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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 덕분에 굶주림 면했다'? 턱없는 소리

박정희는 '새마을 운동'은 '유신이념의 실천도장' 이라 했는데...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5/09/28 [21:12]

'새마을운동 덕분에 굶주림 면했다'? 턱없는 소리

박정희는 '새마을 운동'은 '유신이념의 실천도장' 이라 했는데...

서울의소리 | 입력 : 2015/09/28 [21:12]

박정희의 정치자금을 관리하던 쌍용세멘트 소유주 김성곤의 제의로 재고가 넘치는 시멘트를 1970년 10월부터 무상으로 나눠주면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유신체제를 유지키 위한 관제운동으로 변질됐다.  @한겨레

 

박근혜가 유엔본부 연설에서 아버지인 '忠日군인' 출신 '독재자' 박정희의 새마을운동 리더십을 자랑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 같은 발언은 ‘새마을운동이 정부 주도로 추진되면서 농촌개발이란 본래 목적을 넘어 유신체제를 유지키 위한 일종의 정치적 운동으로 변질됐다’는 등의 평가를 배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새마을운동 덕분에 굶주림 면했다?

 

프레시안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에 따르면 따르면 한국에서 먹는 문제, 식량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1970년대 중반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관해서도 일부에서 설명을 부정확하게 하고 있다. 마치 새마을운동의 영향인 것처럼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시기에 쌀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당히 크게 증가하는데, 그건 농정의 영향이지 새마을운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농업 정책으로 당연히 써야 하는 것을 쓴 것이다.

 

일본에서 일찍부터 시행했고 야당에서 1967년부터 이야기한 이중 곡가제를 (1969년에 도입한 후) 1973년부터 강화하고 1975년에는 전면 시행에 들어갔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에서 통일벼를 정말 강력하게 권장했다. 그런데 농민이 말을 안 들었다. 내가 농촌에 가서 많이 본 모습인데, 면사무소 관리들이 와서 이미 심어놓은 모를 막 뽑아버리고 그랬다. 통일벼를 안 심었다고 그런 것이다. 그만큼 농민들이 안 심었다.

 

그러나 나중에 농민들이 통일벼를 많이 심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뭐냐 하면 이중 곡가제를 시행하면서 정부가 수매를 하는데, 통일벼를 우선 받아준 것이다. 그러자 농민들은 자기들이 먹을 건 '아키바레' 같은 좋은 것으로 심어놓고 팔 것, 도시에 내보낼 것으로는 대량으로 통일벼를 심어버렸다. 그러면서 1970년대 중반에 엄청난 쌀 생산이 이뤄진 것이다.

 

이건 새마을운동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필리핀 등에 비해 한국에서 녹색 혁명이 조금 늦게 일어난 것이다. 일찍부터 다수확 품종을 우리 현실에 맞게끔 권장했어야 할 일이고, 이중 곡가제가 조금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저곡가 정책의 대책은 일찍 세웠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촌이 워낙 어려워진다. 1971년에 대선, 총선이 있지 않았나. 그러고 나서 1972년에 유신 체제로 들어가는데, 유신 체제를 지지할 중요한 기반을 어디서 찾을 수 있었겠나. 1973년부터 이중 곡가제를 강화하면서 수매를 통일벼 우선으로 한 것에는 그런 여러 가지가 작용했다고 본다.

 

마을운동이 구체화된 것은1970년 10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정부가 전국 3만5000개 마을에 각각 300여 포대의 시멘트를 무상으로 나누어주면서 시작되었다. 재고가 넘치는 시멘트를 무상으로 나눠주면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관 주도의 관제운동으로 변질됐다.

 

박정희가 각 마을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시멘트를 나누어준 계기가 쌍용시멘트 소유주였던 김성곤이 박정희에게 시멘트업계의 재고과잉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호소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김성곤은 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 박정희의 정치자금을 관리하는 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였다.

 

새마을운동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을 빼닮아

 

  박정희와 우가키

 

홍구 교수가 한겨레에 기고한 <유신과 오늘>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농촌진흥운동을 빼닮았다고 지적한다.  박정희가 1970년 제창한 ‘새마을 가꾸기’란 조선총독부의 ‘아타라시이 무라 쓰쿠리’를 글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박정희가 1937년부터 만 3년간 교사로 근무했던 문경공립보통학교는 농촌진흥운동의 일환으로 두곳의 갱생농원을 경영했고, 박정희는 이 농원에 나가 40여일간 지도를 했다고 한다. 농촌진흥운동이 박정희에게 미친 영향을 가장 상세히 기술한 것은 조갑제였다.

 

최길성 교수의 연구성과를 인용하여 조갑제는 새마을운동과 농촌진흥운동의 유사성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운동의 이념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이 ‘자조, 자립, 협동, 충효애국’이고 그것의 집약적 표현이 국민교육헌장이었던 데 대해서 우가키 총독의 농촌 진흥은 ‘자립, 근검, 협동공영, 충군애국’과 교육칙어였다. 박정희, 우가키 두 사람 다 농촌 출신 군인이었다. 두 운동의 현장 지도자들은 새마을연수원과 농도강습소에 의해 각각 양성되었다. 새마을노래와 농촌진흥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농가경제 5개년 계획, 육림일과 애림일, 모범 부락의 선정 등 공통점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과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이 ‘관제 국민운동’으로서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둘 사이의 중요한 차이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운동이 벌어질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매우 달랐다.

 

우가키가 농촌진흥운동을 시작할 때는 세계 대공황의 피해가 조선의 농촌을 덮쳐 소작쟁의, 수리조합 반대투쟁, 부역 반대투쟁 등 농민들의 자생적인 생존권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사회주의자들은 적극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여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적색농민조합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때였다. 총독부 당국은 전국 80여곳에서 120여건의 적색농조운동을 적발하여 6000여명을 검사국에 송치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체제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지수걸에 따르면 1932년 7월에 시작된 농촌진흥운동은 이런 상황에서 추진된 ‘비상한 시기’의 ‘비상한 정책’이었다.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는 시점에도 분명 위기는 존재했다. 박정희의 수출주도형 경제발전 전략은 농촌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에, 경제가 발전할수록 농민들의 처지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농가소득이 도시근로자 가구소득보다 많았지만 1970년에 접어들면서 농가소득은 도시근로자 가구소득의 70% 선으로 급락했다.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시작한 시기는 전태일의 분신(1970년 11월)과 광주 대단지 사건(1971년 8월) 등 도시에서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의 불만이 한껏 고조된 시기였다. 박정희에게는 다행히 아직 농촌에서는 도시와 같이 불만이 폭발적으로 분출하지는 않았다. 한국전쟁과 그 전후의 민간인 학살을 거치면서 농촌 내부의 ‘불안 요인’이 철저히 거세되었을 뿐 아니라, 도시로 도시로 향하는 이농의 대열은 불만이 농촌에 폭발할 정도로 쌓일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농가의 호당 평균부채는 1962년 4751원에서 1969년 1만2518원으로 크게 늘어났다. 1971년 총선에서 여촌야도 현상은 여전히 존재하여 박정희의 정권을 지탱해 주었지만, 농촌에서 여당의 지지율은 1963년과 1967년 총선의 67% 선에서 1971년 총선에서는 58%로 크게 감소했다. 박정희가 계속 집권하기 위해서는 농촌에서의 지지율이 더이상 하락하는 것을 방지하고 도시의 반정부 분위기가 농촌에 확산되지 못하도록 예방해야 했다.

 

박정희가 아직 살아있을 때인 1979년 7월에 발간된 <신동아>에 실린 글은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인 농촌 근대화 전략이었다면 “1960년대 전반에 농촌인구 100명 가운데 1.3명이 ‘헌 마을’을 떠났는데 왜 1970년대 후반에는 해마다 3.7명이 ‘새마을’이 된 농촌을 떠났는지 설명할 수 없게 된다”고 꼬집었다.

 

박정희는 늘 “새마을운동은 한마디로 ‘잘살기 운동’이다”라고 강조했지만, 농업의 희생을 전제로 한 공업화, 농업과 공업 간의 불균등 발전, 농가부채, 비민주적 농정, 저농산물 가격 정책과 외국 농산물 수입 등 구조적인 문제는 손대지 않고 소득 증대를 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마을운동이 전시행정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농가의 소득 증대를 이뤘다면 지금의 농촌이 저렇게 텅 비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 국가 입장에서 볼 때, 또는 박정희 정권 입장에서 볼 때 새마을운동은 매우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도로의 포장이나 보수, 교량의 건설 등과 같은 사업은 정상적인 근대 국민국가에서라면 마땅히 국가의 예산으로 수행되어야 할 사업들이었다. 마을길을 낼 때 많은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한 푼의 토지보상금도 받지 않고 자기 땅을 기꺼이 내놓았다.

 

1960년대의 사회간접자본 건설 내용과 비교해 볼 때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정부는 아래로부터 무상으로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위한 토지와 물자와 엄청난 노동력을 조달받은 것이다. 이렇게 창출된 잉여는 “국가를 매개로 하여 국내외 독점자본에 이전”되었다. 초기에는 새마을운동에서 농민들의 자발성이 매우 두드러졌지만 해가 갈수록 농민들은 의사결정 구조에서 배제되었고 새마을운동의 수행은 거의 공무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새마을 운동'은 '유신이념의 실천도장' 이라던 박정희

  

 '새마을 운동'은 '유신이념의 실천도장' 이라던 박정희

 

정부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를 설치했고, 그 산하에 도-군-면-리로 이어지는 하부 체계를 건설했다. 대통령의 초미의 관심사가 새마을운동이다 보니 각 공무원들이 새마을운동에서 거둔 실적은 그들의 승진과 직결되었다. 유신체제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공무원들이 여름에 덥고 돈도 많이 드는 슬레이트 지붕보다 초가지붕이 더 좋다며 지붕 ‘개량’을 하지 않는 집 지붕을 갈고리로 뜯어내거나, 통일벼를 심지 않은 못자리를 장홧발로 짓밟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새마을운동의 관 주도성, 강압성, 전시행정, 성과주의 등은 박정희 사후에 내무부조차 공식적으로 인정한 새마을운동의 대표적인 문제점이었다. 그렇지만 새마을운동 지도자 대회에서 연설하는 내용이나 연설하는 모습이나 각 마을에 배포된 기관지 <새마을>에 소개된 새마을 지도자의 모습은 종교집회에서의 성령이 차고 넘치는 간증을 보는 듯한 뜨거움을 갖고 있다. 그것이 새마을운동의 가장 큰 힘인지도 모른다.

 

사실 박정희는 농민들이 “무지와 빈곤 속에서 살면서도 더 잘살아보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나태와 질시 속에서 음주와 도박으로 소일하고” 있다고 비난하곤 했다. 농촌이 궁핍한 원인을 들판에 나가 온종일 일하는 농민들이 게으르거나 자포자기한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과 ‘자력갱생’을 부르짖었던 농촌진흥운동이 유사한 대목이다.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설파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을 게으르다고 탓하기도 했지만, 그들을 운동의 주역으로 불러냈다. 때로 이들은 새마을 모자와 완장을 통해 권력을 부여받기도 했다. 종의 딸로 태어났지만 부녀회장이 된 여성 지도자는 도박 추방의 구호를 높이 들고 남자들이 모인 사랑방 문을 열어젖히고 화투판을 엎을 수 있었다.

 

일제 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에 이어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국가의 동원체계는 마을 속으로 깊숙이 침투했다. 국가가 자원배분을 통해 마을 안팎의 경쟁을 부추기면서 두레나 품앗이같이 공동체 내에서 서로 돕고 돌보는 농민들 자신들의 조직은 모두 깨져버렸다.

 

  친일 반민족행위자 박정희 동상과 그의 딸 박근혜

 

박정희의 유산을 이어받으려는 박근혜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새마을운동이다. 감히 제2의 5·16을 하겠다거나 제2의 유신을 하겠다고 말할 수 없는 박근혜가 내세울 수 있는 박정희표 정치는 ‘제2의 새마을운동’밖에 없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도 '하면 된다'고 밀어 붙이며 또다시 시대착오적으로 아버지 박정희처럼 '유신 독재로 희귀'하려 하는 일을 멈춰주기를  바랄 뿐이다.

  • 도배방지 이미지

  • 촌노 2015/10/05 [09:22] 수정 | 삭제
  • 조국의 역사교육이 잘못 되였거나. 무? 사이비 얼론이며.다아~ 고향이. 그곳임이 틀림없으렸다. 노동신문 고-향.
  • 관악산 2015/10/04 [14:47] 수정 | 삭제
  • 노동신문인가요?
  • 석굴함 2015/10/03 [10:58] 수정 | 삭제
  • 지나가던 소가웃을 턱없는 소리 역사는바로알자 제4347년 개천절 날
  • 불암산 2015/10/01 [12:27] 수정 | 삭제
  • 새마을 운동의 역사를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중딩 시절부터 새마을 운동을 체험하고 목격한 저도 모르고 있었으니 대부분의 국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근혜는 UN까지 나가서 새마을 운동을 선전하고 있으니 참으로 친일 가문의 후예답습니다. 또한 국민들을 70년대 유신시대로 되돌리기 위해서 안달이 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 새마을 운동의 결과 현재 농촌이 잘 살게 되었나요? 이제 친일독재의 유산을 그만 우려 먹고 조국의 진정한 발전과 미래를 위해 대오각성하거나 깨끗이 물러나길 바랍니다.
  • 제세경 2015/10/01 [00:19] 수정 | 삭제
  • 마음이 바르지못하면 생각은 다른데 가있지 걸레는 때를 닦는물건이지 사리분별을 하는 기능이 아니야 걸레는 걸레다워야 청소일신
  • 빨갱이척결 2015/09/29 [00:47] 수정 | 삭제
  • 북한신문인지 알았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심판 2015/09/29 [00:01] 수정 | 삭제
  • 군 복무중. 다마키 마사오 불시 방문으로.현충사 작업장에서 곡괭이 자루로 빠다 20대 맞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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