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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의 조부 남정철..

경술국치당시 일제로 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증조부의 행적에 대해 남의원은 한번은 꼭 해명.사죄해야 

김기백 기자 | 기사입력 2010/03/01 [03:10]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의 조부 남정철..

경술국치당시 일제로 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증조부의 행적에 대해 남의원은 한번은 꼭 해명.사죄해야 

김기백 기자 | 입력 : 2010/03/01 [03:10]
민신편집자주: 한국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각계인사들, 특히 한나라당과 정부요직에 있는 사람들중  남경필의원의 증조부만이 친일매국노였던 것은 아니지만 구한말 대신급이였던 남정철이라는 인물이 남경필의원의 바로 증조부이며, 일제로부터 작위까지 받은바 있는 거물급친일파라는 사실은 의외로 잘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더러는 남정철이라는 사람이 남경필의원의 조부인것으로 알고 있지만 조부가 아니라 증조부이다)분명한것은 남정철은 잔챙이급친일파가 아니라, 작위까지 받은 거물급친일파로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인물이며, 남정철의원의 증조부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경위야 어찌되었건 아직도 젊은나이에 이미 4선국회의원으로서 중진급에 속하는 남경필의원은 경술국치 1백년을 맞이하고 있는 올해는 반드시, 증조부의 행적에 대해 마땅히 해명할것은 해명하고 사죄할것은 이제라도 사죄하는것이, 집권여당의 중진의원으로서 국민과 지역구 유권자에 대한 책임있는 정치인으로서 최소한의 도리이자 책무일것이다.
 
뱀발: 한가지 의아한것은 시대적으로 남정철보다 20-30년 앞서는 구한말의 각계인물이나  훨씬 잔챙이급인사들도 사진을 찾기가 어렵지 않은데, 유독  남정철이라는 인물은 경술국치 전후당시의  사진을 찾아보려고 온인터넷을 이 잡듯이 찾아보았으나, 마치  심청전에 나오는 무슨 소경같은 조그만 사진한장말고는 도저히 찾을수가 없어 부득이 남경필의원의 사진으로 대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http://www.minjokc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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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몰년 : 1840-1916
  • 시대 : 조선
  • 분야 : 문신/관료 > 문신-조선후기 > 문신
    남정철(南廷哲)에 대하여

    남정철(南廷哲)
    1840(헌종 6)∼1916.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 자는 치상(穉祥), 호는 하산(霞山). 현감 홍중(弘重)의 아들이며, 유신환(兪莘煥)의 문인이다.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음관(蔭官)으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위(翊衛)가 되었다가, 1882년(고종 19) 11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교리를 거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84년 2월 톈진주차독리통상사무(天津駐箚督理通商事務)가 되어 임지에 주재하는 동안 보정부(保定府)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문안, 그해 7월에 복명하고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당시에는 김윤식(金允植)과 함께 청나라 병영에 가서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의 축출을 위하여 출병을 요청하였고, 정변의 실패 후 조직된 수구파 중심의 정부에서는 호조참판에 기용되었다.
    그해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한로수호통상조약(韓露修好通商條約)비준사건의 양해를 구하는 고종의 친서를 휴대하고 톈진(天津)으로 가서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의 동의를 얻었다.


    1885년 4월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재차 톈진주차독리통상사무로서 임지에 다녀온 뒤, 7월 평안도관찰사에 발령되었다가 관찰사 재임중의 치적이 높이 평가되어 임기가 1년 연장되었다.
    그뒤 대사헌을 거쳐서 이듬해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도승지·형조판서·예조판서·한성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1892년 6월에는 오스트리아의 전권위원인 벡커(Becker)와 조오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893년 4월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일본 변리공사(辨理公使) 오이시(大石正己)와 함경도·황해도의 방곡령사건으로 인한 배상문제를 협의, 마무리지었다.
    그뒤 대사헌·형조판서·함경북도관찰사·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을 역임하고, 1897년 내부대신이 되었다. 그해 6월 사례국(史禮局)의 설치를 건의, 그 위원이 되어 편집사무를 담당하였고, 이어 홍문관학사가 되었다.


    1898년 11월 궁내부특진관이 된 뒤 장례원경(掌禮院卿)·홍문관학사·특진관 등의 관직을 1907년초까지 중복, 역임하였다.


    1907년 7월 고종 양위식에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이완용(李完用) 등에 의하여 피소, 치죄되었으나 곧 풀려나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를 지내고, 1909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병합될 때 일본정부로부터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았다. 글씨를 잘 써 여흥부대부인지문(驪興府大夫人誌文)과 제각상량문(祭閣上樑文)·흥선대원군제각상량문·대한문중수현판·태백산선사양각중수상량문(太白山璿史兩閣重修上樑文) 등을 썼다.
    문집으로 《하산고》가 있다.

    참고문헌
    • 日省錄, 高宗實錄, 純宗實錄, 承政院日記, 文品案, 梅泉野錄, 續陰晴史. 〈李完宰

  • 원본 기사 보기:민족신문
    • 도배방지 이미지

    • world 2015/09/22 [18:23] 수정 | 삭제
    • 남정철은 본관이 의령으로 남경필 의원과 같으나 남경필과 파(派)가 다릅니다. 다른 사람을 고조부라 증조부라 억지로 연결하면 안될 일입니다.
    • 월화수 2014/08/19 [21:44] 수정 | 삭제
    • 남경필이 족보상 증조부에 남정철은 없다고 해명했는데 항렬상 고조부인데 당연히 없죠. 남정철이 남경필의 친고조부인지는 확인못했지만, 위키백과에 확인한 바로는 남경필- 부 남평우- 조부 남상학- 증조부 남덕희- 고조부 남정철로 연결이 됩니다. 남상학이 남경필의 조부인것은 확실하고,남덕희도 남정철의 아들은 확실한데 남상학과 남덕희가 부자지간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위키백과에는 그렇게 나옵니다
    • kkk 2014/05/29 [12:33] 수정 | 삭제
    • 우연히 헌책방에서 라는 책에 남정철 남작의 사진을 본 기억이 있음. 이 책은 당시 총독부 등을 비롯한 관리들의 목록임. 동명이인일 수도 있겠지만 정황상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아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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