 많은 극우세력'들이 유판사 집을 침입, 난동과 협박으로 괴롭혔다. 제 2심 선고공판은 집행유예 족으로 가닥을 잡는 듯하다가, 사형선고를 내리고 만다. 1959년 7월 30일, 재심청구를 했으나 기각되고 죽산은 하루 만에 전격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날이 1959년 7월 31일 이었다. 法治의 민주국가에서가능한 일인가?

$$ 냉전적 사고방식의 산물 $$

이때는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신익희가 유세도중 열차안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급서하여 야당 대통령후보는 진보당의 죽산 조봉암 선생으로 단일화 됐을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조병옥, 김준연은 이승만의 장기독재집권은 용인할지언정, 죽산 조봉암은 지원할 수 없다는 냉전적 사고방식 속에 죽산 조봉암은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제거되는 음모가 실현되도록 방관했다는 사실이다. 

 $$ 죽산선생의 마지막 말씀과 새 $$

1958년 1월3일 부터 1959년 7월31일 까지 죽산선생은 약 1년6개월을 서울형무소에서 보내셨다. 그러나 죽산선생은 재판결과에, 판결은 잘됐다. 無罪가 아닐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나는 萬사람을 살리는 理念이었고, 李博士(이승만)는 自身 1인만 잘사는 理念이었다. 理念과 理念이 대립할 때는 한쪽이 없어져야 勝利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 中渡派의 마음이 便安해 지는 것이다. 政治를 하자면 그만한 覺悟는 해야 한다. 라는 말로 오래전부터 죽음을 초월한 자위로 죽음을 예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더욱 슬픈 일은 서울형무소에서 재판을 기다리며 매일 날아와 슬피 우는 새에게 먹다 남은 밥알을 새에게 줬는데 죽산선생이 사형을 당하기 직전까지 날아와 아름다운 목소리로 슬피 울었다고 한다. 수형인들은 신기하여, 이 새를 조봉암 새 라고 불렀는데 죽산선생이 사형을 당하자 어디로 갔는지 찾아오지도 않고 울음소리도 듣지 못했다 한다.
 
수형인들은 그새는 억울한 조봉암 선생의 영혼과 함께 날아갔다고 굳게 믿고 그새와 죽산선생을 회상했다. 고 전한다. 그러나 아직도 죽산 선생을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헌정사에 깊이 관여했으며, 이 시대에 오직 한분만 생존해 계신 살아있는 양심 강원룡 목사님의 회고록을 보면, 6.25가 터지자 정부수뇌들은 혼비백산 걸음아 날 살려라 모두 도망쳤지만, 죽산선생은 텅 빈 국회에 들어가 중요 기밀문서를 자기 차에 싣느라 부인을 태우지 못해 결국 부인을 그곳에서 죽게 만들었답니다.
 
만약, 죽산선생이 빨갱이였다면, 그 기밀문서를 빨갱이한테 넘겼겠지요. 빨갱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멋있게 죽었습니다. 사형집행관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습니까? 묻자, 일체의 변명이나 자신의 관한 말은 않고, 술 한 잔 달라! 며 마시고 사형을 당하셨답니다. 이승만은 진보적 인물을 이렇게 누명을 씌워 죽인 것입니다.

▲ 초대 농림부 장관에 취임하며……     © 서울의소리

 $$ 국민 방위군 사건 $$

▲     © 서울의소리
1950년 11월 까진 북진통일을 눈앞에 둔듯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1950년 12월 15일 軍警과 공무원이 아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국회에 통과시켜, 12월21일 처부대로 1만 여명이 창덕궁 에 소집돼 죽음의 행렬에 나섰다. 아무리 예비군 이지만, 당시 국민방위군 작전처장 이었던 李 炳 國의 증언에 따르면 쌀 한 톨, 군복 한 벌, 안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것도 없이 막연히 착지(着地) 부산 구포 라는 작전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대신 양곡권(量穀券)이 지급됐는데, 국방장관 申性模와 내무부장관 趙炳玉이 서로 양곡지급권을 갖겠다고 다투는 바람에 내무부는 각 市長, 郡守에게 양곡지급울 중단 하라고 지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국민방위군은 양곡을 지원받지 못한 체 굶으며 추위와 싸우는 죽음의 행군을 하게 됐다. 너무나 무모한 전략이며 정부의 정책상 난맥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어딜 봐도 군인 같지 않고 무슨 유격대 같다)

▲     © 서울의소리
엄동설한의 국민방위군의 의복 사정은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소집된 이상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 주는 것이 당연함으로 민간복을 벗어버린 상태에서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으로 길을 나선 그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쓰러져 갔다. 나 어릴 때 기억이지만, 이때는 서울의 한강과 마포나루 는 꽁꽁 얼어붙은 것으로 기억 된다. 그때 기온은 지금과 달리 보통 영하 15도 -18도가 보통 이었고, 칼바람이 몹시 세찼다, 그
 
래서 살을 에이는 듯한 날씨라는 표현을 잘 썼다. 정부는 이들을 위해 피복비를 전혀 계상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 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을 배정해 무엇 하냐? 였다. 전후 철저한 대책도 없이 무조건 법만 통과시켜, 남하 하는 중공군의 노역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허겁지겁 발의한 주먹구구식 발상이었다. 오로지 방한의 방법으론, 서로의 체온과 2명당 1장씩 지급된 가마니뿐이었다.

이것은 말이 좋아 <방위군>이지, 거지 떼의 행렬이었다. 생각해 보라! 먹지 못하니 <군기>가 바로 섰겠는가? 추위에 가마니를 뒤집어 쓴 걸레 같은 옷을 걸친 무리들을, 무슨 다른 말로 부를 수 있었으랴! 교실 같은 크기에 200-300명씩 처넣으니 서로 몸을 맞대고 추위에 떨며 잠을 자야만 했다. 이속에서 살판 난 것은 이였다. 한 마리씩 잡는 게 아니라 옷을 벗어 빗자루로 쓸어내야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겨울철 열병인 발진티푸스가 창궐했고 영양상태가 열악한 그들은 발병하면, 치료한번 못 받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
 
50여만 명의 방위군은 악전고투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면, 수용능력이 없다고 김해로 가라! 김해로 가면, 진주로 가라! 진주에선, 마산으로 가라! 하여 뺑뺑이를 돌렸다. 각 교육대 간부들은 이들을 며칠씩 수용한 걸로 꾸며 예산과 식량을 빼 돌렸다. 갈 곳 잃은 국민 방위군들은 행군도중 잔칫집을 습격하고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먹으니 토사곽란(吐瀉廓難)을 일으켜 토하고, 설사하고, 많은 방위군들이 곳곳에서 숨졌다.


▲     © 서울의소리
이런 식으로 빼돌린 예산이 24억 원, 그렇지만, 국회조사단의 내용과 주장은 50억 원 내지 60억 원에 달했다. 국민방위군 재정을 총괄 한 부사령관 尹益憲(윤 익 헌)은 옆 사무실에 돈을 산처럼 쌓아놓고 기생(技生)들에게 잡히는 대로 뿌리고 다녔다. 한다.

국민방위군은 소금물에 절은 주먹밥 한 덩이가 없어 굶어 죽는데, 이승만이 육성한 테러조직 大韓靑年團 간부들로 구성된 국민 방위군의 지도부는 無所不爲의 권력을 등에 업고 아무렇지 않게 당연한 듯 이런 만행을 일 삼았다. 이렇듯 이 사건은 이승만의 비호를 등에 업은 대한청년단 고급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아사자(餓死者)동사자(凍死者)가 9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이 횡령, 착복한 돈이 현금 23억 원, 쌀 5만 2천섬,으로 축소되어 발표 됐다. 그 책임으로 그토록 신임하던 국방장관 申性模가 물러났고, 더 이상 책임을 회피하자 李始榮부통령이 辭任하며 철저히 조사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까딱도 안했다. 임정에서 탄핵을 했을 때도 이와 같았으리라. 9만 명을 굶겨죽이고 얼려 죽여도, 난, 책임 없다, 식 이니…….

▲     © 서울의소리
사령관 金潤根(김윤근) 부사령관 尹益憲(윤익헌)이하 쫄따구 5명을 총살 시키는 것으로 종결 됐다. 이것은 전쟁보다 부정부패가 더 잔인하고 무섭다 는걸 보여준 교훈이었다. 100여일 만에 총 한 방 쏘지 않고 50만 명 중 9만 명을 죽게 한 戰 果는 세계전쟁사에 길이 빛날 치욕 이었고, 그것도 살아남은 방위군중 80%가 폐인이 되다시피 했으니, 개만도 못한 죽음을 당한 9만 명을, 단 몇 명만을 銃殺로 마감하는, 거룩한 대통령 이승만! 이런 분이 國祖로 대접받는 시대가 도래 했으니…….축하를 해야 할지? 통곡을 해야 할지?

▲     © 서울의소리
이런 옷차림으로 혹한의 추위에 굶으며 목적도 없이 행군을 강행했으니…….그들이 신은 신발은 대부분 고무신이 주류를 이뤘다. 상상을 해 보라! 대다수 동상으로 발가락이 잘렸을 것이다. 손엔 장갑을 꼈을까?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으면, 한 움큼씩 이가 잡혔을 것 같다.

 $$ 居昌 양민학살 事件 $$

19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慶南 居昌郡神院面)일대에 준동하는 공비를 토벌 중 이던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대대장 韓 東錫(한동석)소령은 공비와 내통 한다는 이유로 양민 600여명을 집단 학살 했다. 이 사건은 마침내 국회서 정치문제로 번져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려고 현지로 향하던 국회 조사단(단장, 서민호)일행에게 경남지구 계엄사령부 민사부장 일명 백두산 호랑이 라는 악명 높던 金宗元(김종원)이 부하들과 공비로 가장하여 총격을 가하며 현지답사를 방해 하였다.
 
혼비백산, 간신히 살아온 국회조사단은 이 문제는 국민 방위군 사건과 맞물려 軍과 政府에 대한 불신의 불똥이 이승만 에게 향했다. 그러나 李承晩 정부는 개의치 않고 이 사건을 압력을 가해 흐지부지, 흐릿하게 끝냈다. 이사건의 주모자 김종원은 그 공로를 이순신 에 필적할만한 공로로 이승만에게 인정받았다. 후에 그는 치안국장 까지 오르는 출세를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을 조사하던 국회조사단 단장 徐珉濠는 지방선거가 실시되기 하루전날인 1952년 4월24일 순천 에서 전남 병사구 사령부 소속 <서창선>대위가 서민호 의원에게 테러를 감행하려다, 오히려 徐의원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 <살인죄>로 기소되어 1심에서死刑선고를 받았다.
 
徐의원은 <정당방위>를 주장했고 國會는 徐의원 석방결의안을 반대없이 통과했지만, <서북청년단>등이 관제시위를 벌여 국회의원 성토장으로 만들고, 군민대회, 농업증산 군민대회를 열어 서민호를 살인자로 일방매도하고 직선제 반대를 주장하는 국회의원들에게 국민소환을 요구하겠다며 협박울 감행했다.
 
이들의 여론몰이 시위는 지방선거 승리라는 무한의 힘을 얻게 되었고, 徐珉濠은 1960년 4. 19 혁명으로 8년 만에 출옥했다. 양민 600명을 죽인 김종원은 충무공 <이순신>대접을 받고 자신을 죽이려던 상대를 죽인, 정당방위 는 8년의 옥살이 끝에 4.19 혁명으로 풀려나는 <이승만 공화국>참으로 부끄러운 역사다. 지울 수 있다면 송두리째 드러내고 싶은 역사인데, 이걸 美化시키려는 變種 들, 역겨운 존재들 이다.


▲     © 서울의소리
밑에 사진은 유엔군과 국군이 중공군 600명을 사살한 사진이나 거창 양민학살 사진이 없어 대치하였다. 아마도 학살 현장이 이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 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했던 그때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이승만의 가공할 만행은 釜山政治波動에서 계속 된다.

▲     © 서울의소리
2008. 11. 18글쓴이 : 세상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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