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무릎 꿇고 사죄하고 배상하라”

[역사와 사람2] 이금주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유족회장의 40년 투쟁

인병문 | 입력 : 2010/04/11 [20:00]
▲ 1929년 광주 백지동맹 투쟁의 주역인 올해 100세의 최순덕 할머니(왼쪽)와 이금주 할머니.     ©인병문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 병탄이 된 지 100년이 되도록 일본은 진정으로 사죄를 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식민지배와 일본군위안부, 근로정신대, 강제 징병과 징용 등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해 무릎 꿇고 사죄하고 일체의 손해에 대해 배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정부도 적극적인 외교 노력을 해야 합니다. 뼈아픈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이를 교훈으로 삼아야 후대들에게 떳떳하게 나라의 앞날을 맡길 수 있습니다.”

올해 91세 할머니 이금주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유족회 회장의 절절한 호소다.

‘강제동원 약 800만 명, 일본군 위안부 약 20여만 명, 강제징병 40여만 명, 원폭 피해자 약 7만여 명, 우키시마마루 폭침 약 6천여 명, 강제징용 미지급임금 약 2억4천만 엔(1950년 기준).......’

우리 민족이 겪은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과 관련된 대략의 피해 현황이다.

‘광주 천인소송’ ‘우키시마마루 폭침사건 소송’ ‘관부재판(종군 위안부) 소송’ ‘B C급 전범(포로감시원) 소송’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도야마 후지꼬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여자근로정신대 소송’......우키시마마루 폭침사건은 1945년 8월22일 일본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을 태우고 귀국길에 오른 우키시마마루가 아오모리현을 출발해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고 일본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 24일 마이즈루항 입구에서 폭발 침몰한 사건으로, 이는 단순 침몰사건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 조직적으로 계획된 고의적 폭침 의혹이 있다.

1992년부터 이금주 할머니가 대표가 되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진행했거나 또는 진행 중인 일제강점 하 우리 민족이 당한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명칭들이다. 할머니는 이들 소송을 위해 지금까지 80여 회를 일본에 다녀왔다. 가슴 아픈 노익장 과시다.

대 일본정부 상대 7건의 소송을 하며 80여회 일본 방문...하지만 19번 기각의 아픔

할머니는 이들 7건의 소송을 진행하면서 총 열아홉 번에 걸쳐 기각의 아픔을 겪었다. 일본 최고재판소의 결정까지 난 재판이 여럿이다. 할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이었어요. 부들부들 떨리고 이가 갈리고. 나를 비롯한 소송 원고단의 아픔만이 아닌 직접 피해를 당한 선배들께 고개를 들 수 없는, 일제에 당한 우리 민족 전체가 다시 한 번 치욕을 당하는 현실에 나라가 부끄럽고 원망스럽기도 했지요. 특히, 앞으로 나라를 책임질 우리 후대들에게 면목이 없었어요.”라고 회고한다.

잠시나마 첫 소송의 설렘도 있었다.
1992년 2월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천백여 명의 피해자를 모아 원고단으로 하여 일본 정부를 상대로 첫 소송을 제기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바로 ‘광주 천인소송’이다. 

“일본 건국 이래 첫 집단소송이라며 일본 언론이 떠들썩했지. 법정에 들어섰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많은 응원이 됐지요. 당시 일본인들이 우리를 돕는다고 ‘조선과 조선인들에게 일본국의 진사와 보상을 청구하는 재판을 촉진하는 회(촉진회)’라는 모임을 결성하고 많은 준비를 해줬거든요. 꼭 승리해서 민족의 원한을 풀겠다고 다짐했지요. 한편으로는 ‘내가 왜 일본 법정에 서야 하나’ 하는 서글픈 마음도 있었지만.......”


지루한 재판 투쟁을 이어가면서 첫 승소의 기쁨도 맛보았다.
1998년 이금주 할머니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 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법원으로부터 일부 승소를 받아낸 것이다. ‘종군 위안부 소송’이다

“그동안 밤낮으로 고생한 보람을 느꼈지요. 또한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환희를 맛보았어요. 제기한 소송에 대한 전부 승소는 아니었지만, 법적으로 위안부에 대한 국가 차원의 개인 배상의 시초가 되는 아주 상징적 의미가 있었지요. 이렇게만 하면 우리 민족이 겪은 모든 고통에 대해 사죄와 배상을 받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었지요.”

“최봉태 변호사와 송두회 선생은 비참한 조국의 역사 바로 잡는 애국자”

엄청난 비용과 시간, 노력이 들어가는 재판 투쟁을 전개하며 할머니는 평생에 잊지 못할 고마운 사람을 만난다. 바로 최봉태 변호사와 재일동포 송두회 선생이다. 최봉태 변호사는 일제 강점 하 희생자와 유족 등의 각종 청구 소송을 전담하고 있다. 그것도 대부분 무료 변론이다. 또한 각종 행사에도 참석해 물심양면으로 생활형편이 어렵고 몸이 노쇠한 이들을 돕는다. 특히, 2004년 2월 피해자들이 그토록 원하던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송두회 선생은 92년 첫 재판을 성사시키는 등 대 일본 재판 투쟁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줬으며, 다양한 재판을 진행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송두회 선생은 촉진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피해자 일본 초청사업, 강연회와 각종 집회, 기자회견, 위령제 등을 조직하고 일본의 양심을 깨우는 데 일조했다. 송두회 선생은 아쉽게도 지난 2002년에 별세했다.
 
▲ 1992년 광주천인소송을 위해 일본을 방문하여 송두회 선생 등과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     ©인병문


“최봉태 변호사님은 국내에서, 송두회 선생님은 일본에서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지도자요, 버팀목이죠. 이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많은 재판과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상상이 안 돼요. 나 같은 늙은이가 무슨 재주로 그런 일을 했겠어요. 법률적 검토나 행정 처리, 그리고 일본에서의 여론 조성과 공문서 처리 등을요. 최 변호사는 심성도 얼마나 착한지 할머니들을 그렇게 잘 챙겨줄 수가 없어요. 꼭 어머니를 모시는 마음으로 할머니들을 대하지요. 자식 같은 생각이 들어요. 송두회 선생님은 일본에서 외롭게 사시면서 조국의 비참한 역사를 바로 잡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요. 송 선생님이 나를 만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제기했지요, 그런 연유로 재판이 시작됐고, 일본에서 모든 일을 도맡아 해주셨지요. 또한, 인품도 뛰어나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 분을 존경하게 되었지요.”

이금주 할머니의 역사 바로 세우기와 대일본 투쟁의 시작은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할머니는 이때부터 전국 각지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나누고 가끔 만나 활동계획 등을 논의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당시 독재정권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일협정으로 민족정기와 식민지배에 대한 민족의 원한을 송두리째 팔아먹은 박정희 정권과 광주 시민의 피를 먹고 탄생한 전두환 정권은 이들의 움직임을 가만두지 않는다, 결국 이들의 활동은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1988년부터 광주유족회 회장을 맡아 피해자 아픔을 함께 나누며 재판 진행

1987년 6월 항쟁 이후 성장한 민주주의는 일제시대 강제동원피해자와 유족들의 활동 반경도 넓혔다. 이들은 88년 6월 서울에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를 정식으로 출범시키고, 이금주 할머니는 광주 유족회장을 맡게 된다. 할머니는 이때부터 모든 정열을 쏟는다. 피해자 발굴과 상담, 회원 가입, 그리고 여론 조성, 재판 준비 등 나이에 믿기지 않는 활동을 펼쳐간다. 휴일도 국경일도 없이 노구를 이끌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고 밤샘을 밥 먹듯이 하며 재판을 이끌어 간다. 결국 몇 차례 쓰러지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2004년 2월 13일은 잊지 못할 날이다. 줄기차게 요구해온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날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일협정 문서공개 요구 100인 소송’ 1심에서 승리한 날이기도 하다.

“그날은 한일협정 문서공개 소송 1심 판결이 있는 날이었어요. 행정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변호사 회관에 모여 판결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듣고 있는데 국회에서 특별법이 통과됐다는 소식이 날아온 거에요. 얼마나 기뻤던지 모두가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지요. 그동안 힘들었던 모든 것들이 눈 녹듯 씻겨졌지요. 그리고 재판도 이겼지요. 경사, 경사 해도 그런 경사가 없었지요. 지금도 생생해요.”

지지부진하던 특별법 제정에 이금주 할머니의 유서가 큰 역할을 한다. 할머니는 2003년 12월 29일 국회 법사위원 전원에게 보낸 유서를 통해 “우리는 일본침략전쟁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아들을 잃었고, 누이를 잃었고, 딸을 잃었으며, 형과 아우를 잃었습니다. 더 이상은 우리를 방치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이 유서를 받은 최용규 법사위원장은 “유서를 거두시라. 우리가 법사위를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하고, 결국 특별법은 다음해 2월 13일 본회의를 통과하게 된다.

결혼 2년 만에 남편 징용 끌어가...‘전사 통지서’와 함께 67년의 고난의 삶

이금주 할머니는 1920년 평양에서 아버지 이재신과 어머니 김명자 사이 6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할머니는 남산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열아홉 살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온 후 21살에 다섯 살 위인, 좋은 집안의 모범청년으로 소문난 김도민과 혼인,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할머니는 2년 후 아들을 낳고 좋아하던 남편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남편은 4대 독자이면서 조실부모해 사랑을 많이 못 받아서 그런지 아들을 얻고 얼마나 기뻐하던지. 이 세상에서 득남은 자기 혼자 한 것 같이 좋아했어요.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조그만 애기 몸을 손 뼘으로 재보면서 ‘어서 커라, 어서 커서 아버지 하고 불러 봐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행복도 잠깐, 그해 11월 남편은 일본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간다. “남편과 헤어진다는 생각에 온 몸에 기운이 빠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누워 있는데 남편이 방문을 열고 나가는 거에요. 밤 11시. 마지막 열차를 타러 나가는 남편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돌아요. 한 10번 정도 들리던 그 소리가 멀어지면서 남편과의 이별이 시작됐지요.”

남편과 헤어진 후 할머니에게도 정신대 소집장이 전달된다. 철모르던 할머니는 정신대로 가면 남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본군인의 꼬임에 빠져 지원할 것을 아버지에게 말한다. 하지만 세상 물정을 알던 아버지는 불호령으로 허락하지 않고 할머니는 야속한 마음에 3일간을 운다. ‘만약 그때 정신대에 지원했더라면......’ 할머니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끔찍할 뿐이다.

▲ 할머니는 남편의 전사통지서를 65년째 간직하고 있다.     ©인병문
징용에 끌려간 남편에게서 오는 편지는 할머니의 가장 큰 기쁨이자 희망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소식이 두절되고 그렇게 세월은 흘러 1945년 해방을 얼마 앞둔 4월 어느 날, 날아온 건 남편의 ‘전사 통지서’. “하늘이 무너졌지요. 눈물도 안나오고 손발을 움직일 수 없었어요. ‘아이고’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지요. 그런 고통을 당한 사람이 저뿐이겠어요. 수십만 명이 나와 같은 고통을 당했을 것을 생각하면, 일본 놈들 다 죽여도 한이 안 풀릴 것 같아요.”

아이가 커가면서 남편의 대한 그리움은 더해갔다. ‘엄마 아버지가 뭐야’ ‘엄마, 난 왜 아버지가 없어?’ 라고 말하는 아들을 볼 때마다 할머니는 눈물을 훔쳐야 했다. 그런 세월이 지금까지 꼭 예순일곱 해다. 이제 그 아들도 69세,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됐다.

쌀쌀한 바람이 봄이 옴을 시샘하는 3월 하순, 광주시 남구 진월동의 허름한 단독주택 2층.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의 사랑방이자 사무실인 이 곳에서 할머니는 오늘도 빼곡히 쌓인 서류들과 씨름 중이다. 일본에 보내야 할 문서 작성도 일본어를 잘 할 수 있는 할머니가 도맡아 하고 있다. 벽에는 중요한 문서들이 촘촘히 붙어 있고, 책장에는 각종 자료들이 빼곡하다.

“정부는 대 일본 자주외교로 독도문제 해결하고 강제 징용 배상 받아내야”

최근 다시 불거지고 있는 일본의 독도 대응에 대해 할머니는 단호하다. “일제 35년의 철천지원수가 기만적인 한일협정으로 우리 민족에게 두 번째 고통을 주더니, 이제는 독도 문제를 걸고 나오는 걸 보면 억장이 무너져요. 하지만 이는 일본의 잘못만은 아닐 것에요. 우리 정부의 잘못된 대응이 오늘의 상황을 초래했지요, 잘못 끼워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부터 말이에요. 나라가 줏대 있게 국제사회에 대처해 나가지 못하면 미국에 그렇듯 일본에게도 이리저리 휘둘리고 말 거에요.”

또한 4조 원대(1950년대 기준 2억8천만 엔) 일제 강점 하 강제징용 근로자들에 대한 미지불임금과 관련해 할머니는 “우리 정부가 일본을 대신해 국민의 세금으로 지급하겠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굴욕적 행태”라며 “일본에 예치된 공탁금 환수에 적극 나서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주고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금주 할머니는 젊은이들에 대한 회고와 당부도 잊지 않았다. “언젠가 서울에서 매주 진행되는 수요집회 때지요.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집회를 하고 있는데 뒤로 학생들이 쭉 서는 거에요. 그리고는 ‘할머니 힘내세요. 뒤에는 우리가 있습니다’하고 외치는 거에요. 얼마나 힘이 나던지.......젊은이들은 민족과 나라의 희망이에요. 역사를 바로 알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를 개척할 책임과 권한이 있어요. 조국의 식민과 분단의 역사를 청산하고 민족 번영의 찬란한 미래를 열어가는 데 젊은이들의 힘과 지혜를 믿어 의심치 않아요.”

구순의 나이에도 보기 어려운 고운 자태와 국화 꽃 같은 인품, 꼿꼿한 성격과 깔끔한 일 처리로 주위에서 늘 존경을 받는 이금주 할머니.
 
전기호 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장은 “참여정부 시절에 위원장을 하며 가장 열심히 활동하시던 이금주 회장님을 여러 차례 만났지요. 그런데 그렇게 신사적이고 인품이 뛰어날 수 없었어요. 고령에도 불구하고 총기와 활동력이 대단해 위원회뿐만 아니라 관련 단체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지요. 하루 빨리 그 분들의 한을 풀고 우리 민족이 통일되는 기쁨을 함께 맛보았으면 해요.”라며 할머니에 대해 회고한다.

국치 100년을 맞는 올해, 가슴에 평생의 한을 간직한 채 한 해에도 몇 명씩 눈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는 피해자와 유족들의 한, 우리 민족의 아픔이 하루 빨리 해소되어 이금주 할머니가 환히 웃는 날을 기대해본다.
 
▲ 자료와 문서 등으로 꽉 찬 사무실 겸 연구실인 할머니의 생활공간.     ©인병문

 

<인병문 기자>

원본 기사 보기:사람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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