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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agora)는 '광장'으로서 살아 있는가?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3/09/25 [00:23]

아고라(agora)는 '광장'으로서 살아 있는가?

서울의소리 | 입력 : 2013/09/25 [00:23]




아고라(agora)에는 '영광(榮光)의 시절'이 있었다. 필자는 그 시절의 아고라를 모른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의 주요 현안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눴다고 한다. 여론을 주도하는 등 화려하게 꽃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설마 그랬을까?' 싶은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으로 여겨진다. 그런가 하면 아고라에는 '핍박(逼迫)의 시절'이 있었다. 물론 필자는 그 시절의 아고라도 모른다. '미네르바 사건'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탄압 이후 아고라에서 글을 쓰던 많은 이들이 '사이버 망명'을 떠났다고 한다. 

지금의 아고라? 앞선 시절들을 모두 겪은 많은 분들이 지금의 아고라를 두고 '쇠락(衰落)'했다고 말한다. 쇠락, 참 서글픈 말이다. 그러고보면 필자의 아고라 생활은 불행한 편이다. 그 아름다운 영광의 시절도, 저 유명한 핍박의 시절도 겪지 못했으니 말이다. 지금의 아고라, 쇠락의 시절을 겪고 있는 아고라는 어떠한가? 과연 아고라가 그 이름에 걸맞은, '광장(廣場)'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가? 
현 시대의 인류는 서로 다른 수많은 목소리를 내고 있고 이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계속될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 시대가 당면한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다양한 목소리들을 잘 조화시켜서 불협화음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화음을 만든다는 것은 균일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서로 다른 음악적 모티프들이 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 까닭은 각 모티프가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결과적으로 상호작용을 한 결과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中 - 


아쉽게도 지금의 아고라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과거에 있었던 '핍박'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외부의 탓으로 돌리기엔 내부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고라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공간' 자체가 지나치게 '편향적'이고, '배타적'이다. 상대방을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진영논리'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에 보여지고 있는 진영논리에 근거한 배타성은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욕설과 비방, 악성 도배글이 판을 치고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쫓아내고, '균일성'을 지향하는 것은 '파시즘'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러한 양상의 하위 문화는 어느 집단에나 존재한다. 다만, 그 정도가 일정한 선을 넘어서면 그 집단은 무너지고 만다. 자체적으로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감히 판단하자면, 아직까지는 하위 문화가 아고라 전체를 집어 삼킬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화 능력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감사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꿋꿋하게 글을 쓰고 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소비하고 또 재생산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상호작용 능력이 광장이 갖고 있는 특질이라고 보았다. 서로 대등한 지위로 만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다양성의 보존을 모임의 목적으로 삼는 공간 말이다. 광장은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까(우리가 그러한 광장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별적인 정체성들이 배타성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들과 함께 존재하기를 거부하는 태도로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주장이라는 미명하에 다른 정체성들을 억압하는 경향을 버리고, 자신의 독특함이 꽃필 수 있는 다양성이라는 여견을 유지하려면 바로 다른 정체성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지그문트 바우만,『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中 -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아고라는 그 이름 그대로 '광장'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야 한다. 그리고 각자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마음껏 낼 수 있어야 한다. 민주당을 지지하든, 새누리당을 지지하든, 안철수를 지지하든 혹은 특정한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 의사를 갖지 않은 사람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화음'이라는 것은 '균일성'이 아니라 각 모티프가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결과적으로 상호작용을 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입장보다 중요한 건, '태도'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말이다. 특정한 정치 세력에 대한 지지 여부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그 판단을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러한 진영논리는 결국 '배타성'을 낳고, 이러한 배타성은 다른 정체성을 억압하고 결국 다양성을 해(害)한다. '광장'을 '광장'이 아닌 곳으로 만든다.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다. 타인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대화와 토론의 여지가 만들어진다. 그러한 '준비' 없는 주장은 듣기 싫은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상호 작용'이 얼마나 활발히 이뤄지느냐에 '광장'으로서 아고라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그 몫은 결국 광장에 모인, 광장이 제대로 기능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것이다.

필자는 '아고라'를 다 알지 못한다. 필자가 말하는 '아고라'는 한 단면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지금의 아고라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다양한 시선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런 시선들이 마음껏, 자유롭게 이야기되길 기대한다. 그럴 때, 아고라가 진정으로 '광장'으로 살아있는 것이라 믿는다. 

P.S. 이런 말씀들을 해주셨어요.











'버락킴' 그리고 '너의길을가라' - 어소뷰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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