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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도르세의 역설'과 선거의 현실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4/12/09 [00:12]

'콩도르세의 역설'과 선거의 현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14/12/09 [00:12]

콩도르세 승자

 
세 명의 후보(A.B.C)와, 세 명의 투표자가 있는 어떤 선거를 가정해 보자. 그리고 투표 방식은 각 투표자들이 세 명의 후보들 중 한 명만 고르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선호하는 순서대로 세 명의 후보들을 모두 적는 것이다. (이때 사용하는 투표용지를 선호리스트라고 한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투표결과가 나왔다고 하자.
 
투표용지1 - A.B.C,
투표용지2 - B.A.C,
투표용지3 - C.B.A,
 
투표자들에게 선호하는 후보 하나만 찍도록 했다면, 위의 결과에서 승자는 없다. 그런데 이 투표의 목적은, 후보들끼리 1:1로 붙었을 때, 나머지 모든 후보들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는 후보를 뽑는 것이 목적이다.
 
위 결과에서 승자는 누구일까?
 
얼핏 보면, 모두 같은 득표로, 승자를 가리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투표의 승자는 분명히 B가 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B는 A를 2번 이기고(투표용지2, 3), C를 2번 이긴다(투표용지1, 2).
같은 방식으로 A는 B를 1번, C를 2번 이기고,
C는 A와 B를 각각 한 번씩만 이긴다.
 
보다 명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각각의 승리에 대해 승점을 1점씩 주면 된다. 그러면 B는 A와 C를 각각 두 번씩 이기기 때문에 승점 4점, A는 승점 3점, C는 승점 2점이 된다. 더 간단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각 투표용지에서 선호도 1위에 오른 사람은 2점, 2위는 1점, 3위는 0점으로 계산하는 것과 같다.
 
이런 식으로 어느 누구와의 1:1 대결에서도 이길 수 있는 최종승자 B를 <콩도르세 승자>라고 부른다.
 
이런 투표방식의 선거가 있다면, 승리의 결정 요소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열성적인 지지를 받는 것 못지 않게, 다수의 사람들에게 ‘미움 받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위의 결과에서 후보 C는 다른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가장 지지해주는 지지자 한 명을 확보했지만, 나머지 두 유권자에게선 비호감도가 높게 나았기 때문에 선거결과에서는 꼴찌가 된 것이다.
 
콩도르세의 역설
 
파리의 유명한 퐁네프 다리로부터 센느강 좌안 강변로 께드꽁띠(Quai de Conti)를 따라 오르세 미술관이 있는 방향으로 조금 이동하다보면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나온다. 이 건물 정면으로부터 센느강을 가로질러 루브르로 이어지는 다리가 '퐁 데자르(Pont des Arts, 예술의 다리)'다.
 
아카데미 프랑세에 이르기 직전에, 건물 옆에 작은 광장이 하나 나타나고, 거기에 인물 조각상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하단에 CONDORCET라는 이름이 있다. <콩도르세의 승자>라는 호칭이 이 이름에서 나왔다. 바로 이 인물이 위와 같은 투표방식을 제안한 ‘콩도르세’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1700년대,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철학자이며 수학자이며 또한 정치인이었다. 한국인들에게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우리가 은연중에 자주 사용하는 격언 중에 이 사람의 말이 있다: “남과 비교하지 마라, 자기 자신의 삶을 즐겨라”.

콩도르세 동상, 13 Quai de Conti, Paris.

 
그런데, 콩도르세는 왜 이처럼 복잡한 투표방식을 고안했을까? 인생에 있어서는 ‘남과 비교하지 마라’ 해놓고, 투표에선 각 후보들을 1:1 비교 하는 것과 같은 까다로운 방법을 주장했던 셈이니 말이다. 그는 종종 “투표가 한 조직이나 집단 구성원의 가장 이상적인 선택이 되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설령 다수가 선택한 결정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현상을 “투표의 역설”이라 하며, “콩도르세의 역설”(Paradoxe de Condorcet)이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의 선거 역사에서 이런 투표의 역설을 보여주는 ‘교본적’인 사례가 있었다. 바로 87년 대선이다. 민주화 운동을 통해 겨우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는데, 야권의 가장 강력한 리더였던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이 끝내 단일화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대선 결과는 여당후보 노태우가 36.6%, 김영삼 후보 28%, 김대중 후보 27%, 김종필 후보가 8%를 득표했다.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긴 했지만, 만약 1:1로 붙었다면, 노태우 후보는 김영삼, 김대중 모두에게 지는 후보였다. 결국 3위밖에 되지 못할 후보가 대권을 거머쥐게 되면서 그토록 염원하던 민주화는 또 다시 5년을 미루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임기 내내 36%만의 대통령이라는 비아냥과 함께 ‘물태우’라는 별명까지도 ‘얻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콩도르세의 방법대로 선호리스트에 의한 투표를 했다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가령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로 압축했을 때, 노태우 후보의 예상 가능한 최소승점은 74점이 된다. 자신이 얻은 득표율에 승점 2점씩을 부여하고, 나머지에서는 꼴지가 되는 경우다. 김영삼 후보의 최대승점은 자신의 득표율 X 2점에, 김대중을 지지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노태우보다 더 선호했다는 가정하에 (28 X 2) + 27 = 85점, 이런 식으로 김대중은 27 X 2 + 28 = 82점, 두 사람 모두 노태후 후보를 이겼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런 역설은 국가적인 차원의 큰 선거에서뿐 아니라 일상의 작은 결정에서도 종종 발생한다. 가령, 일군의 직장인들이 퇴근 후 회식을 갖기로 한다. 일부가 소고기 구이를 먹으러 가자고 한다. 그런데 다른 일부는 회를 먹으러 가자고 주장한다. 결국 다수결을 통해 회를 먹으러 가게 되었다. 그런데 여성 신입사원 하나가 ‘전 회 못 먹어요’하자,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 진다. 한 사람이 나서 ‘그러면 그냥 삼겹살이나 먹으러 갑시다. 삼겹살 못 먹는 사람 있어요?’ 하고 제안한다. 두 진영은 서로 멀뚱하게 쳐다볼 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삼겹살집으로 최종 결정되었고, 이날 회식은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 졌다. 결국 이날 회식은 다수가 원하는 쪽보다는, 다수에게 불만이 없는 쪽으로 결정되었던 것이고, 따라서 누구에게도 큰 만족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집단의 경우 일방적 다수결이 아니라, 한 사람의 극단적인 반대(불가항력적인)를 수용한 것이다. 흔히 ‘다수결이 민주적인 의사결정 방법인가’라는 이의가 제기되는데, 여기서 집단이 자발적으로 결정된 다수결을 포기하고, 완전히 소외될 수 밖에 없는 한 사람을 구제하기로 한 것은 대단히 고차원적인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그런 결정으로 인해 누구도 크게 만족할 수 없는 방법이 선택된 것이다. 이처럼, ‘선거의 역설’은 또한 ‘민주주의의 역설’과도 관계가 있는 개념이다.
 
완벽한 투표 방식은 없다
 
콩도르세가 주장한 투표방식은 후보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선호도와 비호감도를 반영하여 이러한 투표의 역설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하는 것이 그 의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투표방식도 유권자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할 수는 없다. 가령 각 후보들에 대한 유권자의 선호도의 편차까지 반영하진 못한다. 가령 유권자1은 후보 A.B에 대한 선호도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근소한데, C에 대해서는 그 반대로 혐오도가 극에 달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유권자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고자 한다면 A.B에 대해선 거의 비슷한 평점을 주고 C에 대해선 현저히 낮은 점수를 주어야 하지만, 그것을 통계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또 한가지 문제는, 후보자들이 많아지고, 유권자들이 수백만 명에서 수천만 명으로 늘어날 경우, 각 투표용지마다 다수의 후보자들의 승점을 매기고, 그것을 수백만 장의 표에 더해서 최종 승자를 가리기란 불가능하다. (요즘은 굳이 하고자 한다면 전산으로 처리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긴 하다). 또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각 투표용지마다 함축된 각자 유권자들의 속내를 읽어내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 하다. 이런 식으로 ‘투표의 역설’은 거의 불멸의 진리에 가까운 정의가 된다. (실제로 미국인 수학자 케네스 애로(Kenethe Arrow)는 완벽한 투표 방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 불가능성의 정리 »를 통해 197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집단 내의 보다 이상적인 집단 지성을 끌어내기 위한 시도와, 이를 반영하기 위한 투표제도의 꾸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참여 민주주의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들은 투표제도의 꾸준한 개량을 통해 오늘날 각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나름대로 국민주권을 최대한 이상적으로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선거제도에 있어 많은 문제와  논란이 있고, 이를 개선시키기 위한 대안들도 여럿 제시되고 있다.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많이 거론 하고 있는데, 이것이 한국적인 상황에 적절한 것인지도 더 검토해 봐야하고, 또 다른 대안이 있는지도 알아봐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어지는 글에서는 '정당명부제'와 함께 또 다른 대안으로 거론되는 프랑스식 <결선투표제>에 대해 좀 소개해 볼까 한다.
 
결선투표제는 단 1회로 끝내는 보통의 선거들에 비해, 콩도르세가 제기한 투표의 역설에 대한 문제를 좀 더 고려하고, 그의 방법을 어느 정도 수용 변형했다고 할 수 있는 투표 방식이다. 미리 말해 두자면, 프랑스식 결선투표제는 한국의 선거 제도하에서 야기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출처 - 파리이장의 한국보기 http://regardsurcoree.blogspot.fr/
프랑스에서 바라보는 한국, 프랑스 언론에 나타난 한국의 모습 등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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