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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특집) 훈민정음의 원형은 가림토 문자인가?

전세계 모든 발음을 가장 가깝게 쓸 수 있는 위대한 소리글자 한글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1/10/08 [16:39]

(한글날 특집) 훈민정음의 원형은 가림토 문자인가?

전세계 모든 발음을 가장 가깝게 쓸 수 있는 위대한 소리글자 한글

서울의소리 | 입력 : 2011/10/08 [16:39]
(단군세기 원문) 3세 단군 가륵 재위 45년

“경자 2년 (B.C2181) 아직 풍속이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다르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眞書)가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 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土)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신축 3년(B.C2180) 신지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배달유기)를 편수케 하였다.”


▲ <환단고기 단군세기> 3세 가륵단군 기록에 언급된 가림토 38자     © 역사복원신문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항간에서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創制)하여 반포한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국민들은 한글을 세종대왕이 만든 위대한 발명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은 창제 또는 발명이라기보다는 원래 있던 글자를 개량 완성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런지 역사의 기록을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     © 서울의소리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1443 계해) 12월 30일(경술) 2번째기사
(제목)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그런데 위 기록에서 이상한 점은 임금께서 훈민정음을 친히 만들었는데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였다고 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의 원형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이번에는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던 예조판서 정인지가 쓴 <서문(序文)>을 보기로 한다.  

세종 28년(1446 병인) 9월 29일(갑오) 4번째 기사
(제목)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니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자가 있다. 그래서 옛 사람이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어 만물의 뜻을 통하게 하고 삼재(三才=천.지.인)의 도를 심었으므로 후세에도 능히 바뀌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가 나뉘어져 다르게 되니 소리의 기운도 역시 달라졌다. 대개 외국의 말은 소리는 있으나 그에 해당하는 글자가 없어 중국의 문자를 빌어 통용케한 것은 오히려 그 소리에서 벌어지게 하는 것이 되었다.
 
어찌 능히 통달한다 하여도 뚫음이 없으리오? 대개 그 처한 방에 따라 편안하게 할 필요가 있으나 가히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동방의 예악과 문장은 화하(중화)와 같으나 방언의 말이 그와 같지 아니하다. (중략) (有天地自然之聲 則必天地自然之文 所以古人因聲制子 以痛萬物之情 以載三才之道 而後世不能易也 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 蓋外之語 有其聲而無其字 假中國文字 以通其用 是猶鑿也 豈能達而無乎 要皆各隨所處而安 不可强之使同也 五東方禮樂文章 擬華夏 但方言之語 不與之同)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를 간략하게 들어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 소리에 인하여 음은 칠조(七調)에 합하여 삼극(三極=천.지.인)의 뜻과 이기(二氣=음양)의 정묘함이 구비 포괄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28자로써 전환하여 다함이 없이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되었다. (주-칠조는 궁,상,각,치,우,반치,반상)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叶七調, 三極之義、二氣之妙, 莫不該括。 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 簡而要, 精而通, 故智者不崇朝而會, 愚者可浹旬而學。)” 이하 생략 

정인지의 서문에서도 “옛 사람이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어 만물의 뜻을 통하게 하고, 삼재(=천.지.인)의 도를 심었으므로 후세에도 능히 바뀌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옛날에도 소리글자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훈민정음은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했다.”고 말하고 있다. 세종대왕과 정인지 두 사람 다 옛날에 있던 글자를 모방해 새로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공히 말하고 있다.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행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씀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다” 하시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그러자 임금이 그 상소(上疏)를 보고, 최만리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上覽疏, 謂萬理等曰: “汝等云: ‘用音合字, 盡反於古。’ 薜聰吏讀, 亦非異音乎? 且吏讀制作之本意, 無乃爲其便民乎? 如其便民也, 則今之諺文, 亦不爲便民乎?)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최만리와 그 상소에 답하는 세종대왕의 말에도 모두 "옛 글자가 있다"는 말을 했고 "훈민정음은 옛 글자를 모방한 것"이라고 했다. 세종대왕은 지금의 언문은 단지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 가림토문자와 훈민정음과 일본 신대문자는 서로 모양이 유사하다                               © 역사복원신문
위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훈민정음은 옛 글자인 전자(篆字)를 모방한 소리글자라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은 새로운 창제 또는 발명이 아니라 옛날 글자를 개량 발전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체가 되는 옛 글자는 무엇일까?

먼저 원문대로 전자(篆字)를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한자(漢字) 서체의 하나로 예서(隸書) 이후에 여러 체가 발명되기 전의 가장 오랜 서체임.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의 두 가지가 있음. 대전은 주나라 때에 행해진 것이고, 소전은 진시황 때에 이사(李斯)가 대전을 간략화한 것이라고 함. 전서라 하면 흔히 소전을 말한다. ”고 되어 있는데 이 전자와 훈민정음의 모체인 소리글자 전자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의 모체가 되는 문자는 과연 무엇일까?
그 근거는 <단군세기> 3세 단군 가륵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경자 2년 (B.C2181) 아직 풍속이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다르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眞書)가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 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土)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훈민정음의 모체가 되는 전자는 바로 3세 가륵단군 때 을보륵이 만든 38자의 가림토문자였던 것이다. 이 글자는 소리글자이지만 만물과 물건의 형상을 나타내는 글자이기도 하다.
먼저 하늘(天), 땅(地), 사람(人)을 상징하는 . ㅡ ㅣ를 결합하여 여러 모음을 만들고,
이 모양을 본뜬 아음(牙音)과 치음(齒音), 혀 모양을 본뜬 설음(舌音), 입술 모양을 본뜬 순음(脣音), 목구멍 모양을 본뜬 후음(喉音) 등의 자음이 있다.  

현대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컴퓨터와 가장 궁합이 잘 맞는 한글은 가장 과학적인 글자로, 이미 약 4,200년 전에 우리 조상이 만들었으며 565년 전인 세종대왕 때 개량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글이 전 세계인의 발음을 가장 가깝게 적을 수 있는 문자인 이유는 단군조선이 전 아시아를 연방형태로 통치했던 대제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이 서로 다른 모든 종족들의 발음을 고려하여 가장 보편적으로 적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위대한 문자였던 것이다.
 
▲ 가림토 문자와 모양이 비슷한 소리글자들     © 역사복원신문
▲ 당시 조선은 중국 대륙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한반도와 일본열도, 만주, 몽골, 티베트, 위구르와 중앙아시아와 인도까지 경영했던 연방대제국이었다. 이는 문자를 보아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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