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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웹자서전'.."홀로 끙끙 앓던 밤들​·'싸움닭'과 '무던이'"

"생각하면 아픈 것들 투성이. 그래도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였다"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21/12/02 [18:00]

'이재명의 웹자서전'.."홀로 끙끙 앓던 밤들​·'싸움닭'과 '무던이'"

"생각하면 아픈 것들 투성이. 그래도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였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21/12/02 [18:00]

 

홀로 끙끙 앓던 밤들​

 

악착같이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도금실에서 락카실로 옮겼다. 락카실은 이중으로 밀폐된 구역이어서 덜 방해를 받았다. 나는 최고 속도로 작업 물량을 끝내놓고 남은 시간 공부했다.

 

그 시간이 내겐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런데 몸이 자꾸 말썽을 부렸다. 두통이 잦아졌고 코가 헐기 시작했다. 락카실은 독성물질이 배출되지 않아 화공약품 냄새가 지독했다.

 

결국 나는 그곳에서 후각의 반 이상을 잃었다. 좋아하는 복숭아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됐다. 프레스기에 치인 손목도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한 해 키가 15센티나 컸는데, 두 개의 손목뼈 중 성장판이 파손된 바깥뼈만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팔이 눈에 보일 정도로 뒤틀리면서 밤새 끙끙 앓는 날이 많았다. 몸까지 아프니 이러다간 시험을 망치겠다 싶어서 공장을 그만두려 했다. 하지만 공장에선 불량률 낮은 숙련공을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시험 한 달 전에 그만둘 수 있었다. 4월에 대입 검정고시를 봤다. 결과 발표는 한 달 뒤였고 대입시험은 7개월 남아있었다. 7개월 공부해 대학에 붙어야 하는 상황. 마음이 급했다.

 

빨리 대입학원에 다니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검정고시 결과를 보고 가라고 했다. 공장을 알아봤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손목을 치료하려고 의료보험이 되는 공장도 찾아봤지만 그런 공장은 없었다.

 

집에서 미적거리고 있으니 아버지는 새벽 3시에 나를 깨워 함께 쓰레기를 치우러 가게 했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리어카를 밀며 쓰레기를 치우고 오후에는 빈병과 깡통을 골라 고물상으로 팔러 가야 했다.

 

검정고시 발표가 났다. 합격이었다. 내겐 뿌듯한 성취였지만 아버지는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되는 야간 전문대학을 가라고 했다. 그럴 듯한 대학에 들어가 공장을 벗어나려는 내 발버둥이 아버지의 눈엔 가당치 않은 도전으로 보였나 보다.

 

- 아버지에게 학원 보내달라고 해도 직장 안 나간다고 안 보내주고 미칠 노릇이다. 괜히 주먹으로 벽도 쳐보고 머리로 막 받았다. 산다는 사실이 귀찮아진다. - 1980. 5. 16

 

아버지는 자신이 할 일이란 악착같이 돈을 모아 번듯한 집 한 채를 마련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가족을 위한 일이었고 종일 일하는 아버지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아들을 응원해줄, 든든한 지원군이 절실했다. 아버지가 쓰레기 잔뜩 담긴 리어카를 끌 때 뒤에서 밀던 것은 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앞만 보고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어 갔다.​

 

‘싸움닭’과 ‘무던이’

 

 

나는 잘 될 거라는 자기확신이 있었다. 잘 될 것이니 도전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반드시 정규대학에 가겠다는 생각으로 학원에 보내달라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내 기세가 평소와 다르다 느꼈는지 아버지는 그달 안에 다시 취업한다는 조건으로 학원에 다니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학원에 다니는 와중에도 새벽마다 일어나 쓰레기는 치워야 했다.

 

취업에 미적거리고 있었더니 아버지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아예 밤낮으로 자기와 일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종일 쓰레기를 치우라고? 나는 화들짝 놀라 발등에 불 붙은 사람처럼 서둘러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 학원 갔다 와서 공부 좀 하려 했더니 아버지가 쓰레기 치우러 나오라고 한다. 신경질이 났다. 신발을 확 집어 던졌다. 아버지가 그 모양을 보더니 한참 나를 노려보았다. - 1980. 5. 29

 

부당한 일을 당하면 나는 전투력이 강해진다. 아버지의 그런 압력이 나를 더 치열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재영이 형은 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재명이는 기가 잘 죽지 않는 애였어요. 어려서부터 우리 형제 중에 아버지한테 말대꾸한 건 재명이 뿐이에요. 우린 아버지가 말씀하시면 무조건 따랐는데 재명이는 자기 할 말 다했어요. 그러다 맞기도 했지만 자기가 옳다고 여기면 맞으면서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죠.”

 

쌈닭

나는 부당한 것을 참는 성격이 아니다. 그런데 재영이 형은 같은 인터뷰에서 이렇게도 말했다.

 

“재명이가 좀처럼 기죽지 않고 고집이 세기도 했지만 언제나 밝아서 주변의 사랑은 가장 많이 받고 자랐어요. 어릴 때 별명이 ‘무던이’였다니까요.”

 

둘 다 나에 대한 이야기다. 맞아도 고집을 꺾지 않는 것도 나였고, 별명이 무던이였던 것도 나였다. 삶은 매우 복합적이다.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도 양가적이었다. 비 오는 어느 새벽, 아버지와 쓰레기를 치우는데 급기야 일을 못할 정도로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리는 시장통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꼬박꼬박 조는데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더니 가게 좌판에 누워 눈 좀 붙이라고 했다.

 

새벽에 누가 깨웠다. 엄마였다. 흠뻑 젖은 작업복을 입고 오들오들 떨며 자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말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때 아버지는 희뿌연 여명 속에서 비를 맞으며 혼자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재명이 댈꼬 드감더.”

 

엄마가 소리쳤다. 아버지가 천천히 돌아보더니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아버지의 그 모습이 문득 아렸다.

 

생각하면 아픈 것들 투성이. 그래도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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