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일본국적표기' 애국인가? 반역인가?

'역적'을 성토하지 않는 자 역시 '역적'

비단뱀 | 입력 : 2013/10/06 [17:24]
 

한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일본 국적표기
 
2013년 10월 5일 오전 한국엔 미국에서 날아온 소식하나에 경악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아니 어쩌면 이로서,  두 가지의 성향에 대한 것이 재조명 필요없이 한 가지로 판명되는 계기마련일 수도 있다.  1918년 미국이 시민권자등 미국거주 남성들 대상으로 1차대전 징집 자원 파악했는데 징집서류에 한국의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이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했다는 자료가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에 의해 공개된 것이다. 영문명, 생년, 입항기록등 관련 60개 문건이 모두 일치하여 우남 이승만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요즘 한국은  (구)뉴라이트의 교과서 포럼, 역사교실을 통해 고대사부터 반민족, 반민주적인 편향,  왜곡으로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역사는 사실과 왜곡이 공존한다. 당시당대의 당사자, 측근이 아닌 이상은 우린 기록에 의존하는데 GH, 김무성, 이명희, 유영익으로 인해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재조명이 커지던 차다.
 
더구나 고교역사교과서 검증단계에서 GH는 각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극찬양하는 유영익을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임명한 시점의 우연치곤 정말 묘한 타이밍에 이승만의 친일성향사실이 공개되었다. 
 
일개인의 인생, 사상을 보자면 성장배경과 시대배경이라는 상황전개를 통한다. 더구나 역사를 조명할 때 최대한 균형적이며 객관적인 올바른 태도가 필요한 것은 기본일 것이다. 거짓이 진실로 포장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 것은 반역행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산 자유총연맹 광장에 설치된 이승만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인사들...
두 갈래. 이승만을 항일독립운동가로 영웅시하는 측면에 뉴라이트(시대정신), mb정권부터 현 GH까지 정당으론 새누리당 지도층과 같은 성향의 학자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을 보면...
 
첫째, 한일합방이라는 시대적 배경탓에 조선인은 무국적자인 상태로  일본국적을 취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둘째, 반러 반소인 반공정신이라 남쪽 정부구성을 강력히 주장한 철저한 민족주의자며 자유주의자, 반미주의자라는 것.  
 
셋째, 고종폐위를 주장한 것은 왕정시대타파라는 평등사상가, 철저한 기독교인, 이토록 단점, 실책없는 훌륭한 정치인이라는 소위 보수편 이야기다.
 
다른 견해는 앞선 내용에서 보이지 않는 내용을 더하여 친일친미파로 포괄하여 보는 측면이다. 객관적 사료기준하에 이승만은 매국노라는 진보의견이다. 
 
첫째, 러일전쟁때 이승만은 일본승리를 적극적으로 장담 옹호. 미국에 언론에 왜 자신은 친일대표단체인 일진회대표라고 소개했느냐다.
 
둘째, 민족주의자라면서 일제침탈 강탈엔 왜 우호적이었나라는 반문이 생긴다. 그 실례가 반민특위 해산이다.
 
셋째, 자유주의, 평등주의자라면서 왜 헌정질서 파괴했나다. 단지 반공주의자라서 남한 단독정부수립했나 ? 남한단독정부수립은 북한단독정부 수립 이후의 일이다.
 
물론 이 진행과정에 미,소의 합작에 남북분단 현실있었음을 배제하진 않는다. 반미주의자였다면서 미국의 거슬림의 눈총을 받았다면서 어떻게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대통령이 되었느냐다 !! 김구선생님 암살과 그 배후 사실을 보면 이승만은 반미가 아닌 친미주의자임을 속일 수가 없다는 것 아닌가 ?!
 
한일합방이후 무국적국으로 인식되어 해외여행중에 국적이 다양하게 표기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승만의 일본국적표기 타당하다는 보수논리가 안 통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다른 항일독립운동가들은 당당하게 국적을 '코리아'로 표기한 일들이 많았다. 미국에서 공개된 기록에 의하면 대표적으로 도산 안창호선생이시다. 이승만이 투철한 항일독립운동가였다면 일본국적표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란 것이다. 
 

당시 재미동포들도 국적을 중국, 조선-일본, 한국으로 표기하는데 하물며 항일독립운동 중심에 있다는 사람이 자신의 조국을 숨긴다는 것이 통할 수 있다고 보느냐다 !!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 아닌가!
 
1875년生의 이승만의 발자취를 국내외적인 자료토대로 되짚어보자. 연표를 통해 흐름을 보자.
 
1984년 동학혁명 -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 1896년 독립협회 - 1898년 만민공동회 - 1904년(러일전쟁)의 유신회가 일진회로 진보회(동학배신자가 설립)와 통합 - 1905년의 을사늑약 - 1907년 헤이그 밀사, 고종퇴위 , 일진회피습 - 1908년 대한협회(일진회를 역적으로 규명 <=심산 ), 동양척식회사 설립 - 1909년 일진회 매국성 기승 - 1910년 한일병합 - 1918년 이승만의 일본국적표기 - 1919년 우드로 윌슨 미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의 한국 위임통치 청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 선출 - 1921년 상해임시정부에서 탄핵당하는 이승만 - 1945년 해방, 유엔설립 -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 1949년 초대 대통령 - 하야

이승만 동상 건립 반대 시민들이 동상 모형을 부수면서 반대 시위를 하였다.  


일제침탈이 강도높아지면서 유생들은 민족의식 고취와 함께 계급타파, 구습타파를 부르짖으며 구국운동과 함께 애국계몽도 병행한다. 구국위해 친일모임의 대표적인 '일진회'와 맞서 싸운다.
 
그러나 한일병합으로 인해 조선에서의 해방 실현이 불가함을 안 유생들과 부호들은 만주로 이동한다. 대표인물이 민주당 이종걸의원의 조부이신 이회영선생이시다. 동학혁명을 한 자가 사리사욕위해 친일부역자로 배반하기도 했으며, 대신들은 일관료들과 결탁, 민족을 배반하고 국가를 헌납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이승만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친일단체가 바로 을사늑약을 적극 찬성한 '일진회'였다. 한일합방이후 매국행위는 극에 달한 일진회였다.
 
항일독립운동이 만주에서 세계 각 나라로 확산되면서 외교중심의 독립운동이 가장 활성화한 나라가 미국이었고 그 중심에 이승만이 있었다. 1905년 흔히 고종밀사로 이승만이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면담한 사실이 있다. 이 때,  당시 뉴욕헤럴드 트리뷴 등 미국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과 윤병구는 “우리는 황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라는 단체의 대표자”라면서  “황제는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대한제국과 고종을 적극 부정했다. 
 
뉴욕헤럴드 트리뷴은 “러시아 사람들은 줄곧 적이었고, 우리는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고 있는 것에 기뻐한다”는 윤병구의 말과 함께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이들은 일본을 주인으로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이 때 고종밀사로 간 것이 아니라, 고종퇴위 요청하러 간 것 아닌가싶다.
 
1945년 4월2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회의가 열려 유엔 헌장이 채택되고 유엔이 창립됐다. 이 회의 참석국들은 거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쪽에 가담했던 국가였다. 특히 영토가 독일 점령 아래 있던 런던의 망명정부들도 대부분 회의에 초청되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주장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도 초청받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기에 상해임시정부에서는 대표단을 구성했다. 단장은 부주석인 김규식 박사, 부단장은 조소앙 외무부장, 단원은 정환범 차장으로 이들 3인( 남북전쟁시 납북됨, 이승만과 대척점에 있던 3인)은 중국 정부에서 발급한 여권도 받았으며 중국 정부로부터 경비로 사용할 달러 대부승인까지 받고 있었다.
 
미국 국무부는 재미 한국인 대표도 이 대표단에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재미 한인 대표로 이승만·김용중·한길수 3인을 임시정부 대표단에 합류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들 3인은 서로 반목하는 사이였으나 김용중과 한길수는 미국무부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그런데 이승만이 이들과 함께 대표단에 참여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대표단 참석이 무산됐으며 한국이 유엔의 창립회원이 되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보수집단은 이에 대해 어떤 반론을 줄 것인가? 통탄할 일 아닌가 ? 만약 이때 한국이 유엔의 창립회원국이 됐으면 개별적인 국교 수립 없이 유엔 회원국들의 승인을 자동적으로 받아, 임시정부는 해방된 조국의 합법적인 정부로 당당하게 귀국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그 거부만 없었더라면 ! 1945년 말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 결정도 나올 수 없었을 것이고 친일파척결도 가능해졌을 것이고, 동족상잔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과 다른 한국의 가치속에서 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고종밀사로 파견설이 있는데 민족정신보다는 일본과 미국을 등에 업고 초대 한국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한 고통의 남북전쟁시 빨갱이 타령으로 자신을 지킨 기회주의자임이 이승만의 행보통해서 확인된다.
  
그래서 분단 유도되는 단초에 동참한 이승만 아닐까 싶은 추정하게 된다. 말로서 자유평등을 외치는 것보다 언행에서 베어나오는 것이 더 솔직하고 신뢰가 가는 것이다. 평가를 떠나서 역사적 사실을 보니, 두 견해에서 이승만은 친일친미 매국노가 더 가깝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한국전쟁당시 '나홀로 피신'하고 피난 길에 안전하다고 국민을 속인 것도 부족해 서울에 남아있던 국민향해 빨갱이 선동을 한 것 보면 이승만은 더 더욱 기회주의자였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매국노임을 강하게 인정해도 부족할 것이다! 
 
이런 이승만이 '건국 대통령'일 수 있는가?
우리 한민족 역사를 부인하고자 하지 않는 이상은 결코 해선 안 될 발상아닌가!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 일컬으며 국민과 역사를 기만하는 이 누구였나?
친일후손들에게 양분을 제공하는 이 누구였나?
이명박, 박근혜. 새누리당. 뉴라이트집단

 
부정선거로 미국의 압박에 의해 하야의 길을 간 이승만, 함께 부숴졌던 이승만의 동상이 지금 대한민국 주요도시에 세워져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대한민국 국회라는 곳에 '진정한 의회주의자 ' 라는 타이틀로 포장되어 버젓이 서 있다. 내용또한 역사적 사실을 빗나간 거짓이다.

1997년 이승만기념사업회가 동상건립 추천서를 냈고
1999년 국회통과하여 2000년에 건립되었다.
후손에게 보이기 민망하다. 당장 부숴야 할 동상아닌가!

역사에 국민에게 고초와 억울한 한을 준 반역행위자 이승만의 전국에 있는 동상.
반역의 미화는 반역의 반복이다. 막아야 한다.
동상철거가 그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돌아가는 시계방향이 같다.
心山 김창숙,(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 1879년 7월 10일 ~ 1962년 5월 10일)은 조선과 일제 강점기 한국의 유학자, 독립운동가, 정치가이며, 교육가, 성균관대학교의 창립자이다.

심산 김창숙 선생의 '역적'을 성토하지 않는 자 역시 '역적' 이라는 말씀을 되새겨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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