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위하여
‘인성교육’으로 인격을 기르고, 바른교육을 통해 ‘지(知)의 의무’를 배워야 한다
 
권혁시 칼럼   기사입력  2016/08/03 [18:14]

 

      퇴계 16년간 편지로 손자를 가르치다

     [출처] [안동 선비정신의 미학②] 

어린 시절에 가학과 서당에서 수학하여 인성교육을 마친 조선시대의 지식인 사대부, 즉 선비들의 삶의 의미와 목적, 최고의 가치관·인생관·세계관은 성인군자의 지향이었다. 이를 위한 배움이 ‘위성지학’(爲聖之學)이며, 같은 의미로써 성인지학(聖人之學, 성학)은 구체적인 방법론, 즉 수양론이다. 이를 통하여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열심히 배우고 깊이 생각하며 갈고 닦은 ‘선비정신’으로써 조선왕조는 세계사에서 유래가 거의 없는 5백년의 오랜 역사를 이어갔던 것이다.


선비정신의 힘, 그 지적능력이 추동했던 5백년 역사의 조선왕조가 힘없이 무너지고 일제 식민지, 그리고 연이은 국토분단과 3년간의 내전, 그 기나긴 질곡에서 겨우 벗어난 우리나라는 1960년대 중반부터 정부주도에 의한 경제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60년대 말, 70년대 초에는 가난을 물리치기 위한 노력의 성과가 아직 나타지 않은 터라 여전히 빈곤한 상태였다. 경제적으로 대단히 힘든 시기였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예의범절을 비롯한 예도와, 상부상조하는 사단(四端)의 심성과 의리를 통하여 ‘도덕적 인간본성’(仁·인)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윤리규범이 이어지고 지켜졌다. 


조선 말기에 외척들의 무도한 세도정치로 크게 손상을 입었고,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했던 36년의 일제강점과 6·25전란의 참화에도 이를 견디어내고 ‘선비정신’은 그렇게 살아있었던 것이다. 오백 년여 긴 세월동안 뿌리를 깊게 내린 한겨레의 정신적 지주, ‘위성지학’의 선비정신이 쉽사리 뿌리 채 뽑힐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해방정국에서 친일 소인배들이 득세하여 희미해져 가던 ‘민족정기’를 되살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불법 집권한 박정희정권은 재벌중심의 경제개발 일변도의 정책, 이른바 ‘개발독재’를 밀어붙여 경제발전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천민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역효과, 악폐를 키웠다. 그리하여 ‘물질만능주의·배금주의’가 한국인의 일상사는 물론 정신세계마저 지배함으로써 전통적 ‘선비정신’이 여지없이 말살되는 참담하고 불행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정신적 가치가 추락하고 인간본성이 파괴된 국가·사회(공동체)는 교만과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고, 이기심과 과잉자아는 재산을 위시하여 권력, 명예, 쾌락 등에 집착하며 부질없는 ‘탐욕’에 빠지게 한다. 그로부터 치솟는 과욕은 끝이 없으므로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위선과 형식주의, 독선과 권위주의, 그리고 무원칙, 부조리, 부정부패로 이어지는 불행의 점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 공동번역 신약성서 ‘루가복음’)

 

인간은 바르게 서서 멀리 앞을 내다보면서 걷는다. 그리고 머리를 곧추세워 깊게 생각할 줄 안다. 그렇게 짐승과는 달리 특출 난 면이 있어 인간은 자칭하여 만물의 영장이라 이른다. 그런데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이 무색하게 ‘짐승의 삶’을 전혀 꺼리지 않는 인간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명성을 휘날리며 행세깨나 하던 뇌리에서 희미하게 지워진 수많은 그런 위인들. 그리고 이름 석 자가 너무도 뚜렷하게 떠오르는 홍만표, 진경준, 나향욱, 우병우 등, 다들 배울 만큼 배우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런대로 괜찮은 자리를 얻어 남부럽지 않게 살 만한 그들이다. 


그런데도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아 불쌍하게 ‘짐승의 삶’을 사는 것인가? 그들의 생각과 행태는 “짐승만도 못하다!”는 비난과 저주가 섞인 언설과 전혀 다르지 않다. 백수의 왕인 사자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는데, 그들의 탐욕은 한도 끝도 없는 듯하다. 그런데다가 과오를 통렬하게 반성하고 책임질 생각조차 없으니 그야말로 인면수심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더 어이가 없는 건 ‘짐승의 삶’을 사는 그들이 오히려 선량한 보통사람들을 짐승(개돼지) 취급하고, 알량한 그 자리를 독차지해야 한다는 집착, 강박감에서 ’신분제‘를 염원하여 운위한 사실이다. 천민(天民)의식, 평등정신과 멸사봉공의 태도를 결한 편협하고 저급한 ‘엘리트주의’의 가증할 망념의 발로가 분명하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일 이런 무지·무도한 특권의식과 우월주의의 시대착오적 고정관념이 고위관료를 비롯한 특권층에 일반화, 집단의식이 되어 있다면 정말 큰일이다.

 
직립보행하며 사고하는 만물의 영장, 더구나 국가의 지도급 인사들이 왜? 이 지경이 되도록 타락하였단 말인가. 매스컴을 타고 상세하게 알려진 그들의 전모가 적이 황당하다 못해 참담하지 않은가? 그러한 까닭은 이리저리 깊이 생각건대, 많이 배우기는 했으나 잘못 배운 탓이다. 차라리 배우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테고 남을 해치는 교만과 이기심, 탐욕과 집착이 그렇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굳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많은 부류가 국가·사회를 이끌어 가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준행해야 할 지위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 지극히 위험한 사태를 그들 자신은 인식, 자각치 못하여 그 부조리와 폐단을 끊임없이 확장시키는 것이 비극이다. 왜냐하면 거침없이 나라와 국민에게 총체적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부연하거니와, 이러한 모든 위험과 폐단은 ‘배움’(學·학)의 문제다. 인간은 학문과 경험을 통하여 배우며, 배워야 하는 까닭은 앎, 곧 ‘지’(知)를 위해서다. 그래서 잘못 배웠다는 것은 제대로 ‘지’를 터득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배운 것들이 더해!” 이런 아이러니, 시니컬한 개탄과 비난이 그로부터 비롯된다. 그렇다면 과연 ’지’란 무엇인가. ‘지’는 경험이나 학습에 의한 단지 잡다한 지식의 축적이 결코 아니다. 사람의 머릿속에 기억된 지식정보는 컴퓨터에 저장된 데이터와 다를 바 없다. 진정한 ‘지’는 사물과 그 이치를 탐구하여 분석하고, 의미를 찾는 것.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지’를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은 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세의 ‘희망’을 이루는 것이다(인간의 지고한 희망은 ‘상선’이며, 모든 사물의 최고를 이른다). 이를 위해서 ‘지’의 무한한 역할, 지적능력의 발휘가 필수이며, 반드시 그리하지 않으면 ‘희망’을 이룰 수 없으므로 ‘지(知)의 의무’가 필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지’의 역할, 의무는 세상사의 극히 일반적인 원칙이고 원리지만, 부언컨대 제대로 배워서 ‘지’를 알지 못하면 도무지 ‘지의 의무’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 역할, 지적능력을 다할 수도 없는 것이다(그런 상태에 이르면 무도·무지가 판치는 혼란하고 불안한 세상으로 전락한다).


그러면 ‘지’는 무엇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 답은 생각과 말이며, 생각 역시 말로 나타내므로 ‘지’는 곧 말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지의 의무’의 핵심인데, 말은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되고, 소통은 열려야 이루어 지기에 그렇다. 말의 이 ‘개방성’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수렴하여 가능하게 하는 지적능력, 그 역할이다. 그러므로 특히, 지식인이 세상사의 이슈에 무관심하며 그것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즉 쓴소리, 바른 말하지 않는 것은 그 중요한 역할을 외면하는 것이고 명백하게 ‘지의 의무’를 회피한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난제는 ‘지’를 깨달아 터득하는 일이 일순간에 단순히 그래야겠다는 생각과 의지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의 의무’는 ‘선의지’와 일맥상통하여 그 토양 위에서만 인식과 실천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성교육’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더없이 중요한 것이다.

 

3류 정치·사회·경제·교육·문화,
교육혁명을 통한 ‘의식혁명’으로 바꿔야 한다

 

일전에도 살펴봤듯이, 세계에서 가장 공명정대하고 공평무사한 ‘정의사회’를 이룬 이스라엘이 국민적 자부심으로 삼는 3인의 위인, 프로이트·아인슈타인·마르크스를 비롯하여 콜럼버스, 스피노자, 뉴턴, 아담 스미스, 에디슨, 프란츠 카프카, 앙리 베르그송, 샤갈, 멘델스존, 로스 차일드, 트로츠키, 피카소, 록펠러, 헨리 키신저, 조지 소로스, 스티브 잡스, 빌게이츠, 스티븐 스필버그, 마크 저커버그 등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위인, 유명인사들이 유대인이며, 인구비율로는 세계 최다·최고다(현재 유대인은 1천5백만여 명, 세계인구 60억의 약 0.25%).

 
전세기의 세계 최고의 지성 21인 가운데 70퍼센트가 넘는 15명이 유대인이고, 노벨상의 15퍼센트, 특히 노벨경제학상은 65퍼센트를 유대인들이 수상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명문대학(아이비리그) 교수의 과반수, 재학생의 40퍼센트, 40여 명 최상위의 부자들 가운데 반수가 유대인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의 뛰어난 능력과 위상과, 이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낸 유대 식의 교육이야말로 인성교육의 중요성과 위력을 실증하며 특히 유소년기의 조기, 집중교육이 중요하다. 유대인은 성인식(버머츠마)을 대비하여 세 살부터 학교나 랍비의 집에서 하루 6~10시간 토라와 탈무드를 열심히 배운다.

 

“만일 어려서 가르치지 않고 자라서 커버리면, 잘못되고 그른 것을 본받아 익히며 마음을 놓아 다잡지 못하므로 가르치기가 심히 어렵다”(若幼而不敎 약유이불교 至於旣長 지어기장 則習非放心 즉습비방심 敎之甚難 교지심난)


인성교육의 핵심은 주지하다시피 인간본성, 즉 선의지·도덕적 본성을 기르도록 가르치는 것이며, 유소년·청년기 이전에 인격과 자아가 완성 되므로 이 시기에 철저하게 교육하여야 한다. 어린 시절에 인성교육을 통하여 의식화된 ‘정신적 가치’(신념과 가치관)은 좀처럼 흔들리거나 변할 수 없는 것이다. 


觀海者 難爲水 관해자 난위수 “바다를 본 자는 물을 말하기 어렵다”(맹자) 이 경구의 심오한 뜻은, “본 바가 이미 크면 하찮은 것은 볼 것이 못 된다”는 것이며, ‘성인군자’의 경지를 이름이다. 이처럼 청소년기에 인성교육을 통하여 의식화하고 체현되는 도덕성, 주체의식, 정의감, 합리성, 창조정신, 실천력, 원대한 이상 등의 ‘선의지’(인간본성)는 부정과 불의, 무원칙과 부조리, 불안과 좌절 등 모든 네거티브의 발상은 추호도 용납지 않고, 아예 생각도 할 수 없는것이다. 


그러므로 더 말할 나위 없이 지도자, 위정자를 비롯한 공인(公人)들은 공명정대·공평무사·멸사봉공이 제 1의 덕목인 바, 인격도야에 힘써 ‘성인군자’다운 자질과 신념을 갖춘 사람들이어야만 한다(누구이든 열심히 공부하고 깊이 생각하며, 정의롭게 말하고 선을 행하며 더불어 나누기를 잘 하는 사람이 바로 성인군자인 것이다). 대저 그러하지 않고서는 단언컨대, 극도의 혼란과 위기에 처한 나라를 바로 세워 국민들이 마음 놓고 잘살게 할 방도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위하여, 그리고 국가 백년대계이므로 인성교육을 바탕으로 한 전인교육을 반드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유대 식과 거의 다름없는 ‘위성지학’의 우리 고유의 교육방식을 온고지신하여 실행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일 것이다).

 

그런데도, 정책철학의 부재로 인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의 공적가치와 역할이 철저히 무시되고 상업화, 즉 막대·막강한 자본에 의한 이윤추구의 수단(상품 또는 시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백년대계의 교육이 사교육이 조장하는 성적제일주의, 서열중심, 입시위주 등, 교육적 가치와 목적과는 전혀 무관한 맹목적 학습으로 퇴행하였을 뿐 아니라, 공교육의 무력화로 인해 과중한 사교육비가 서민들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대한글씨검정교육회

권혁시 이사장

그 결과, 궁극적으로 인성과 지적능력을 기르고, 이를 통하여 ‘지의 의무’를 다하게 하는 진성한 배움과 가르침이 없어진지가 이미 오래라는 통탄할 사실을 어느 누구도 부인치 못할 것이다. 한국인이 머리(IQ)가 좋기로는 결코 유대인에게도 뒤지지 않고, 교육열은 오히혀 더 높을 터인데도 세계적인 석학을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교육은 지금, 깊이 병들어 위중한 상태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선하여 공교육의 정상화, 참교육·바른교육(정학)을 강화하여 시급하게 실행해야 하며, 사교육은 보조·보충의 역할을 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면 (격하게 말해서) 교육개혁으로 ‘의식혁명’을 이루고, 이를 통하여 3류를 면치 못하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 등등, 우리나라의 전 분야를 1류로 격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누구이든 제대로 잘 배워서 특히, 국가 최고지도자를 필두로 모든 공인들이 ‘지(知)의 의무’를 철저히 준행하여 국가·사회에 기여해야 마땅하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고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함으로써 공적사명을 다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Share on Google+ 구글+ 카카오톡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스토리 밴드 밴드 네이버블로그 블로그
기사입력: 2016/08/03 [18:14]  최종편집: ⓒ 서울의소리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권혁시 관련기사목록
더보기
주간 베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