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조폭설’ 김용판, ‘개구리 소년’ 유해 발견 당시 현장 보존 못했던 경찰서장이었다

'국민의힘 김용판, 2002년 9월 실종 소년들 유골 발견 당시 현장을 지휘하던 대구 달서경찰서장'

윤재식 기자 | 입력 : 2021/10/20 [18:08]

지난 18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경기도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조폭 유착설을 제기해 오히려 곤혹을 치르고 있는 국민의힘 김용판 의원이 2002년 9월 개구리 소년 유골발견 당시 현장을 보존하지 못하며 수사를 지휘하던 대구 달서경찰서장이었다는 것이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다.

 

▲ 지난 2002년 9월 개구리소년 유골이 발견 될 당시 대구 달서경찰서장이던 김용판 의원  © KBS

 

대구 달서구 성서초등학교를 다니던 5명의 남자아이들이 1991년 326일 와룡산으로 놀러가 실종된 일명 개구리 소년’ 사건은 당시 국민적 관심을 끌며 단일 실종사건으로는 최대 규모 인력을 풀며 수사와 조사를 거듭했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미제로 남은 사건이다.

 

이후 정확히 11년 6개월 만인 지난 2002926일 실종어린이들의 유골이 와룡산에서 극적으로 발견되며 마지막으로 이 사건의 진상을 풀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당시 관할 경찰서인 대구 달서경찰서의 무분별한 발굴 등으로 인한 현장보존 실패로 현재까지 사건은 영구미제로 남게 되었다.

 

▲ 2002년 실종소년들 유골 발굴 당시 사진  © 인터넷 자료

 

발견된 유골에는 이해할 수 없는 수십 개의 상흔들이 가득했고 이를 감식했던 경북대 법의학팀은 이들의 사인을 예리한 발사체에 의한 타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경찰은 아이들이 길을 잃고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당시 대구 달서경찰서장으로 현장지휘를 했던 김용판 의원은 사인에 관련해 “(아이들이춥고 하니까 낙엽을 덮을 수도 있고 그런 와중에 체온은 떨어지고 잠은 오고 세월은 흐르면서 마사토는 흘러내리고 그래서 은닉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 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후 경찰은 특별수사팀등을 꾸려 수사를 더 진행하긴 했지만 2006년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결국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게 됐다.

 

지난 3월 26일 사건 발생 30년 만에 실종 소년들을 위해 만들어진 추모비 제막식에 당시 사건을 지휘하던 달서경찰서장이 아닌 국회의원 신분으로 참가한 김용판 의원은 유족들에게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 1991년 실종 당시 포스터  © 인터넷 자료

 

한편 일각에서는 사건 발생 직후 부실 초동수사’, 유골 발견 후 현장 보존 실패’ 등 이해할 수 없는 경찰의 행보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개구리 소년’ 사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실종 당시 소년들은 개구리나 도롱뇽 알을 잡으러 간 것이 아닌 와룡산에 있던 군부대 사격장에 탄피를 주우러 갔다는 것이다실제로 당시 소년들과 동행했다 몸이 아파 먼저 내려온 김 모 씨는 당시 친구들과 사격장에 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마침 그날은 5.16 쿠테타 이후 중단됐던 지방 의원 선거가 31년 만에 있던 날이라 임시공휴일이었고 그 선거는 군부이미지를 벗으려는 노태우 정권에게는 중요한 이벤트라 그날은 선거에 영향을 주는 어떤 일도 일어나선 안 되는 매우 조심스러운 날이었다고 주장한다.

 

또 대구에 위치했던 미군기지가 도심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미군들은 1991년 당시 사격은 주로 와룡산에 위치한 사격장에서 했으며 탄피수거에 철저한 국군에 비해 미군은 사격 시 느슨히 탄피수거를 해 당시 사격장에는 훈련 후 남겨진 탄피와 실탄들이 많았으며 인근 동네 아이들은 훈련이 없는 날에는 탄피를 주우러 가곤 했었다는 것이다실제 유골 발견지점 부근에서만 탄두 140개가 발견되었었고 유골이 된 아이들 옷 속에서도 탄두와 실탄이 발견됐다는 것이 이런 주장을 힘을 실어 주고 있다.

 

▲ 2002년 9월 실종 소년들 유해 발굴 당시 사진  © 인터넷 자료

 

이런 시대적 상황과 지리적 특성으로 당시 임시공휴일이던 사격장에서 미군의 사격훈련이 있었고 사격장에 갔던 소년들 중 몇 명이 총격을 받았고 이를 덮기 위해 아이들 모두를 죽이며 조직적 은폐를 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 근거로 아이들의 최종 목적지가 사격장이었음에도 연인원 30만 명이 동원된 수색에서는 와룡산에 있던 두 곳의 사격장만 군 시설이라는 이유로 제외됐다는 점미군의 당일 사격장 사용 여부는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유골 발견 당시 아이들의 옷은 일반이 사용하지 않는 군대 의무병들이 사용하는 맞매듭으로 묶여 있었다는 점국가 정보기관인 안기부 요원들이 유가족들을 미행하며 감시했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건 직후나 유골발견 이후에 사건해결의 의지가 없었던 경찰 등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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