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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00년, 100세의 독립운동 할머니

[역사와 사람1] 일제에 맞선 1929년 광주여고보 ‘백지동맹’ 주역 최순덕

인병문 | 기사입력 2010/04/06 [02:21]

경술국치 100년, 100세의 독립운동 할머니

[역사와 사람1] 일제에 맞선 1929년 광주여고보 ‘백지동맹’ 주역 최순덕

인병문 | 입력 : 2010/04/06 [02:21]
▲ 최순덕 할머니(왼쪽)와 반평생지기인 이금주 할머니.     ©인병문

최순덕 할머니는 올해 100세다. 우리 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탄이 된 1910년 경술국치 이듬해 광주에서 태어난 최순덕 할머니. 조국의 식민과 민족 분단 오욕의 100년의 역사를 오롯이 함께한 할머니의 눈빛은 젊은이들보다 더 형형하다.
 
허리가 편찮아 많은 시간 자리에 누워 계시지만, 빛나는 백발에 고운 얼굴, 그리고 총총한 기억력을 바탕으로 한 대화에 100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의 아파트, 할머니 방 침대 머리맡에는 여러 책들과 공책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지금도 틈틈이 책을 보고 필요한 것들을 적는다. 이런 생활들이 할머니의 건강과 총기를 유지하는 힘인 듯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한 축인 광주여고보의 ‘백지동맹’ 투쟁

일제의 황민화 교육과 민족 차별에 항의하며 일어난 광주학생들의 시위와 동맹휴업이 한창이던 1929년 11월 10일 밤 광주의 어느 하숙집, 젊은 학생들이 속속 모였다. 이들은 광주고보와 농고 등 광주지역 학교의 대표들로 계속되는 학생들의 항일투쟁을 더욱 확산시킬 계획을 논의하기 모인 것이다.
 
이들 중에 유독 하얀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광주공립 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학생 대표이다. 남자학교는 대부분 동맹휴업에 들어간 상태, 이들은 아직 수업을 하고 있는 이 여학교의 투쟁 방향에 대해 논의한 뒤 ‘중간고사 거부’로 결정한다. 바로 내일부터 중간고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여학생은 이들과 헤어져 집에 들어가지 않고 동급생인 친구 집으로 향했다. 둘은 밤을 새워 150여 장의 전단지를 만들었다. 다음 날, 학교에 일찍 도착한 이들은 등교생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고 시험이 시작되기 앞서 각 학급을 돌며 칠판에 ‘시험 거부’ 투쟁에 대해 적었다.
 
얼마 후 한 학급에서 함성과 함께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뛰어 나가자 모든 학급으로 이어졌다.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은 ‘구속 학생 석방하라’ ‘식민지 교육 철폐하라’ ‘중간고사 거부한다’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등을 외치며 항의했다.
 
이듬해 이들은 1월 다시 한 번 투쟁을 전개하면서 학생 독립운동의 한 획을 긋게 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한 축인 ‘백지동맹’은 이렇게 전개됐다.
 
이 투쟁의 주역이 바로 당시 19살로 3학년 반장이던 최순덕 할머니다. 할머니는 이후 무기정학을 받고 친구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이 사건은 당시 부면장을 하던, 함께 전단지를 만들었던 친구 아버지의 조치로 사회 밖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묻히지만, 이듬해 1월 학생들은 다시 투쟁을 전개하게 되고 일제는 대대적인 탄압을 하게 이른다.
 
1, 2차에 걸친 ‘백지동맹’ 투쟁으로 10여 명의 학생이 옥고를 치르고, 40여 명의 학생이 학교로부터 무기정학과 퇴학 등 징계를 받았다. 이때 최 할머니는 1차 투쟁으로 무기정학을 당한 상태로 피신 중이었기 때문에 구속을 면했다.

잘못 기록된 ‘백지동맹’의 역사...주역, 독립운동 유공자 인정 안 돼

최순덕 할머니에게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바로 ‘백지동맹’ 투쟁에 대한 정확한 역사 기록이다. 현재 각종 사료에는 할머니가 주역이 됐던 1929년 11월 11일의 1차 ‘백지동맹’에 대한 기록이 누락되어 있고 할머니에 대한 기록도 없다. 그로 인해 할머니는 또한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
 
 광주여고보에서 일어난 1930년 1월의 2차 ‘백지동맹’ 투쟁이 언론에 보도되어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당시 일제 경찰로부터 탄압을 받는 등 각종 기록으로 남아 2차 투쟁이 ‘백지동맹’의 ‘역사’로 남게 된 것이다.

현재 정부의 입장은 당시 언론보도 등 기록이 남아 있어야 유공자 포상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것을 근거로 ‘백지동맹’에 대한 기록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이를 위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였으나, ‘증거 미비’로 보류된 상태다. 할머니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의 이유는 분명하다.

“내 개인적 명예 회복과 어떤 혜택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바라겠어요. 일본의 역사왜곡을 탓하기 전에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해요. 혹독한 일제 치하에서 누가 어떻게 청춘과 목숨을 내걸고 조국 해방을 위해 싸웠는지, 광주여고보의 ‘백지동맹’ 투쟁의 진실이 무엇인지 후대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하지요. 그래야만 나라가 발전하고 국민이 조국을 위해 헌신할 수 있어요.”

“일본의 역사 왜곡 탓하기 전에 우리 역사 바로 세워야”

‘백지동맹’ 투쟁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은 지난 1999년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항일애국지사 최순덕 선생 명예회복추진위원회와 전남여고 총동창회,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등 단체와 각계 인사들의 탄원서와 호소문이 제출됐다. 또한, 당시 투쟁으로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은 인사들의 증언도 이어졌다.

▲ 전남여고 교정에 있는 기념식수와 표지석 앞에서 딸과 함께.     ©인병문
“일본 총칼이 번쩍거리는 시절 우리 학교에 다니던 젊은 여성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항일 투쟁을 벌였습니다. 특히 백지동맹은 학생들이 총칼 대신 싸울 수 있는 반외세 항일 투쟁의 최고의 무기였습니다. 백지동맹은 1929년 11월 11일 광주여고보 중간고사 때 맨 처음 일어났고, 당시 주동자는 최순덕 언니입니다. 최순덕 언니가 동급생인 박 지와 함께 전날 삐라를 밤 새워 만들고 한 보따리 들고 와서 전교생에게 뿌린 것 때문에 백지동맹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사건을 직접 주도했던, 당시 3학년 반장 최순덕 언니가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늘 안타깝습니다. 최순덕 언니에게 국가 서훈이 수여되고 백지동맹에 대한 역사는 새롭게 기록돼야 합니다.”

하지만, 정부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당시 경찰 당국이나 언론보도 등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정부의 이 같은 조치와 달리 전남여고(당시 광주여고보)에서는 1954년 최순덕 할머니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으며, 공식적으로 ‘백지동맹’의 주역으로 기록하고 있다. 2005년에는 교정에 ‘제1회 입학생 최순덕 - 백지동맹 주도로 퇴학, 1954년 11월 3일 명예졸업’의 기념식수와 표지석도 설치했다. ‘잘못된 역사 바로 잡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100세의 할머니의 눈물겨운 호소가 안타깝기만 하다.
 
남편 사별 후 7남 1녀 모두 건실하게 키우고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

최순덕 할머니는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광주에서 아버지 최봉학과 어머니 형연옥 사이에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20년 당시 관직에 있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등교하는 친구의 모습에 반해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설득하여 광주 서석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926년 집안의 이사로 전학한 목표여자공립보통학교 3회로 졸업한다. 27년 광주고보에 입학, 3학년이던 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 현장에 나가 돌멩이를 나르는 등 항일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같은 달 11일 광주여고보의 ‘백지동맹’ 투쟁을 주도, 무기정학에 이어 강제 퇴학을 당한다. 

최 할머니는 50세에 남편과 사별하고도 7남 1녀를 건실하게 키웠다. 혼자 된 이후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딸은 교장으로 정년을 했으며, 여섯째 이재균 씨는 광주에서 치과를 운영하며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에 참여하고 있고, 막내 재민 씨는 현재 광주광역시 교육청 부교육감으로 있다. 6남 재균 씨는 할머니에 대해 남다르다. 그래서인지 사회봉사에도 적극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주위 어려운 사람에게 무상 치료로 유명하다. 재균 씨는 “아버지는 대서소를 운영했는데, 병석에 오래 누워 계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찍 작고하셨지요. 어머니가 행상을 하시면서 7남1녀를 어떻게 다 대학에 보내셨는지 지금도 상상이 안 됩니다. 일제 강점기에 ‘백지동맹’을 이끌었던 그 기백으로 자식들을 교육시킨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최순덕 할머니는 사회봉사에서도 옛 ‘백지동맹’의 정신이 발휘된다. 남편 사별 후 어려운 형편으로 성당에 다닌 후 할머니는 몇 년 전까지도 월산동 성당 사회봉사 조직에 들어가 지극 정성으로 불우이웃을 도왔다.
 
성당과 주위에서는 최 할머니를 비롯한 4명의 할머니 봉사단원을 일컬어 ‘4총사’로 불린다. 이들의 손길은 나병환자, 교도소 재소자, 장애인, 극빈자 등 지역사회 불우계층에 희망을 안겨줬다. 할머니의 사회봉사 철학은 소박하다.

“우리가 힘을 모아 주변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을 조금만 도와주면 그들의 생활은 훨씬 나아질 것이고, 그들의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 만족한 생활을 하게 되면 그들도 또한 주변의 불우이웃을 돕는 일에 나서지 않겠어요. 그러다보면 이웃사랑이 온 사회에 널리 퍼질 것이라는 확신이 든 것이지요. 이 사회가 사랑이 넘치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백지동맹’의 주역 학생 최순덕에서 ‘통일 할머니’로

서슬 퍼런 일제에 맞서 ‘백지동맹’을 주도했던 학생 최순덕의 기상은 통일운동으로 이어진다. 할머니는 양심과 신념을 지키며 수십 년을 감옥에서 보낸 비전향장기수 선생들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1990년대 말 특사로 풀려난 장기수 선생들에게는 연고자가 거의 없었으며, 생활공간도 마련하기 어려웠다.
 
광주지역의 경우 몇몇 뜻있는 인사들이 ‘통일의집’을 마련하여 이들의 안식처를 마련했다. 할머니는 이들에게 ‘어머니’로 불리며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추운 겨울 마땅한 옷차림이 없는 이들에게 점퍼를 사준 것은 지금도 아련한 기억으로 남는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채택 이후 결국 이들은 북으로 돌아가고, 할머니에게는 아쉬움의 인연으로 남았다. 


▲ 2000년 북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김동기 선생(가운데)과 최순덕 할머니(왼쪽), 그리고 오른쪽은 이금주 할머니.     ©인병문

“살아서 평양에 가면 이들을 꼭 보고 싶어요. 광주에 있을 때 많이 못해준 것이 가슴에 남아요. 이들이 평양에서 잘 살길, 정말 고생만 한 사람들인데 여생을 행복하게 보냈으면 해요. 더러는 북에 가서 늦장가도 가고 자식도 얻었다는 얘길 들었는데 진심으로 축복을 드려요. 통일에 그날 모두 만나고 싶은데 글쎄.......”

할머니에게도 명함이 있다. 100세의 할머니에게서 받은 명함은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광주지부) 고문 최순덕’이다.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는 2000년 10월 민권운동단체들이 한데 모여 결성된 통일운동 단체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채택한 6.15남북공동선언을 전국민적 범위에서 이행하고 통일을 앞당기는 데 기여할 목적으로 출범했다. 할머니는 서울에서 열린 출범식에 직접 참석, 축사를 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할머니는 광주지역 통일행사에 적극 참석하면서 웃어른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 2006년 6월 광주에서 열린 6.15공동선언 6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에 참석한 안경호 북측단장(왼쪽)과 할머니.     ©인병문
할머니에게는 특히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바로 2006년 6월 광주에서 진행된 ‘6.15공동선언 6돌 기념 6.15민족통일대축전’이다. 이때 할머니는 안경호 단장을 비롯한 북측대표단을 직접 만나 격려하고 통일대축전 성공을 축원했다. 할머니 집에는 당시 안경호 단장 등과 함께 찍은 사진이 크게 걸려 있다. 구순의 남쪽 할머니와 칠순의 북측 할아버지가 굳게 잡은 손은 온 겨레의 통일 의지를 상징하기에 충분했다. 방년에 일제에 항거했던 처녀가 구순의 할머니가 되어 민족의 분단을 아파하며 통일을 염원하는 ‘통일 할머니’가 된 것이다.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사람들

‘노무현 대통령’. 이것은 할머니 머리맡에 놓여 있는 책이다.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읽고 있다. 할머니에게는 잊지 못할 사람이 많다. 누구보다도 격정의 삶을 살고 또 장수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겠다.
 
서울에 사는 박해전 선생과의 인연은 10년 정도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각별하다. 국가 서훈 탄원 작업을 열심히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도 대단하다.
 
“참 많은 도움을 받았지요. 그리고 그렇게 정이 많을 수가 없어요. 가족들을 데리고 몇 번 찾아왔는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지요. 해 맑은 웃음과 양심적으로 사는 모습은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기도 해요. ‘아람회’ 사건으로 고생도 하고, 의지가 대단한 분이지요.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할 것이라고 믿지요.”

월산동 성당의 ‘4총사’ 중 한 사람인 이금주 할머니는 반평생 지기이자 동지다. 이금주 할머니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유족회 회장이다. 40여년 전 성당에서 처음 만나고 지금까지 사회봉사활동과 일제 배상 운동을 함께 하고 있다.
 
“동생은 지금도 절대로 낮에 눕질 않아요. 그렇게 열심히 일제의 피해를 진상규명하기 위해 뛰고 있지요. 눈물 날 정도에요. 그렇게 고운 얼굴에서 어떻게 그런 끈기가 있는지 몰라요. 아마도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 같아요. 총기도 대단하지요. 하루 빨리 결실을 맺어 평생의 한을 풀고,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할 텐데.”

김용임 전 전남여고 총동창회장은 할머니의 평생 소망을 학교 차원에서 풀어준 은인으로 기억된다. 바로 전남여고 교정의 ‘백지동맹’ 기념식수와 표지석 때문이다.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총동창회장에 취임했다면서. 그리고 내가 특별히 부탁한 것도 아닌데 학교에 표지석을 세운다는 것이에요. 나라에서 바로 잡지 못하는 ‘백지동맹’의 진실을 학교에서나마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해준 김용임 회장은 평생 내 한을 풀어준 은인이지요. 정말 고마운 사람이에요.”
 
“젊은이들은 나라와 민족, 특히 하루빨리 통일을 이루기 위해 헌신해야”

서슬 퍼런 일제에 맞서 ‘백지동맹’을 주도했던 여학생 최순덕. 일제 항거의 기상과 사회봉사정신, 그리고 민족통일의 염원으로 100년을 살아온 할머니가 세뱃돈이라며 1만원을 주시며 하시던 덕담과 불편한 몸을 이끌고 문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하며 하신 말이 평생 가슴에 남을 듯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작은 성의지만 이 돈은 복돈이니 잘 간직해요. 그리고 하시는 일 잘 되길 빌게요. 늘 건강하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주세요.”

“젊은이들은 개인과 가정만 생각해서는 안 돼요. 나라와 민족이 있어야 내가 있고 가족이 있는 거예요.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고 늘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며, 특히나 환갑이 넘도록 허리가 잘린, 민족의 분단을 마감하고 하루 빨리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헌신해야 해요. 나라와 통일을 위해 투신하는 젊은이가 되길 빌게요.”
 

▲ 2001년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정기총회에 참석해서 축사를 하고 있는 최순덕 할머니.     ©인병문
<인병문 기자>
원본 기사 보기:사람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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