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협 주동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 그 주동자들, 4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다

임두만 | 입력 : 2019/11/18 [01:10]

[신문고뉴스] 임두만 편집위원장 = 1979년 있었던 YWCA 위장결혼식 사건 관계자들에게 무죄가 내려졌다. 지난 11월 15일 오전 1130분, 서울고등법원 403호 법정에서 40년 전인 19791124일 일어났던 YWCA 위장 결혼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재판부(재판장 조용헌 부장판사)는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이 사건은 특히 2014년 당시 피고인들이 재심을 청구했는데, 5년이 지난 2019년 11월 15일 받아들여졌고, 받아들인 당일 무죄판결을 내린 이례적인 재판이었다.

 

▲ 사진설명 : 앞줄 왼쪽부터 : 권진관 전직교수 / 김정택 목사/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뒷줄 왼쪽부터: 이상익 복지관장 / 양관수 교수 / 임채정 전 국회의장/ 이우회 출판인/ 최민화 출판인 / 박종열 목사 / 담당변호사/ 고 강구철 아들...사진제공 : 양관수 교수


이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신군부 세력에 반기를 든 첫 군중집회이자 시위로 대규모 구속사태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유신 하 긴급조치 9호로 국민을 옥죄던 박정희가 사망한 10·26 이후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에서 신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위기감을 느낀 청년세력인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은 결혼식을 빙자한 체육관 선거 저지 촉구대회를 계획했다.

 

그러나 당시는 전국계엄은 아니었지만 엄연히 서울은 계엄지역, 따라서 계엄사가 장악한 행정권하에서 허가를 얻어 집회를 여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이에 민청협은 결혼식을 위장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보궐선거 저지 민주화 촉구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 사건 주도자 중 1명인 김정택 목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민청협 회장인 이우회(현 출판인), 조성우(초대 민청협 회장), 홍성엽(당시 신랑), 강구철(사망), 양관수(현 오사카 경법대 교수) 등이 주축이었다.

 

신랑은 홍성엽 신부는 가상인물인 윤정민(보안사는 이를 거꾸로 하여 민정윤으로 해석, 윤보선의 민정을 추진하려 했다고 작명했음을 김정택 목사는 회고), 일시는 19791124일 오후 530, 장소는 서울 명동 YWCA 1층 강당, 대회장 함석헌, 주례 박종태(전 공화당 국회의원) ...

 

이렇게 철저하고 확실하게 위장한 결혼식의 신랑을 자임한 홍성엽 씨는 어머니를 설득 신랑 어머니 복장을 하게 했으며, 홍 씨의 여동생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위장 결혼식은 당시 사회를 봤던 김 목사의 시작인사가 끝나자마자 경찰들이 난입, 난장판이 되었다고 김 목사는 회고했다.

 

이에 대해 그는 신랑 홍성엽군과 신부 윤정민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결혼식을 선포했다.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대회 취지문이 낭독되었다. 취지문 낭독까지는 완료되었다. 이제 내가 구호를 선창할 차례다. 통대선거 저지한다. 거국내각 구성하라 하자 문이 부숴지는 소리, 책상이 부숴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장내는 곧바로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 후 이들은 종로경찰서를 거쳐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군복으로 갈아입히고 몽둥이로 개패듯 했으며 주먹과 구둣발로 분풀이를 하고는 취조실로 끌고 가서도 조사는 하지도 않고 서로 돌아가며 구둣발질, 주먹질, 여러 고문기구를 사용, 사정없이 온몸을 부숴뜨릴 것처럼 고문을 했다는 회고들을 당시 당사자들은 지금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고문취조가 끝난 뒤 이들은 모두 군법회의에 기소되어 징역형 등 유죄를 선고 받고 영어의 몸이 되었다. 즉 이 사건으로 140명이 연행되어 양순직·박종태·백기완·임채정·이우회·최열·양관수·최민화·강구철·홍성엽·김정택·이상익·권진관·김윤환 등 14명이 구속되었다.

 

그리고 윤보선·함석헌·김병걸·박종렬 등은 불구속 입건됐다. 이후 40, 이들 중 사망한 사람도 있으며 운동권을 떠나 조용히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이 사건 주모자이자 애초 결혼식 사회를 자임했던 현 오사카 경법대 양관수 교수는 민주화운동 산 증인으로서 서울대에 입학한 지 36년 만인 2007226일 서울대를 정식으로 졸업하게 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의 이 기록은 입학에서 졸업까지 서울대 사상 최장 기록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3번이나 제적되었다가 졸업하는 최초의 인사이기도 하다.

 

1971년 서울대 문리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 그해 10월 박정희 정권의 위수령 선포에 맞선 '반독재투쟁 교련반대투쟁'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차 제적돼 강제징집 당했으며, 1974년 전역 후 복학했다가 197610'유신헌법 철폐, 유신독재 타도' 교내 집회 주동 혐의로 2차 제적됐다.

 

그리고 제적 중이던 시절인 1979'YWCA 위장결혼식 사건'을 주도해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80,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제적 학생 일률 복학 때 복적되어 학생신분은 회복했으나 감옥에서 석방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 5.18 광주항쟁 후 그해 73번째 제적 통지서가 감옥으로 날아 왔다고 한다. 사람은 감옥에 가둬두고 자기들끼리 학생신분을 만들었다가 다시 빼앗는 웃기는 일들까지 자행한 것이다.

 

19813월 특사로 석방된 양 교수는 1982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까 시립대학에서 경제학 박사과정까지 수료, 일본 오사카 경법대학, 고려대, 성공회대 등에서 객원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했으며 지금도 오사까 경법대 교수로 있다.

 

이 과정에서 양 교수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선정돼 명예회복이 돼 서울대에 복학할 기회가 주어지자 200650대의 나이에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해 마침내 졸업에까지 이른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졸업 때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제는 다 돌아가셨지만 민주화운동 한다고 심려를 많이 끼쳐드린 부모님 묘소에 늦게나마라도 졸업장을 바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무죄선고를 받은 사람 중 이상익 복지관장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정리한 내용을 남겨 그 전문을 공유한다.

 

40년 전 YWCA 위장 결혼 사건, 오늘 재심에서 재판부에서 무죄 선고 받았습니다! 당시 이 사건은 국내외에 대서 특필되었습니다. 이에 간단하게 정리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오늘 1115일 오전 1130분 서울고등법원 403호 법정에서는 40vYWCA 위장 결혼 사건(791124)에 대한 재심에서 재판부(재판장 조용헌 부장판사)는 무죄를 선고했다. 2014년 당시 피고인들이 재심을 청구하여 오늘 받아들여졌고, 당일 무죄판결을 내린 이례적인 재판이었다.

 

197910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본부장의 총에 맞아 사망한 후,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YWCA 위장 결혼 사건은 계엄 하인 19791124일 민주인사들이 결혼식을 가장하여 명동 YWCA 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저지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당시 군사법원은 YWCA 위장결혼식을 19791027일 비상 계엄령 1호에 의한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보고 유죄판결을 내렸다. 오늘 재판부는 1027일 발효한 계엄포고가 위헌인가를 쟁점으로 다루었다. 즉 당시 법률이 헌법상 계엄 요건을 갖추었는가, 군사상 필요성이 인정되었는가, 이를테면 전쟁 전시 때 극도의 사회혼란으로 경찰력으로는 수습 불가능할 때 군사상 계엄령이 필요한데 그러한 상황 이었는가를 판단하였다.

 

오늘 재판부는 당시 전두환 계엄령 선포는 위헌이며 당시 헌법상 계엄령 요건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구금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집회 학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위법이다. 따라서 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되기 때문에 피고인들을 기소한 계엄법은 위법이고, 따라서 결과도 무효라고 선고하였다. 처벌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에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재판장은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피고인들이 명예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마무리 하였다.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선생, 전 국회의장 임채정,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 출판인 이우회, 김정택 목사, 박종렬 목사, 양관수 교수, 권진관 전 교수, 최민화 전 출판인, 이상익 복지관장 등 10명의 피고인들은 최후 진술을 통해 당시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당한 혹독한 고문을 진술하며 국가폭력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그리고 잘못된 역사를 이제라도 바로잡아 줄 것을 재판부에 당부하였다.

 

원본 기사 보기:인터넷언론인연대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