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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로 재조명되는 '대종교' 나철 선생 서거 100주기
일제에 맞서 10만의 순교로 되살아난 '민족의 영웅'
 
서울의소리   기사입력  2016/09/12 [02:46]

오는 15일은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던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 선생이 일제의 탄압에 맞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100주기를 맞는 날이다.

 

대종교를 통해 단군 민족주의를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는데 진력한 나철 선생은 1910년 만주에 진출해 활발한 포교활동을 펼쳤고 이곳에 그가 세운 교구는 사실상 독립운동 기지 역할을 했다. 

 

나철 선생 서거 이후에도 대종교를 이끈 지도자들은 치열한 독립투쟁을 이어갔다.

 

2대 교주인 김교헌·3대 교주인 윤세복에 이르기까지 특히 1923년에는 신도수가 30만명을 넘기도 하면서 대종교 전성시대를 이끌었고 이 시기는 항일 무장독립 투쟁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와도 겹친다.

 

대종교는 일제 아래에서 10만여명의 순교자를 냈고 3·1 독립선언에 앞서 대한독립선언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 청산리전투와 조선어학회 사건 등도 대종교 신도들이 이끈 대표적 항일운동 사례로 꼽힌다.

 

▲ 홍암 나철 대종교 대종사가 1916년 8월 보름 순교하기 열흘 전에 사리원역 앞 사진관에서 남긴 기념사진. 한복 차림에 대종교의 삼법수행을 상징하는 단주를 손에 쥐고 있다. 

 

이처럼 지금은 단군교로만 피상적으로 알려진 대종교는 당시에는 항일 독립운동 그 자체였다. 나철 선생 본인도 대종교 창시 이전 1907년 유신회를 조직해 이완용 등 을사오적 처단에 나선 정미대 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고종의 특사로 사면된 나철 선생은 단군교에 입교한 뒤 1910년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칭하고 만주로 건너가 본격적인 포교활동에 나섰다. 북간도에 교당을 마련하면서 독립운동의 거점을 확보했고 백두산 인근인 화룡현 청파호에 대종교 총본사를 뒀다.

 

총본사를 중심으로 만주 일대와 한반도, 중국과 일본, 구미지역을 관할하는 해외교구까지 5개교구를 획정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했다.

 

나철 선생은 1915년 경성으로 돌아왔으나 그해 10월 일제는 들불처럼 번져가던 대종교를 막으려고 탄압책인 종교통제안을 공포했다. 다음해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자 나철 선생은 자신의 죽음으로 대종교를 구하고자 1916년 음력 8월 15일 구월산 삼성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철 선생 서거 이후 만주에서의 항일 독립운동과 무장투쟁은 대종교 신도들에 의해 본격화된다. 홍범도·이동녕·김좌진·이범석·현천묵·여준 등 많은 대종교인이 무장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특히 만주 일대에서 큰 활약을 펼친 북로군정서도 나철 선생이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던 서일을 주축으로 무장투쟁을 펼쳤다. 

 

대종교 2대 교주인 김교헌은 1918년 재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모아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고 뒤이은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와 3·1독립선언서의 발판이 됐다.

 

3·1 독립선언 다음해인 1920년에는 만주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했는데 대종교 신도들이 뭉친 북로군정서의 전과였다.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요인물들인 이시영·신규식·박은식 등도 대종교 신도들로 알려졌다. 대종교 신도는 아니지만 김구·이승만·안창호 선생 등도 단군 자손으로서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자주 드러내야 대종교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개천절이 국경일로, 홍익인간이 교육이념으로 제정됐으며 서기가 아닌 단기가 정부 공식 연호로 채택되기도 했다. 일제 치하에서 빛나는 업적을 쌓았지만 해방 이후 나철 선생과 대종교는 오늘날까지 긴 암흑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일제의 지속적인 탄압과 해방 후 밀려온 서구 종교의 배타적 태도, 대종교 인사들의 대응 실패 등이 겹치면서 나철 선생과 대종교는 개천절로서만 겨우 맥을 이어가고 있다.

 

나철 선생 서거 100주기임에도 사회적 관심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이다. 100주기 추모제도 오는 15일 서울 종로의 단군성전에서만 치러지고 나철 선생의 고향인 보성에서도 추석에 가려 별도 행사를 마련하지 못했다.

 

보성군 관계자는 "우리의 근현대사가 나철 선생과 대종교에 빚진 것이 한둘이 아닌데도 그들에 대한 관심은 창피할 정도로 미미하다"며 "이들이 쌓은 공헌과 위상에 견줄만한 조명과 평가가 하루 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10만의 순교로 되살아난 민족의 영웅 

홍암 나철 100주기 연재에 부쳐,

 

홍암 나철과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외에 우리 사회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민족종교지만 우리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큰 인물과 중요한 종교다.

 

국조 단군과 국시 홍익인간, 국기 단기, 국전 개천절을 재정립한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판과도 같다. 서일, 김좌진의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의 본거지로 10만의 순교자를 낸 것은 물론 주시경,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 국어와 국사 운동의 출발도 홍암 나철과 대종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과정에서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기치 아래 외교, 테러, 교육, 종교, 무장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고, 마침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았다.

 

1916년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 홍암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지 100주기,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에서 서울, 도쿄를 거쳐 화룡, 영안, 밀산 등을 순례했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미국의 노골적 패권 재구축이 맞부딪치고 있는 격변의 시기에 홍암 나철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할 이유는 충분하다. 더군다나 서구식 사고방식과 생활문화에 완전히 빠져있는 우리의 현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구월산 삼성사에서 이 순례를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란다. 아울러 이번 기획취재에 도움을 주신 국내외의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필자 주

 

 <연재 기사>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홍암 나철 100주기 ①> 도제사언문을 찾아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몸통이 중요하다”
<홍암 나철 100주기 ②> [인터뷰]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제일 위대한, 제일 억울하게 묻혀 있는 인물”
<홍암 나철 100주기 ③> 기념관 준공 서두르는 벌교 생가

 

일본 황궁 앞에서 단식투쟁 벌인 조선 선비
<홍암 나철 100주기 ④> 일사와 도동기를 찾아서

 

“700년간 닫힌 신교의 교문이 다시 열리어”
<홍암 나철 100주기 ⑤> 을사5적 처단투쟁과 단군교 중광

 

“내가 신의가 없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자”
<홍암나철 100주기⑥> [인터뷰]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 원장

 

"천하에 독립한 제일 큰 산은 오직 한 백두산이시니"
<홍암나철 100주기⑦> 만주로 망명한 대종교 총본사

 

홍암의 후예들, 청산리서 승전고 울리다
<홍암나철 100주기⑧> 당벽진과 액하감옥의 비극

 

“후대인들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홍암 나철 100주기⑨> [인터뷰] 맹고군 중국 밀산시 전 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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