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가 간택한 영친왕비 민갑완

김민수 칼럼니스트 | 입력 : 2010/02/20 [14:49]
 만주,한반도에서 러일전쟁 발발 징후가 보이자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는 러시아와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는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도발과 동시에 대한제국 침략의 발판을 굳히고, 대한제국 황성을 공격하여 황궁 경운궁을 점령한 뒤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하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군사 요충지를 강제 점령하였다.

대한제국 영토를 군용지로 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하여 1900년 10월 25일 고조 광무제 칙령 41호에 의거한 대한제국령 독도를 1905년 2월 불법 강점한 일제는 미국과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 영국과 영일동맹,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 독점지배에 관한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을 얻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하였다.1909년 9월 간도침략과 이권 장악을 위해 무효인 을사늑약에 의거 강탈한 외교권을 불법 행사하여 이범윤 간도관리사가 관리한 대한제국령 간도를 청에 불법 양도했다.

1905년 11월 17일 늑결된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박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고자 한 대한국 고조 광무제는 1907년 7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한 제 2회 만국평화회의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네덜란드에 특사(特使)로 파견했고 이상설은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도착했다. 일제가 강제한 을사늑약을 폭로하려 했던 고조 광무제의 계획은 대한국의 자주적 외교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대한국 대표들이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거부당하였다.

만국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네덜란드 언론인 W. 스테드의 주선으로 한 이위종 특사의 대한국을 위해 호소한다는 연설은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다. 일제 통감부는 대한병탄을 위해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7월 20일 고조 광무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 황실 황위 승계 서열 1위 의친왕 대신 어린 영친왕을 황태자 책봉하여 영친왕비 민갑완(閔甲完)을 강제 파혼시키고 일본에 잡아갔으며 7월 24일 군대 해산,사법권·경찰권의 위임,법령권 제정·관리임명권 간섭하는 정미늑약(丁未勒約)을 강제하였다.

고조 광무제는 1919년 1월 21일 독이 든 음료 때문에 경운궁 함녕전에서 붕어하셨는데, 경운궁 대안문 앞,고조어극40년칭경기념비전 앞 3·1 대한광복운동의 배경이 됐다.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강제로 퇴위를 당한 고조 광무제는 대한독립의군부,대한광복군정부 등 대한광복운동의 상징적 구심점이었으며, 대한광복운동조직 신한혁명단,대동단은 고조 광무제,의친왕을 망명시켜 대한광복운동을 활성화하려 하고, 고조 광무제는 고액의 내탕금(內帑金)을 지원하는 등 대한광복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1919년 1월 21일 일제 총독부에 의한 고조 광무제 붕어는 2·8 대한광복선언,3·1 대한광복운동,6·10 대한광복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국내외 대한광복운동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으며, 자주독립적이고 자유민주적인 국민국가의 수립, 대한국의 통일을 위한 평화통일운동으로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으며 광복(光復)이란 병탄당한 대한국 국권의 회복을 의미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은 일제로부터 대한국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은 날이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본 기사 보기:뉴욕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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