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미아 종료 '조건부 정지'.. 한·일 대립에 숨통은 틔웠지만

미국 압박으로 연장 "치욕" 시민들 미 대사관 앞서 연장 규탄 시위

정현숙 | 입력 : 2019/11/23 [10:24]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에서 미국의 추가 압박에 반박할 수 있는 명분'

'한일 관계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의 관계까지 고려한 고육지책'

시민들이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주한미국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지소미아 완전 종료를 촉구하는 긴급촛불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정부는 이날 6시 지소미아 종료 조건부 정지 입장을 밝혔다. 사진/뉴시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가 양국 간 막판 합의를 통해 22일 ‘조건부 연기’됐지만 언제든 돌이킬 수 있는 입장이다. 종료를 코앞에 두고 미국의 중재로 일본의 수출규제 철회 협상에 한·일이 일부 합의하면서 극적인 반전을 했다.

 

이로써 양국은 지소미아 종료를 불과 6시간 앞두고 최악으로 치닫던 관계가 일단 숨통을 트게 됐다. 정부는 향후 고위급 실무회담 등을 통해 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를 비롯한 양국 현안 해결에 나설 전망이다.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은 “우리 정부는 언제든지 지소미아를 종료시킬 수 있다는 전제하에 2019년 8월 23일 발표한 지소미아 종료 통보의 효력을 정지시키기로 했다”며 “한·일 간 수출관리 정책 대화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일본의 3대 품목 수출규제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절차를 정지시키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수출관리 대화에는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 배제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 양국은 3개 품목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서도 재검토할 예정이다. 양국은 과장급 준비 회의를 거친 후 국장급 대화를 해 관련 실행 상황을 점검할 계획이다.

청와대는 전날에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NSC 상임위원회를 열고 지소미아 종료 문제를 논의했다. 전날 회의에서는 지소미아 종료 쪽으로 기울었지만 정부의 입장이 하루만에 바뀌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와 일본과의 막판 물밑 접촉 결과 정책 방향이 바꿨다”고 설명했다. 다만 양국은 수출규제 문제와 별개로 징용 배상 문제는 양국이 별도 협상을 통해 해결책을 찾기로 했다. 이에 따라 향후 한·일 간 수출규제와 징용 투트랙 협상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방향을 급선회한 배경에는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가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22~23일 주요 20개국(G20) 외교장관회의 참석차 일본을 방문 중인 데이비드 스틸웰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한·일 간 막판 중재에 나섰다.

일본 정부도 같은 시간에 “현안 해결에 기여하도록 과장급 준비 회의를 거쳐 국장급 대화를 해 양국의 수출 관리를 상호 확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한·일 간 건전한 수출실적의 축적 및 한국 측의 적정한 수출관리 운용을 위해 (규제대상 품목과 관련해) 재검토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본이 지소미아 종료 정지를 계기로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문제를 논의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이다. 이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발효한 지 144일, 한국을 수출심사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한 지 112일 만이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지소미아의 유지를 강력히 원하는 입장이다.

지소미아 조건부 유예 결정에는 한·일 관계가 파탄으로 치닫는 상황은 막자는 양국 정부의 의지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정부는 일본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가 없다면 지소미아를 종료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일본은 지난 8월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 이후 줄곧 한국에 책임을 돌렸다. 고노 다로 일본 방위상은 지난 21일 중의원 외교방위위원회에서 “어떤 경우에도 북한 정세에 대해선 미·일, 한·미·일이 확실히 연대할 수 있도록 한국에 현명한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이날 NSC 회의를 마치고 G20 외교장관회의가 열리는 일본 나고야로 떠났다. 강 장관은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과 회담할 예정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우여곡절 끝에 지소미아를 일단 종료하지 않기로 한 만큼 일본 측도 그만큼의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소미아 종료를 반대했던 미국 정가에선 이날 한·일 정부의 발표를 환영했다. 수전 손턴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대행은 “지소미아는 미국의 두 동맹국이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을 때 단합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나라, 특히 북한에 보여주기 위해 상징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일각에서 제기된 지소미아 종료를 둘러싼 한·미 동맹에 균열 우려에 대해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한·미 동맹은 정부가 볼 때 지난 67년간 굳건히 뿌리내린 동맹”이라며 “한·일 간의 일시적 갈등이 굳건한 한·미 동맹의 근간을 훼손할 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막판 협상에 성공하면서 한국의 이번 결정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 셈이어서 향후 양국간 현안을 다룰 때 이전 보다는 명분있는 목소리를 낼 환경을 조성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한국 정부로서는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에서 미국의 추가 압박에 반박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다만 징용 배상 문제를 두고 한·일 협상이 결렬된다면 우리 정부가 다시 지소미아 종료 카드를 꺼내들 가능성도 있다. 우선 한미 간 최대 쟁점은 방위비 협상이다. 한국이 국내적으로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지소미아를 조건부로나마 유지키로 한 결정을 존중해 미국이 유연성을 보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지소미아 연장 규탄한다!'

한편 일본 불매운동에 앞장섰던 시민단체들이 정부의 조건부 연기 결정을 강하게 규탄하며 22일 주한 미국 대사관 앞에 촛불을 들고 모였다. 

이날 오후 7시 30분 한국YMCA 등 700여개 단체로 구성된 '아베규탄시민행동'은 서울 종로구 미국 대사관 앞에서 긴급 촛불 집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시민 100여 명은 "지소미아 조건부 연기는 국민을 무시한 처사로 굴욕적이다"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미국 압박에 지소미아 연장, 치욕이다' '사죄 없는 일본과 군사협정 필요없다 지소미아 연장 규탄한다' 등의 팻말을 들고, 촛불을 들었다.

박석운 아베규탄시민행동 대표는 "지소미아 조건부 연장 결정에는 아베 정권의 뒷배를 봐주고 있는 미국 정부의 무례한 강압이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며 "이 같은 굴욕적 상황에 대해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철우 대학생겨레하나 대표는 "3년 전 지소미아 체결 소식에 청와대 앞으로 달려갔다"며 "당시에 참담하고 분노스러웠다"고 떠올렸다. 그는 "김복동 할머니와 같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제동원 피해자 등식민지 역사에 한이 맺힌 피해자들이 살아숨쉬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우리 국민은 더 힘을 모아나갈 것이며, 대학생들은 농성을 해서라도 반드시 막아내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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