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탄생 140주년, "위정자들, '도산정신'으로 난국극복에 앞장서라!"

위대한 민족지도자 도산의 '멸사봉공·살신성인', '정직·성실·겸손'의 정신과 태도를 본받아 실천해야 한다

권혁시 칼럼 | 입력 : 2019/11/11 [14:31]

 

1919년 기미년, '3·1(독립)혁명'에 이어 '대한민국 임시(초대)정부'를 한 달 보름 후에 수립하였고, 올해는 그 역사적인 거사의 100주년을 맞은 특별한 한해이다. 그런 금년 11월 9일은 일제치하에서 국민계몽과 대일항쟁에 헌신했던 위대한 선구자, 민족지도자, 독립지사 안창호(安昌浩; 1878~1938년, 호 島山 도산) 선생이 태어난지 140돌이 되는 뜻깊은 날이다(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반환점에 이른 날이기도 한데, 이 시점에서 정부는 '다 함께 잘 사는 나라; 더 분발하겠습니다'는 결의를 했거니와 초심을 되새기며 모든 일과 뜻을 되돌려 자신에게서 찾는, '反求諸己 반구저기-反躬自問 반궁자문'의 각심으로 심기일전해야 할 것이다).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의 봉상도(鳳翔島, 일명 도롱섬)에서 출생하였고 열두 살 때 부친을 여읜 탓에 그 후에는 조부의 양육으로 성장하였다. 아홉 살에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895년(고종 32년), 서울로 올라가 학업을 마쳤다. 어린 시절부터 한학(유학, 사서삼경)을 공부하여 ‘선비정신’( 聖人之道 성인지도)에 투철했을 도산은 초지일관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과 태도가 확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생면학'에 정진했던 그는 서당에서 동문수학하던 나이가 서너 살 많은 필대은(畢大殷)과 국내외 상황에 대하여 끊임없이 토론했을 만큼 깊은 사고로써 치열하게 '문제의식'을 키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독립과 민족계몽 운동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지체없이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학업을 마친 직후인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약했으며 1907년,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고 1913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興士團)을 결성하였다.

 

십여 년 후 1926년 2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만주 일대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무장 독립투쟁을 통합하기 위해 '대한독립당'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민족항쟁에 관한 이념과 노선의 통일을 이루지 못해한 채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1932년 4월, 뜻하지 않게 윤봉길(尹奉吉)의거'의 주모자로 몰려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다행히 4년형을 선고받은 상태에서 가출옥하였으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재차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이듬해 1938년 3월 10일,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세상을 떴다.

 

도산 안창호, '평생면학, 지속적 사고'를 통한 자질·리더십 함양
ㅡ '민족교육, 조국독립'에 헌신한 위대한 민족지도자·독립지사

 

(돌이켜 보건대) 1896년, 열여덟 살의 청년 안창호는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였다.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으면서 서구문물을 알게 되었고, 보통부를 졸업한 직후에 조교가 되어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독립협회'에 가입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관서지부를 설립하여 민권운동에 투신했으며, 이를 통해 나라와 겨레에 대한 투철한 '사명의식'을 다지는 동시에 백년대계인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명철히 인식하게 되었다.

 

1902년, 결혼한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더 많은 지식과 경륜을 축적하고 독립운동의 보다 정확한 방향과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안창호는 궂은 일을 마다지 않고 매사에 솔선수범하며 헌신적으로 일했다. 재미동포들은 그렇게 성실한 그에게 호감을 느끼며 마음을 열었고, 마침내 안창호는 리버사이드 일대의 한인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1905년 4월, 드디어 동지들을 규합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독립, 조국행방을 목표로 삼고 한인 애국계몽 운동단체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였다.

 

1907년 5월, 공립협회 제3대 회장으로 선출된 도산은 언론활동을 중심축으로 교육진흥, 실업발전을 비롯하여 조선독립과 역량강화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 실행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1909년,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통합한 데 이어 1910년, 대동보국회를 통폐합하여 그해 5월 10일, '대한인국민회'로 발전시킴으로써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단체로 성장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이러한 일련의 활동의 일관된 이유는 범민족적 '실력배양'을 통해 조국 '독립해방'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1880년대 초 김윤식(金允植), 신기선(申箕善) 등이 주창한,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道 도)은 지키되 근대 서구적인 기술(器 기)은 받아들이자는 이론)을 깊이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선진 자본주의의 물질문명에 관한 지식을 습득, 활용하여 경제적인 부강을 이루기 위해 '실업사상'을 지득, 파급시켜 '산업경영'을 실행할 신민(新民)의 양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양기탁(梁起鐸), 이갑(李甲), 신채호(申采浩) 등과 국내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조국의 독립해방 활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투신하였다.

 

또한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여 투철한 '민족의식·독립정신'과 함께 쟁쟁한 실력을 겸비한 청년인재의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대한독립'이 최종 목표인 이 모든 활동에 필요한 재정 조달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대구에 태극서관을, 평양에는 자기회사를 설립,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런 한편 1909년, 이동녕(李東寧), 양기탁, 박중화(朴重華), 김좌진(金佐鎭), 최남선(崔南善) 등과 뜻을 같이 하여 '청년학우회'를 조직함으로써 열혈 청년 중심의 독립해방을 도모하였다.

 

이 조직(단체)이 표방한 제1 목적은 이른바 '4대 정신'인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으로써 지(智)·덕(德)·체(體)의 인격수양과 조직적응력 습득이 기본이다. 이에 기초하여 1인1기의 전문적 기예·기술를 연마케 함으로써 출중한 자질(능력·인격·비전)의 인재(직업인)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런 가운데 1909년 10월 26일,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등박문)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의거'에 관련된 혐의로 석달 동안 옥살이를 한 후 1910년 봄, 경술국치(庚戌國恥, 한일합방) 직전에 베이징을 거쳐 칭다오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유동열(柳東說), 김희선(金羲善)을 비롯한 다수의 민족지도자들과 독립항쟁의 전략에 대해 협의했으나, 두 차례에 걸친 회합에서 이견이 백출하여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이듬해 안창호는 참담한 심정을 추스르며 미국으로 떠났고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초대 총회장에 취임하게 된다. 이 때에 언론의 중요성을 잘 아는 그는 회보(기관지) '신한민보'를 발간하는 한편, '105인 사건'의 여파로 신민회와 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대책을 세우는 데 부심하였다.

 

그러던 끝에 1913년 5월 13일, 민족의 자주·독립·번영을 목표로 그 후신인 '흥사단'을 우여곡절, 천신만고 끝에 출범시켰다. 이 조직은 동맹수련단체로써 전국 8도의 대표를 선정하여 민족을 이끌어해 나갈 인재(중견 지도자) 배출에 진력하였는 바, 무실역행·충의용감·건전인격·단결훈련·국민개업(國民皆業)을 조직 목표로 세웠다. 그리고 실천강령에 따라 '독립운동, 항일투쟁'을 위한 조직적 재정조달, 후원과 효과적 인력양성, 충원을 차질없이 실행함으로써 '대한독립'의 위대한 사명 완수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윽고 1919년 3월 13일, '3·1독립혁명'에 부응,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키 위하여 대한인국민회는 긴급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즈음 도산 안창호는 '독립·민주·평화'를 천명한 3·1운동(혁명)이야말로 한민족의 저력을 만천하에 과시하고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포고한, 무엇보다 위대한 가치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역설하였다. "삼일운동을 계승하자!"라는 연설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식, 민족자결주의의 공포, 파리평화회의 개최를 위시한 모든 외부적 요인보다 중차대한, 한겨레가 거족적으로 분연히 봉기한 위대한 역사적 거사임을 선포했던 것이다.

 

행동하는 선각자, 민족지도자 도산 안창호는 그렇게 말로만 하지 않고, 이를 몸소 실행하기 위해 1919년 4월 5일, 정인과(鄭仁果), 황진남(黃鎭南)과 함께 상하이를 향해 출발하였다. 오랜 항해 끝에 5월이 돼서야 도착하였고 6월 2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의 중책을 맞게 되었다. 그는 취임 즉시 '대한인국민회'에 긴급히 요청하여 2만5천 달러를 지원받아 프랑스조계에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한 후, 각 지역 독립지사들의 소집, 회합을 시작으로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임정 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의 체계를 확립하여 조직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목적으로 먼저 인구조사에 착수하였고 정부의 재정 확보에 필요한 국채발행, 인두세 징수, 구국재정단 조직 등, 다각도의 정부정책을 구상하는 데 골몰하며, 망명 임시정부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928년, 대일항쟁·독립투쟁 세력이 분열되기 시작했으며 끝내는 1929년, 각지에 산재한 촉성회가 해체됨으로써 혼신의 힘을 다했던 일련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특히, 이른바 '민족유일당 운동'이 실패한 후 그는 이동녕, 백범(白凡) 김구(金九) 등과 의기투합하여 파벌과 분쟁을 척결, 쇄신함으로써 임시정부의 기초, 기반이 될 정당의 결성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대한독립당'을 창설하고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주창하였다.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 (우국충정과 동포애가 남달랐던 도산이 부르짖었던 이 슬호건, 사자후야말로 '국론양분'이 극심한 현 상황에서 모두가 교훈 삼아 실천해야만 할 '국민적 강령'임을 확실히 자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후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거'가 있었던 그 날, 상하이를 방문한 안창호는 민단장으로 오인한 일본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후 국내로 압송되었고,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대전감옥으로 이송되어 2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가출옥(1935년 2월 10일)하였다. 도산이 대전감옥에서 석방된 이태 후 1937년 6월, 일제는 '동우회사건'을 유발시켜 그를 비롯한 180여 명의 동우회 회원들을 체포하였다. 종로경찰서로 넘겨진 이들 독립지사들은 135일간 집중조사를 받았고 8월 15일, 예심종결을 거쳐 '치안유지법 위반' 판결을 내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하였다.이렇게 고초를 겪던 중 안창호는 지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소되었지만 병마를 이기지 못한 채 1938년 3월 10일 0시 5분, 59년 4개월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직·성실·겸손'의 멘토, 선각자·민족지도자 안창호 선생
ㅡ 롤모델 삼아야 할 자질(능력, 인격·도덕성, 비전)과 리더십(인식, 경청, 선견지명)

 

"작은 일을 두루 할 줄 안 다음에야 큰일을 이룰 수 있다"(能周小事 능주소사 然後能成大事 연후능성대사. 관윤자), "세상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데서 생기고,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로 시작한다. (天下難事 必作於易 천하난사 필작어이 天下大事 必作於細 천하대사 필작어세) 따라서 성인은 쉬운 일을 어려운 일처럼 대하기에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는다" (是以聖人 終不爲大 故能成其大 시이성인 종불위대 고능성기대 夫輕諾必寡信 多易必多難 부경낙필과신 다이필다난 是以聖人猶難之 故終無難矣 시이성인유난지 고종무난의. 노자, '도덕경'),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며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일에도 부정직할 것이다." (Whoever is faithful small matters will be faithful in large ones' whoever is dishonest in small matters will be dishonest in large ones. 그리스도 예수, 신약성서 '루가복음')

 

이렇게 아주 사소한 일까지도 누구보다 충실히 잘한 사람이 선각자이며 우리 한겨레의 위대한 민족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그는 유학 겸 독립운동을 위해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머물고 있을 때,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를 구했다. 이력서의 취미 란에도 '청소', 특기란에도 '청소'라고 써 넣었다. 한 시간당 1달러를 받고 어느 집을 청소하게 되었는데 마치 자기 집처럼 정성껏 쓸고 닦고 하였다. 또 한 번은 그런 모습에 감병 받은 주인이 "당신은 어느나라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는데,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당신은 청소부가 아니라 신사입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이뿐만 아니었다. 도산 선생은 틈나는 대로 동포의 집을 찾아 화장실 청소를 해주면서 성실과 청결의 모범을 보여주었다고도 한다. 원래 도산 선생은 수많은 청중을 감동시킨 웅변가였다. 하지만 사소한 일 까지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 정직, 성실, 겸손으로 일관된 인격이야말고 그 언변을 능가하는 웅변이었던 것이다(차동엽 신부, '시련을 이겨낼 희망의 메시지'). 이처럼 우리 국민들이 특히, 지도자·위정자들이 반드시 롤 모델 삼아야 할 그의 훌륭한 자질(능력·도덕성·비전)과 탁월한 리더십(인식·경청·선견지명)의 근원은 '정직'(正直, 바르고 곧음)이다. 그래서 도산은 포효하듯 우리를 향해 이렇게 일갈하였던 것이다.

 

“말과 행위에 ‘거짓’이 없으라. (‘나’만이 아닌) 나와 나라를 위하여 항상 ‘생각’하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 꿈 속에서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뼈저리게 뉘우쳐라. 죽더라도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은 참되고 실속이 있도록 애써 실행하라.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진실은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ㅡ 청중의 마음을 뒤흔드는 뛰어난 웅변가이기도 했던 안창호는 인간세, 세상 만사에 있어 '사람'의 중요성과 그 '역할'을 강조하면서 사람다운 사람, 곧 공부(평생면학), 이웃사랑 등을 실천하는 '실력자, 인격자'가 되기를 역설하였다(그럴진대 국정최고책임자는 교육혁명을 통한 '전인교육·의식혁명', 그리고 최고위정무직 '인사정책'의 원칙을 정립하여 기필코 실행해야만 할 것이다).

 

"자기 몸과 집을 자신이 다스리지 않으면 대신 다스려 줄 사람이 없듯이 자기 국가와 민족을 자신이 구하지 않으면 구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책임감이요. 주체의식이다", "우리 가운데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이 인물이 될 공부를 하지 않잖는가.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자가 되라." ㅡ 도산이 거듭 강조한 무엇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작금의 세태에 비추어) 부언하거니와, 백성들로부터 "나라가 아주 어지러운 지경이라"는 개탄의 소리를 듣고 답했던 순자(荀子, BC 300~270년경)의 언명을 지도자·위정자들은 명심하여 자질(능력, 인격·도덕성, 비전) 향상과 리더십(인식, 경청, 선견지명) 강화에 힘써야 할 것이다.

 

"어지럽히는 군왕이 있는 것이지 어지러운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요. 다스리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 다스리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有亂君 無亂國 유난군 무난국 有治人 無治法 유치인 무치법. 순자, '君道 군도'; 지도자의 길) 다시 말하면, "어지럽히는 지도자가 있어 나라가 어지러운 것이지 처음부터 어지러운 나라는 없다. 제대로 다스리는 지도자가 있어서 나라가 다스려지는 것이지 처음부터 잘 다스려진 나라는 없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관점에서 뼈저리게 각성하고 반드시 실천해야만 할 경구 몇 구절을 적는다(부디 이를 교훈삼고 '도산정신'을 따라 평생토록 '학습'에 힘쓰고 깊이 '사고'하며, 그로써 '정직·성실·겸손'한 태도를 견지하여 '11·12민주시민(촛불)혁명', 그 혁명정신(revolutionary spirit) ㅡ '정의·평등·공정'을 실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령되며,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學而不思則罔 학이불사즉망 思而不學則殆 사이불학즉태. 공자, ‘논어’), "흔히 사람들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잡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일에 더 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도산 안창호), "우쭐대고 까불지 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라!"

(구약성서, '예레미아서' ㅡ 하느님의 말씀, 곧 천명은 '국민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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