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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 "산업화 이후 최초의 시민항쟁…

명쾌한 이승만 토론 주인공 '서화숙'이 만난 '정광민'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1/10/25 [17:10]

부마항쟁, "산업화 이후 최초의 시민항쟁…

명쾌한 이승만 토론 주인공 '서화숙'이 만난 '정광민'

서울의소리 | 입력 : 2011/10/25 [17:10]

부산대 도서관 앞에서 선언문 낭독

4일후 군사정권에 끌려가 물고문

이듬해 계엄법 위반으로 실형까지

1994년 일본으로 건너가 경제학 공부

작년엔 친노로 몰려 국정원 연구직 쫓겨나

피해자 실태 파악 전혀 안돼… 진실 밝혀야

▲"부마항쟁의 정신은 자유를 억압한 정권은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헝그리합니다. 우리는 더 가야 합니다.  정광민 부마항쟁 주역


1979년 박정희 유신독재는 더욱 가혹해지고 있었다. 8월에 회사의 부당한 폐업조치에 항의하기 위해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여공들을 경찰이 무자비하게 해산시키면서 여공 한 명이 죽었다. 이 사건을 '살인적 죄악'으로 규정하고 강경 투쟁을 준비하던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9월에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했다.
 
1975년에 긴급조치 9호로 모든 정부 비판이 금지된 상황에서 마지막 보루였던 정당의 비판마저 봉쇄된 상황. 대학에서 어쩌다 일어나는 학생 시위는 언론에 보도되는 것도 금지되었다. 저항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듯이 보이는 이 어두운 시기에 부산과 마산에서 시민항쟁이 일어났다.
 
10월 16일 부산대에서 학생시위로 시작된 부마항쟁은 강경 진압을 불러왔고 강경 진압에 반대하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를 쏘았다. 18년 박정희 정권을 끝내버린 부마항쟁을 불러온 부산대 시위에 불꽃을 당긴 이는 당시 상대 학생이던 정광민(53)씨였다.
 
 _그날(10월 16일) 무슨 일이 있었나요.
 
"15일 오후에 학교를 나갔더니 학생들이 난리가 났어요. 오전에 부산대 공대 다니는 이진걸씨가 학교에서 유인물을 뿌렸는데 그걸로 그냥 끝났다고 해요. 당시 운동권인 이호철씨가 이끄는 '도깨비집'이 주도해서 준비를 했는데 시위로 이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경제학과 친구들 몇을 모아 다음 날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친구들과 새벽까지 등사판을 긁어서 유인물을 만들고 16일 오전 10시에 화폐금융론 수업에 들어갔어요.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면서 '드디어 오늘이 왔다, 나가서 싸우자' 그랬어요.
 
당시 강의실에 70~80명 정도가 있었는데 상대 학생들이 그렇게 진보적인 것도 아니었는데 순순히 나옵디다. 상대 건물 앞에 모여 20명 정도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당시 서울에서는 학생 시위가 드문드문 있었지만 부산에서는 정말 드문 상황에서 이게 터지니까 상대 애들도 수업하다가 창문으로 쳐다보고 일부는 나와서 합류를 했어요. 학생들이 도서관 쪽으로 행진을 시작하면서 그 숫자가 100명 200명 늘어나고 도서관 앞에 가니까 거기에 이미 200, 300명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도서관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유신철폐' '독재타도' 외치면서 스크럼을 짜고 도서관을 내려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위가 시작됐습니다. 운동장을 한바퀴 돌면서 숫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정문으로 나간 거지요. 그때가 11시쯤이었는데 경찰이 교내로 들어와서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쐈어요. 데모를 안하던 학생들도 눈이 따가와서 전부 다 밖으로 나오니까 덩치가 더 커져버렸지요. 그러면서 일부 시위대는 온천장쪽으로 빠져나가고 일부는 사대부고 담을 부수고 산업도로로 해서 빠져나갔지요.
 
그러면서 교대 부근에서 경찰에 차단이 되자 학생들이 흩어지면서 두 시에 부산역이다, 남포동이다 모이기로 했는데 부산역은 안되고 오후 3시부터 시내쪽에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저녁 7시 넘어서자 시민들이 가세해서 수만 명이 되었습니다. 지금 부산영화제(Piff)광장 있고 자갈치 남포동 광복동 국제시장 그 일대인데, 거기서만 한 게 아니고 파출소 방송사 동사무소까지 습격하고 다음 날은 세무서까지 공격할 정도로 격렬해졌습니다. 박정희 독재에 억눌려왔던 것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_그럼 정광민씨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저는 16일 도서관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나니까 친구가 '너는 피신해라' 그러더군요. 그 친구하고 옷을 바꿔 입고 담을 넘어서 피신을 했어요. 그래서 무작정 고성에 있는 대학 친구 집에 갔어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이 내린 것을 보고는 이대로 있어서는 폐가 되겠다 싶어서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지요. 친구들한테 전화해봐도 다들 꺼리고 결국에는 당시 학생과장 집으로 찾아갔어요. 교수님이 '너 때문에 경제학과 폐과 이야기가 나온다, 네가 책임져라'해서 알았다 했더니 곧바로 학생처장한테 전화를 걸더군요. 학생처장의 차가 와서 동래경찰서로 인수인계가 되었습니다. 10월 20일이었습니다."
 
_그렇게 잡혀가서 치도곤을 당했겠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주동자급과 재야인사를 엮어서 북한의 지령을 받아서 일어난 소요 폭동으로 부마사태 시나리오를 짰던 모양입니다. 다리를 철봉에 거꾸로 매달고 물고문을 했습니다. 수건으로 코 입을 틀어막은 다음에 거기다 물을 들이붓는 겁니다. 나는 운동권도 아니었고 배후가 없다니까 제 부친이 이북 피난민이었는데 아버지가 고정간첩 아니냐. 그렇다고 내가 아닌 걸 그렇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날 밤에 세번이나 물고문을 당하고 결국 의식을 잃었어요. 의식을 회복하고 나니까 동네 병원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고 있더군요.
 
그때가 21일쯤이었는데 동래경찰서 유치장에 있을 때 박정희가 죽었습니다. 결국 긴급조치 9호로 구속이 되고 부산에 있는 구치소로 이감이 되고 거기서 긴급조치 해제되면서 12월에 석방이 되었지요. 박정희가 일찍 죽어서 이듬해에 3학년으로 학교에 복학했습니다. 5.17이 터지니까 제가 예비검속 대상자에 올라서 다시 경찰에 잡혀갔습니다. 부마항쟁에 대한 보복이었겠지요. 보안사에 끌려가서 무지막지하게 맞고 계엄법 위반으로 1년6개월 실형을 받은 뒤 81년 3월 3일 전두환이가 취임하면서 가석방으로 나왔습니다."
 
_집안은 원래 좀 살던 집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부친이 월남해서 친척도 없고 뭐 할 게 있겠습니까. 남구 우암동에서 밀가루 공장 다니다가 퇴직하고는 트럭 한대 사서 용달했습니다. 일본인들이 만든 소우리를 막아서 피난민들이 집을 짓고 산 동네인데 영화 '친구'에서 유오성이가 사는 동네가 우암동입니다. 저 어릴 때도 깡패들이 많았고 부산에서 유명한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_그러면 집안에서 기대가 컸을 텐데 대학을 잘리고 미래가 불투명한 시위를 할 생각을 한 건가요?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_일찌기 의식화가 된 건가요?
 
"아주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는데 대학 2학년이 되어서 정동현 교수가 하는 경제사를 들으면서 세상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부마항쟁 전에는 운동권하고는 아무 연계가 없었지요."
 
-81년 가석방되면서는 어떻게 살았어요?
 
"한동안 낭인으로 지내다 84년에 복학을 했어요. 86년에 졸업을 하고 현장활동을 좀 했습니다. 89년 쯤에 지역사회문제자료연구실이라고 단체를 만들었어요. 나중에는 부산노동자료연구실이라고 이름을 바꿨는데 노동운동자료집도 내고 노동조합 조사도 하고 교육도 하고 91년까지 이라는 무크지를 10호까지 냈는데, 이 책이 제법 유명했습니다. 서울 대학가에서도 팔리고 부마항쟁 이후로는 이 활동에 모든 것을 바쳤지요."
 
_뒤늦게 공부를 시작하셨네요.
 
"91년에 사회주의권 붕괴가 일어났는데, 사회변혁을 꿈꾸던 저로서는 운동을 계속한다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노동운동은 충분히 성장해있고. 정치를 한다는 것도 별로 좋지 않게 보았고, 인권변호사인 이흥록 변호사님이 일본 오사카경법대 객원연구원으로 가게 된 것을 좇아서 94년에 교토대학교 경제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했습니다.
 
'현대재정시스템과 정치과정'으로 석사 논문을 썼습니다. 당시 지도교수는 이케가미 쥰이라고, 전투적 막스주의자로 유명했다가 시민사회론자로 바뀐 분입니다. 이 분한테 강의를 들으면서 고대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 오면서 시민들의 권한이 조금씩 늘었다, 대단히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모든 것을 일거에 부수는 변혁은 의미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자본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측면은 사회적 제도를 통해서 제거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재정공부가 의미있었습니다. 2001년에는 나고야대학에서 '북한기근연구'로 박사과정에 들어갔습니다."
 
_왜 갑자기 북한연구를 했습니까?
 
"당시 부산의 운동권 주류가 NL이었기 때문에 NL에 비판적인 저는 왕따 취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5년 3월에 학위를 받고 들어왔더니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서 서울 고시촌에서 살면서 하루 하루 차비를 걱정하며 살았습니다. 결국 다시 이흥록 변호사를 찾았더니 아는 분을 통해 국정원 산하 연구소를 소개해주었습니다.
 
당시 고영구변호사가 국정원장일 때이고 국정원 산하에 북한경제를 연구하는 연구소에 민간인 자격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뀐 다음에는 친노좌파로 낙인이 찍혀서 작년 8월에 쫓겨나듯이 나왔습니다."
 
_노무현 정부 아래서 자리 하나 얻은 것이 없는데 좀 억울하겠어요.
 
"그런 것은 상관없는데, 부마항쟁이라는 것 자체가 부산 운동권의 주류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제가 시작한 일이 되어서 부마항쟁 자체가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 답답합니다. 지금 부산에서는 부마항쟁보다 부산항쟁이라고 합니다. 부마민주화항쟁기념사업회가 부산민주화항쟁기념사업회가 되었습니다.
 
사실 아무도 부마항쟁을 기념하지 않아서 10주년이 되던 1989년 7월에 제가 부마 동기들을 만나고 송기인신부도 찾아가서 자료집도 내고 기념사업회도 만들자고 해서 부마항쟁기념사업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부마항쟁이 뜨자 부마항쟁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부산항쟁기념사업회로 바꿨습니다. 4.19도 있고 6월 항쟁도 있다, 왜 하필 부마냐 하면서 부마를 뺀 것은 역사에서 부마항쟁이 가져야 할 자리를 빼앗는 행위입니다."
 
_부마항쟁이란 무엇이지요?
 
"부마항쟁은 산업화 이후 최초의 시민항쟁입니다. 유신정권에 대항한 최초의 시민항쟁이었습니다. 박정희 18년 독재 동안에도 대학생 시위는 서울에서 많았지만 시민항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게 광주항쟁으로 넘어가고 6월 항쟁으로 넘어가는 의미가 있습니다."
 
_2010년에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해야 한다, 피해자 보상해야 한다 하는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실질적인 파악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동아대 학도호국단장을 지내고 부마항쟁에 적극 참여한 이용수 동지는 영도경찰서에서 무지막지한 고문을 받고 결국 몇 년 뒤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10주년 때 증언을 받은 데 따르면 18일 계엄군이 들어오면서 무차별로 개머리판으로 치고 끌려가고…80년 광주 초기와 흡사합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죽거나 친구와 놀러갔다가 파출소 파괴범으로 몰려서 징역 산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도 30년이 지났는데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으니까 민주화 유공자로 입증이 안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있을 때 진상규명을 하기 좋은 기회였는데 당시 문정수 부산시장이나 송기인 신부가 민주공원 하나 만드는 것으로 끝내버렸습니다. 마산에서 한나라당 이주영의원을 통해 특별법 제정을 준비했는데 미흡한 점이 많아서 부산지역 부마항쟁 동지들이 모여서 부산 유일의 민주당 재선의원, 조경태의원 통해 다시 제출하려 합니다."
 
_정광민씨 자신은 5.18광주항쟁 유공자이지요?
 
"네, 저는 부마항쟁 유공자가 되고 싶습니다. 우선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국가가 사죄한다는 측면에서 공동기금을 마련하고 그걸 공동관리하면서 피해자에 대해 자조하는 데 쓰는 방식의 집단보상 모델이 되면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10월 16일은 부마항쟁기념일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_부산은 상당히 오랜 기간 여도로 알려졌는데 요즘 문재인, 안철수, 조국씨 등으로 인해 야도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부산은 원래 야도입니다. 이제 본모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부산사람이 결심하면 역사가 바뀝니다. 10.16을 보십시오. 박정희 18년 철권통치를 끝냈습니다."
 
                                                                       한국일보 서화숙 선임기자 hssuh@hk.co.kr






▲  서화숙 한국일보 선임기자   © 서울의소리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를 위해 친일파와 손을 잡고 반민족특위를 해산시키고,

사사오입 개현과 3.15 부정선거로 민주주의를 짓밝고,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죄없는 양민과 정적들을 살해한 독재자이다.

그는 권력욕에 미쳐서 친일파와 손잡고, 민주주의를 짓밝고 
결국 국민의 손에 쫒겨난 독재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히틀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이승만은 명백한 독재자이며 그의 역사적 평가 역시 달라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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