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이 머지않은 이즈음 우리는 ‘처음 하늘이 열린’(開天·개천) 경이와 환희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기리며, 그날을 즐거이 맞을 수 있는가. 아득히 먼 날부터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아 이어온 빛나는 얼과 그지없이 넓은 마음, 모진 시련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널리 인간세를 이롭게 한다”(弘益人間·홍익인간) 그토록 드높은 ‘겨레정신’을 한결같이 따르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일제의 강점으로 우리나라, 우리겨레는 주체를 잃었고, 일제치하에서의 삶은 자기배신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수치와 능욕, 통한과 수모 속에서 무력하고 비겁하게 주저앉아 있을 우리 겨레가 아니었고, 결코 그래서는 안 되었다. 나라를 도둑맞아 병탄당한 그 해 10월 26일(음력), 안중근 의사는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일제의 수괴,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처단하였고 3백여 년 전, 임진왜란을 당하여 그러했듯이 각처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목숨을 건 항일투쟁을 벌였다.
건국절 제정 논쟁은 2007년 9월, “광복절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이 같아 지금까지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이 중시되고 건국일인 1948년 8월 15일의 의미는 축소되어 왔기에 개칭해야 한다”(한나라당 정갑윤 의원) 그런 주장을 내세워 광복절을 건국절로 변경하기 위한 법률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시작되었고 발의 철회로 1년 만에 종료되었다. 최근 들어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이를 다시 재론하고 나섰으나, 예처럼 쉽사리 결론짓기가 힘들 터인데 그 개념, 기준이 불변・확정적일 수 없기에 그렇다. 시대와 상황, 그리고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건국의 ‘기점’(시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거니와, ①BC 2333년 10월 3일; 개천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개천절을 제정하여 우리나라가 (고)조선으로부터 건국되었음을 밝혔으며(기념행사를 행하였던 음력날짜를 지지하는 견해도 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단군기원(기원전 2333년)을 적용, 시행하였다(1948년 9월 25일, ‘연호에 관한 법률’ 제정). ②1919년 3월 1일; 삼일절, 제헌헌법에 건국임을 명시하였으며, 1948년 9월 1일자 제 1호 관보에는 당해연도를 ‘대한민국 30년’으로 표시하여 대한민국의 원년으로 기산하였다. 이론적으로도 일제에 의해 정부가 소멸됐지만 ‘국체 및 정체의 주체’(영토·국민) 당사자(국민)가 엄연히 존재하여 스스로의 명확한 인식(집단적동의·collective agreement)하에 ‘독립’을 선언하였는 바, 그 시점에 건국이 성립되었다는 논지가 핵심이다. ③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수립 기념일, 조선민족운동연감(일제편찬), 임정요인들의 기록(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서 확인된다. ④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일; 수개의 임시정부가 그해 9월 11일,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에 통합·단일화되었으며, 따라서 궁극적 정통성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있고 주권의 주장, 주재국가(중화민국)의 승인, 국가적 활동 등으로 국제법적 요건을 갖춘 ‘합법적 정부’라는 지지의견이 지배적이다. ⑤1945년 8월 15일; 광복절, 건국은 독립에 우선하며 더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독립유공자에게 수여되는 건국공로훈장은 건국이 바로 독립임을 뜻하며, 특히 잃었던 국권(주권과 통치권)을 회복하였으므로 이 날이 바로 건국절이 명백하다는 논리다. ⑥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일, 임시정부는 정부의 요건, 즉 영토확보, 주권적 지배권, 법률제정·시행 및 집행강제권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건국을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요건을 완전하게 충족한 정부가 수립된 시점이 건국일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제기하였다.
이러한 모든 주장들에 대한 반론 또한 심히 격렬하며 극히 집요한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1948년 8월 15일과 그 이전의 시점에 대한 공방은 더욱 치열하다. 1948년을 지지하는 견해에 대한 (주지하다시피) 역사단절 공백초래, 독립운동 부정, 헌법정신 위배 등등, 많은 논박 가운데 핵심은 우리나라 ‘건국사’에서 일제침략·식민통치 및 친일행적을 삭제하려는 ‘저의’에서 역사의 왜곡, 훼손도 불사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더하여, 장구한 인류역사의 다변한 양상들을 무시한 채 막바지에 이른 19세기 전후에야 겨우 형성된 근대적 의미의 ‘정부(국가)요건’이라는 단편적인 관점에서 쟁점을 삼고 건국을 정의하려드는 편협성의 문제는 반드시 재고하여야만 한다). 이에 반하여 1948년 (정부수립) 이전의 건국론에 관한 반론의 주된 논리와 근거는 일관하여 국체 및 정체, 즉 국가권력의 소재(주권)와 주권행사의 방법(정치체제·정부형태) 등이 미비하다는 점이며, 그것이 주된 논거이다.
이웃나라 일본은 수많은 정권들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극히 상징적·신화적 존재의 등장을 건국의 기점으로 견지하고 있다. 태양신(天照大神·천조대신) 아마테라스 여신의 5대손인 초대 덴노(천황) 진무(神武)가 즉위한 BC 660년 2월 11일(음력)이 건국일이다(일본 최초의 국가 ‘야마타이’가 건국된 수백 년 전의 시점이다). 대만(중화민국·중국국민당)은 1912년 1월 1일(같은 해 2월 12일, 청나라 멸망), 중국(중화인민공화국·중국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을 건국일로 정하였으나 대만은 중국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시의 수상 그렌빌은 식민지 아메리카에 인지세법을 시행하였고, 이에 미국인들은 거세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영국의회는 아메리카의 ‘사실상 대표’(virtual representation)로서 영국의 과세권을 당연시, 정당화하였다. 그렇지만 적어도 1775년 이전까지는 대다수 미국인들은 모국인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7년전쟁 후, 그들의 경제·자치를 심하게 옥죄는 새 법령들의 철회와 동시에 부당한 정책과 강압적인 통치의 시정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끝내 묵살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보스톤 차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더욱이 존 로크의 ‘정부론’(Two Treaties on Government)에 의하여 당시에 풍미하던 ‘자유·평등’ 정신이 자극, 고취되었고 존 아담스의 항거,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 격정적인 패트릭 헨리의 연설이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독립정부의 수립은 어렵고도 힘든 일이었다. 독립을 반드시 쟁취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국민주권국가를 이룩해야만 하였다(존 아담스의 말마따나 이 과제는 세계사의 어느 순간에도 해결된 적이 없으며, 향후에도 해결될 수 없는 난제였던 것이다). 그렇게 험난한 가운데서도 미국인 모두가 협심 단결하여 고투한 끝에 1781년 3월, 미국의 승전이 확실해지자 12개 식민지(대륙)회의는 영구한 동맹을 결의하고 ‘연합헌장’(The Articles of Confederation, 미국헌법)을 반포하였다. 그렇다고 승전이 전적으로 ‘아메리카합중국’(USA)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과 8년간의 전쟁, 그리고 그 후 1783년, ‘파리평화조약’의 체결에 의해 미국은 비로소 정식으로 신생의 민주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실현한 위대한 미국독립혁명은 프랑스대혁명의 도화선이었다. 미국과 프랑스 시민들의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하여 인류역사상 초유의 대표적인 명실상부한 국민주권(國體·국체)의 민주국가(政體·정체) ‘민주공화국’을 건국함으로써 그 시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는 간절하게 ‘민주국가’의 건설을 바라면서도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건국절 논란에 휘말린 우리나라가 반성과 회심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 며,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전범으로 여겨야 할 바이다.
‘건국절’, 그에 대하여 평소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그 말을 들을 때면 불현듯 ‘개천절’이 떠올랐을 뿐이다. 건국기념일, 나라 세움을 기리는 날. 개천절을 무의식중에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런 까닭은 어린 시절부터 ‘우리나라는 단군이 세웠고 (고)조선이라 이름하였다’, 분명하게 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고려시대 이후에는 단군을 ‘국조’(國祖, 나라의 시조)로 일컬으며 추앙해 왔던 것이 아니겠는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의 대한민국(남한·북한)으로부터 대한제국·조선, 고려, 태봉·후고구려, 후백제, 발해, 신라, 백제, 고구려, 가야, 마한·진한·변한, 옥저, 동예, 부여, (위만·기자·고)조선에 이른다. 우리나라, 한겨레는 반만년 역사 속에서 분립으로부터 통일을 이루고 다시 분립과 통일을 거듭하여 나라의 우두머리(통치자)와 나라이름(국호·국명)이 바뀌었다. 그런 사실만으로 (현재의 시점, 우리나라 국민의 입장에서) 각기 다른 이름의 그 나라들을 우리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로 보아야 하는가? 굳이 그렇게 단절적으로 편협하게 인식할 이유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더구나 한 국가의 결정요소인 ‘국체·정체의 주체’(국토와 국민, 천민(天民)의식·천부인권·왕권신수설의 관점에서 전제군주국의 제왕도 국민의 한 사람이다), 결코 그것이 없어지거나 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갈라지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통치자(세력)가 바뀌고 그에 따라 국정이념 및 정치체제, 아울러 국호를 달리 했을 뿐인 까닭이다. 훗날 우리나라가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이루었을 때, 또 하나의 다른 나라를 건국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확실하게 부정, 반박할 수 없는 이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그 감격적인 역사를 기리기 위해서도 건국절이 아닌 ‘평화통일기념일’이 더 합당하다는 생각이다.
앞에서 살펴본 모든 정황에 비추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첫째, 작금의 상황에서 굳이 ‘건국절’을 명시, 명명하여 확정할 이유와 필요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기왕에 정해진 개천절을 건국일삼아 기렸으면 한다(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정확하게 환산하여 변경하는 것은 타당하겠으나, 처음 나라 세움을 ‘하늘 열림’의 심오한 뜻으로 격조 높게 나타낸 개천절을 건국일로 이름 바꿀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의 민족혼·겨레정신, 곧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진작하는 데 모든 국민이 마음과 지혜를 한 데 모아 나가야 할 것이다. 셋째, 온 겨레가 일제에 거세게 반발, 항거하여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만방에 고하고 소리 높여 부르짖었던 그 날을 의미 없는 3·1절이 아닌 ‘독립기념일’ 또는 ‘독립선언일’로 바로잡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여러 갈래로 다양한 의견과 주장이 제기되어 의견통일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민주국가의 모든 의사결정은 ‘국민적합의’(consensus)가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이를 준행하여야 할 것이다. “가장 잘 통치된 나라에서는 국민 개개인의 감정이 국가 전체의 감정과 가장 가까운 것이다”(플라톤, ‘국가’) 결론삼아 비유컨대, 시종일관 배척을 일삼던 얼마 전과는 달리 다윈의 ‘진화론’을 포섭하고자 하는 근래의 ‘창조론’(해석)에 의하면, 세상에 창조된 모든 생명체는 완성을 위하여 진화하고, 또 생멸을 되풀이하며 창조를 거듭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세에 새로운 건국이 끊임없이 반복하여 이어져왔으며, 그래서 ‘건국’은 우리에게 지금,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어느 한 시점(기점)이 문제가 아니라, 되풀이하는 건국을 통해 민족의 숙원인 ‘평화통일’을 이룩하고, 건국의 완성을 내다보며 역사의 단절 없이, 그치지 않고 진화·발전시켜 나아가는 것이어야 한다(‘창조론’의 발원, 그리스도교 신학은 창조는 ‘종말’로써 완성되며, 그 완결의 종말은 끝이 아니라, 파루지아(farrugia, 재림)이며 영원무궁·영생영복의 새로운 시작임을 가르친다).
그럴진대 국론분열만 일으킬 부질없는 건국절 논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마땅하며, 앞에서 말한 미국의 존 아담스의 견해처럼 완전한 건국이란 있을 수 없다할지라도 영원한 미래지향의 관점에서 건국을 인식하여야 한다. 건국의 모든 의미를 바르게 지득하여 정대한 역사의식, 투철한 실천의지를 견지하야 한다. 그리하여 건국의 개념과 기준이 불변·고정적일 수 없는 이상, 건국에 관한 모든 순수한 활동(movement)을 통섭하고 추동하면서 지도자·위정자, 그리고 전 국민이 항상 건국의 완성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간다는 일념과 충정으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서울의 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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