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투쟁, 화해, 통합의 삶, 만델라 타계

자유를 향한 긴 여정' 마친 만델라는 누구?

서울의소리 | 입력 : 2013/12/07 [00:56]
우리 시대의 위대한 정치 지도자 넬슨 만델라의 타계 소식에 세계가 추모의 물결에 휩싸였다.
 
27년 간의 감옥살이를 포함한 불굴의 투쟁 끝에 20세기 인류 최악의 야만 중 하나였던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고 남아공 첫 흑인 대통령에 올라 인종갈등으로 분열된 나라에 민주주의와 화해의 초석을 놓은 영웅의 죽음은 지구촌에 깊은 상실감을 안겼다.
 
세계의 존경을 받았던 평등과 화해의 지도자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대통령이 5일 타계했다.

 
국부(國父)를 잃은 남아공의 슬픔은 비할 데가 없어 보이며. 제이콥 주마 대통령이 5일 밤 "우리 나라는 가장 위대한 아들을 잃었다"며 만델라의 부고를 알린 직후 그가 운명한 요하네스버그 자택 앞에는 어둔 밤을 뚫고 달려온 수백명의 시민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는 전통적 방식으로 애도를 표했다. 만델라가 한때 거주했던 민주화 성지 소웨토, 요하네스버그의 넬슨만델라광장 등에도 추모객이 모여들었다.
 
넬슨만델라광장에 나온 백인 소냐 포콕(46)은 "만델라가 석방된 이래 그의 길을 따라왔다"며 "만델라는 내 할아버지"라고 말했다. 아파르트헤이트 백인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1993년 만델라와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던 F W 데 클레르크는 "만델라는 화해라는 큰 유산을 남긴 위대한 통합자"라며 고인을 기렸다.
 
국제사회의 지도자들도 앞다퉈 애도의 뜻을 밝혔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만델라를 "정의로운 거인"으로 칭하며 "인류의 존엄, 평등, 자유를 위한 그의 투쟁은 전세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강조했다. 교황 프란시스코는 남아공 정부에 보낸 애도 서신에서 "만델라를 본보기 삼아 국가들이 정의와 공익을 위해 노력하기를 희망한다"고 적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이 시대의 위대한 빛이 졌다"고 추모했고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투쟁으로 남아공과 세계 역사를 만든 우상"이라고 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 인민은 만델라 전 대통령이 인류 발전에 기여한 큰 공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도 유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친애하는 친구이자 용기, 원칙, 고결함의 상징이던 그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밝혔다. 윌리엄 영국 왕세손 부부는 만델라 전기 영화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의 런던 시사회에 참석했다가 부고를 듣고 2분 간 묵념했다.
 
주마 대통령은 만델라의 장례식이 15일 고인의 고향이자 말년의 거처였던 쿠누에서 국장으로 치러진다고 밝혔다. 1994년 남아공 흑인정부 출범 이후 첫 국장으로, 간소한 장례를 원했던 고인의 생전 바람과는 거리가 있다. 주마는 장례일까지 열흘 동안을 국가 애도기간으로 정하면서 10일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경기장에서 추도식이 거행되며 11~13일에는 만델라의 시신이 수도 프리토리아의 정부 청사에 안치돼 일반에 공개된다고 밝혔다. 백악관이 오바마의 장례식 참석 계획을 밝히는 등 세계적 명사들이 만델라의 마지막 길을 배웅할 것으로 보인다.

'자유를 향한 긴 여정' 마친 만델라는 누구?
경향신문 구정은 기자 ttalgi21@kyunghyang.com
 
넬슨 롤리흘라흘라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미국인들에게 50년 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쳤던 마틴 루터 킹이 있었다면, 만델라는 그 꿈을 실현시킨 ‘세계인의 마틴 루터 킹’이었다. 5일(현지시간) 만델라의 타계는 한 정치인의 사망을 넘어 ‘한 시대의 종말’을 상징한다. 만델라가 일생을 바쳐 싸웠던 대상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정권만이 아니라 인종차별, 식민주의의 잔재, 냉전 체제와 반공 논리, 권력을 가진 자들의 폭압 등 20세기의 모든 모순들이었다.
 
모든 영웅에게는 적이 있게 마련이지만, 세상을 떠나는 그에게 적은 없었다. 그는 대의를 위해 적들도 끌어안을 수 있음을, 그리하여 적 또한 벗으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백인정권의 마지막 대통령 프레데릭 데클레르크가 만델라가 출감한 뒤 1994년 흑인정권을 출범시키자 스스로 부통령으로 내려앉아 만델라를 도왔던 것이 바로 그런 예였다. 데클레르크는 만델라 타계 소식에 “우리는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었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할 수 있었고, 협상을 통해 숱한 위기들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며 한때의 적이자 동지였던 고인을 애도했다. 만델라는 흑인들뿐 아니라 백인과 유색인종 모두에게 칭송받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1959년 흑인들에게 통행시 신분증명서류를 제출할 것을 요구한 통행자법에 맞서 싸울 당시의 만델라. 경향신문 자료사진


변호사에서 정치 투사로
 
만델라는 1918년 이스턴케이프주 트란스케이 지역의 작은 마을 쿠누에서 태어났다. 트란스케이는 남아공의 주요 부족 중 하나인 코사족의 자치지역 중 하나로, 백인 분리주의 정권 시절에 백인들이 만든 코사족 ‘괴뢰정권’이 세워졌던 곳이기도 하다. 만델라는 이곳에서 코사족의 한 갈래인 템부족 부족 지도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만델라는 헤알트타운의 기독교 감리교계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포트헤어 대학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평생의 동지인 올리버 탐보를 만난다. 대학 생활 첫 해가 끝나갈 무렵 만델라는 학교 측의 인종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회 싸움을 이끌다가 퇴학당했다. 이후 부족의 부름을 받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쳐나왔고, 광산 감독관으로 잠시 일하다 변호사 사무실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를 고용한 변호사 월터 시술루는 만델라의 정치적 후원자이자 평생의 동지가 됐다. 시술루의 영향으로 만델라는 남아공대학과 비트바테어스란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됐다.
 
“나의 인생은 투쟁이었다”는 말은 그가 살아온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28년간의 감옥생활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는 흑인들과 백인들 모두를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로 이끌어가기 위해 싸웠다. 그를 본격 정치투쟁에 끌어들인 것은 1948년의 총선이었다. 이 선거에서 아프리카너(네덜란드계 백인)들이 주도하는 국민당이 승리하면서 극악한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가 시작됐다. 만델라는 1952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불복종 운동을 주도했고, 1955년에는 인종차별 철폐투쟁의 이념적 기반인 ‘자유헌장’을 발표하며 인종차별 이데올로기에 맞섰다. 동시에 만델라는 탐보와 함께 ‘만델라&탐보 법률회사’를 만들어 저소득층 흑인들을 위한 법률구조활동을 펼쳐 신망을 쌓았다.
 
이 시기 만델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비폭력 투쟁을 실현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였다. 당시 남아공에는 큰 규모의 인도계 공동체가 있었다. 만델라는 2007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사티야그라하(비폭력불복종운동) 100주년 기념축제에 노구를 이끌고 직접 참석해 간디를 기리기도 했다.
 
민족회의는 백인정권의 극심한 탄압 때문에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1950년대 말이 되자 민족회의는 정치적 기로에 놓였다. 앨버트 리툴리와 올리버 탐보, 월터 시술루 등 당시 지도부가 주도한 온건 노선에 젊은 당원들이 반발한 것이다.
 
컬러드(아시아계 유색인종)와 인도계, 공산당을 비롯한 백인 좌파 정당들과의 연대에도 균열이 왔다. 이 때 당의 일신을 위해 새 지도자가 된 인물이 만델라였다. 만델라는 1961년 무장분과인 ‘움콘토 웨 시즈웨(MK·국가의 창)’를 창설하고 사보타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의 노선은 대체로 비폭력 정치투쟁에 맞춰져 있었다.

감옥에서의 28년
 
1962년 만델라는 체포돼 불법파업을 일으킨 죄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요하네스버그 북쪽 리보니아에서 민족회의 지도부가 대거 붙잡혔다. ‘리보니아 재판’으로 알려진 기나긴 법정투쟁의 시작이었다. 이 재판에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는 만델라의 인생에서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격동의 시기였다. 이 때 만델라는 두번째 부인이 된 위니 마디키젤라를 만났다. 지금도 민족회의 산하 여성 조직을 이끌고 있는 위니는 만델라의 아내이자 투사 동료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동지적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만델라가 수감된 뒤 위니는 남편 대신 정치투쟁에 나서 민족회의 최고위 여성정치인이 됐지만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남성 편력과 살인·폭력교사 등의 혐의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만델라는 옥중에서 위니에 대한 소문을 접하면서도 언제나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교도관들은 내 귀에 ‘위니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말을 속삭이고 가곤 했다. 어떤 날은 위니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실린 신문기사를 던져놓고 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위니가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던가를 생각하면서 이해하려 애썼다. 그녀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 나이였다. 내가 수감돼 있는 동안 민족회의에서 나의 영향력을 유지시켜준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위니였다.”(자서전 <자유를 향한 긴 여정>에서)
 
케이프타운 앞바다 로벤섬에서의 17년을 비롯해 만델라는 28년을 창살 안에서 보냈다. 옥중에서 그는 공부를 하고, 동지들과 미래를 향한 토론을 하고, 젊은 흑인들을 가르치고, 무지한 백인들조차 교화시켰다. 만델라는 자서전에서 “수감생활을 견뎌내기 위해 동지들과 온갖 주제를 놓고 토론했다”며 “아프리카에도 호랑이가 있느냐는 문제를 놓고 토론한 적도 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뒷날 그는 옥중에서 취미로 삼았던 화초 재배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역사적인 흑인 대통령
 
만델라의 싸움이 알려지면서 국제적인 석방 캠페인이 펼쳐졌다. 서방국들도 서서히 백인정권에 등을 돌렸다. 국제사회의 금수조치에 경제가 휘청이고 백인들 사이에서조차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반대가 커졌다. 1989년 대통령이 된 데 클레르크는 백인정권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옥중의 만델라와 협상했다.
 
1990년 2월 마침내 만델라가 석방됐다. 하지만 그 후 몇 년은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백인 강경우파들은 반발했고, 만델라와 민족회의의 투쟁을 물밑 지원했던 많은 백인들은 기쁨 속에서도 정치적 동요를 숨죽이며 지켜봤다. 갑자기 기세를 펴게 된 흑인들 사이에서는 갈등과 다툼이 빚어졌다. 특히 민족회의의 주축이면서도 흑인 중에서는 소수파인 코사족과, 흑인 주류를 차지하는 줄루족 간 충돌이 일어났다. 망고수투 부텔레지가 이끄는 줄루 정당 잉카타자유당과 민족회의 사이의 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1994년 총선에서 민족회의는 62%의 표를 얻어 제1당이 됐다. 만델라는 흑백 합의로 이뤄진 새 헌법에 따라 의회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됐다. 자칫 대규모 유혈사태나 내전으로 갈 수도 있었던 혁명적인 시기를 비교적 안정되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만델라의 굳은 의지와 지도력 덕분이었다고 남아공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기대 속에 집권한 그에게는 인종차별의 상흔을 치유할 책무가 있었다. 만델라의 남아공은 다인종·다민족이 공존하는 ‘무지개 국가’를 슬로건으로 삼았다. 그는 ‘진실과화해위원회(TRC)’를 만들어 과거사 규명에 들어갔다. 민족회의 정부는 또 흑인경제력강화(BEE)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수탈당하던 흑인들에게 경제적 주도권을 줌으로써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으로 일부 흑인들만 혜택을 입었으며, 빈부격차가 더 심해졌다는 비판도 많았다.
 
만델라는 옛 동지 고반 음베키의 아들인 타보 음베키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고 1999년 퇴임했다. 물러난 뒤에는 국제적으로 고립돼 있던 리비아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서방과 협상할 수 있도록 중재하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등 평화의 메신저로 활동했다. 남아공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에이즈 문제와 싸우기 위한 재단을 만들기도 했다.
 
자유를 향한 만델라의 긴 여정은 이제 끝났다. 그의 이상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고, 남아공은 여전히 숱한 정치적·경제적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뒤에 남은 세대들에게도 오래도록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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