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선생 순국 78주기 추도식 거행

김원웅 회장 '역사를 왜곡하는 '내부의 적' 응징 없으면 생존 할 수 없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14/02/21 [23:47]
단재 신채호선생 순국 78주년 추도식이 21일오전 11시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신채호선생 묘소에서 독립운동가 후손, 항일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 각지에서 참석한 국민, 종중, 마을주민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 되었다.
 
이날 추도식은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김원웅 회장, 보훈처, 충청북도, 청원군 관계자 등의 추도사로 진행 되었으며, 아리랑과 헌시 낭독도 있었다.

이날 김원웅 회장은 추도사에서 "단재 선생을 따르는 조선 의혈단이 오늘날 존재 한다면 뉴라이트 교학사 교과사를 검정 통과시킨 이 정부의 권력에게 폭탄을 던졌을 것이다"고 분노했다.
 
김 회장은 "이러함에도 천황페하 만세를 부른 친일매국언론 조선일보 등은 입을 꼭 다물고 있다"며 "이러한 내부의 적을 응징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생존은 계속될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역사의 대장군 신채호' 통곡의 아리랑을 부른는 참석자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민족 최대 수난기인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우리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으며,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는 선생의 항일정신과 실천정신을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고 계승하기 위해 탄신제와 추도식을 열고 있다.
 
 
청원군 낭송면 귀래리 단재 신채호 기념관 앞 천고비
 
 
하늘북 

                                  단재 신채호 

吾知鼓天鼓者 其能哀而怒矣

哀聲悲怒聲壯 喚二千萬人起

乃毅然決死心 光祖宗復疆土

取盡夷島血來 其흔於我天鼓
 

나는 아네 하늘북 치는 사람을

그는 슬퍼하기도 성내기도 하네

슬픈 소리 서럽고 노한 소리 장엄하여

이천만 동포를 불러일으키나니

의연히 나라 위해 죽음을 결심케 하고

조상을 빛내고 강토를 되찾게 하나니

섬 오랑캐의 피를 싸그리 긁어 모아

우리 하늘북에 그 피를 칠하리라

일제에 체포되어 죄수복을 입은 신채호 선생

단재-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
 
1880년, 12월 8일. 충남 대덕에서 출생
1887년, 고향인 충북 청원군 귀래리로 이사 이후, 이 곳에서 수학하고 성장함
1898년, 성균관 입교,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
1901년,「문동학교」에서 애국계몽운동 전개
1905년, 성균관 박사됨.「황성신문」 논설위원에 위촉됨
1906년,「대한매일신보」에 논설진으로 초빙됨
1908년, 순한글잡지 「가뎡잡지」를 편집 발간
1910년, 안창호 등과 중국으로 망명
1911년, 블라디보스톡에서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
1914년, 옛 고구려땅 답사 이후, 대고구려 주의적인 역사 의식 갖게 됨
.
1915년, 북경에 체류하며 「조선상고사」
의 집필
1916년, 소설 「꿈하늘」 집필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충북)에 피선됨.「신대한」을 창간하고 주필 활동
1920년, 박자혜 여사와 북경에서 결혼
1922년, '의열단'의 행동강령인「조선혁명선언」을 기초
1924년, 무장독립운동단체 「다물단」
의 선언문을 기초
1925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함
1927년,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1928년, 소설「용과 용의 대격전」발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국제위폐 사건에 연류되어 체포됨.
1930년, 대련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음. 여순감옥으로 이송됨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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