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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쟁의 아버지' 대종교 홍암 나철 서거 100주기
대종교 총본산 '조건없는 남북대화 촉구' 성명 발표
 
서울의소리   기사입력  2016/09/15 [02:01]

9월 15일(음력 8월 15일)은 '한국 독립투쟁의 아버지'로 불리는 대종교 홍암 나철(1863-1916) 서거  100주기를 맞이 하는 날이다.

 

일제 강점기에 나철 대종사를 필두로 하는 대종교는 명실상부한 항일 무장독립운동의 총본산이자 구심점이요 주역이었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은 물론 주요 거점 개척과 참여는 어느 집단보다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가능했다. 또한 10만여 명이라는 대종교의 종도들이 일제에 의해 순교당하는 고귀한 희생을 치른 피의 역사로 얻어진 결과였다

 

나철 대종사는 4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항일외교 활동을 펼쳤고, 1907년 을사오적 처단의거를 주도하여 국권회복의 의지를 내외에 천명했다. 그가 1909년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는 망했으나 정신은 존재한다)이란 명분을 앞세워 부활시킨 대종교의 등장은 구국운동의 일대 전기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특히 만주 무장독립운동에서는 이동녕·현천묵·계화·윤정현·황학수·김승학·홍범도·김혁·김좌진·윤복영·이범석·여준·이홍래·정신·이동하·한기욱 등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종교인들이 무장독립운동의 지도자급으로 활동했다. 나철 대종사는 
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스스로 숨을 멈춰(폐기) 순명조천(순교)했다.

 

 대종교 서일 종사,          홍암 나철 대종사,         김교헌 2대 종사,     윤세복 종사,

 

대종교 2대 종사인 김교헌은 단군시대부터 시작하는 주체적 역사서인 신단실기와 신단민사를 저술했다. 그의 사학은 일본이 한국을 비하하기 위하여 역사를 조작한 식민주의적 역사책들이나 사대주의 역사책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밝힌 것이다. 

 

김교헌은 1919년 2월 한국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무오독립선언을 했고 이 독립선언은 일본 동경 유학생에 의해 선언된 2.8독립선언과 국내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의 원동력이 되었다.

 

대종교 종사인 서일은 만주에서 북로군정서를 조직해서 일본군과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숙명적인 한 판의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서일 총재가 이끌고 김좌진이 사령관을 맡은 1700 명의 북로군정서 군대가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승리는 대종교 신앙의 힘과 독립을 염원하면서 뭉쳐진 독립군의 사기에서 비롯되었다

 

▲'청산리독립전쟁' 승리의 신화를 쓴 북로군정서는 서일을 총재로 대종교도들이 주축을 이뤘다. [사진 출처 - 대종교]

 

1942년 11월 19일 만주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서 일본경찰이 대종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사건을 날조, 교주 이하 간부 모두를 검거하여 박해를 가한 사건으로 이를 대종교에서는 임오교변이라 한다. 

 

이 때 투옥된 간부 중 권상익(權相益)·이정(李楨)·안희제(安熙濟)·나정련(羅正練)·김서종(金書鍾)·강철구(姜銕求)·오근태(吳根泰)·나정문(羅正紋)·이창언(李昌彦)·이재유(李在囿) 등 10명이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그 밖의 간부는 교주인 단애의 무기형을 비롯하여 15년에서 7년까지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8·15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였다. 이 때 옥사한 10명을 순교십현(殉敎十賢) 또는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고 한다.

 

 '임오교변'으로 옥사한 '순교십현(殉敎十賢)'

 

대종교는 홍암 나철이 순명조천한 음력 8월 보름을 가경절(嘉慶節)로 정해 기념하고 있으며, 올해 9월 15일이 100주기가 되는 날이다. 대종교는 15일 오전 6시 서울 홍제동 소재 대종교총본사 천궁에서 선의식(제천의례)을 올린 뒤 경하식을 가질 예정이다.

 

대종교 총본산  '조건없는 남북대화 촉구' 성명 발표

 

한편 대종교는 홍암 나철(1863-1916) 대종사 순명조천(순교) 100주기를 맞아 "우리는 단군 성조의 후손으로서 ‘애합종족’ 사랑으로 겨레를 하나 되게 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일촉즉발의 전쟁의 위기로 치닫는 남북간 동족간의 대립대결을 중단할 것을 남북 양 당국에 촉구한다" 며 남북 당국 간 조건없는 대화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종교는 성명서에서 “홍암 대종사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 대종교는 아래와 같이 겨레 앞에 우리의 뜻을 천명한다”면서 남북 당국에 △남북간 동족간의 대립대결을 중단할 것. △이산가족의 아픔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 △양 당국 간에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아래는 대종교 성명서 전문.

 

홍암대종사 순명조천 100주기, 가경절 100주년을 맞이하며 팔천만 겨레에게 보내는 대종교총본사의 입장

 

가경절(嘉慶節)은 음력 8.15일로 추석과 같은 날이지만 대종교에서는 홍암(弘岩) 나철(羅哲) 대종사가 순명(殉命) 조천(朝天)한 날 즉 순교한 날로 대종교 사대 경절 중의 하나이다. 대종사가 1916년 순교하셨으므로 올해는 100번째의 가경절을 맞이한다. 1912년 홍암이 꿈에 한시를 짓고 깨어서 시를 생각할 때 ‘옥전금화○○일(玉殿金花○○日)’ 의 구절에서 두 자가 생각이 나질 않았다. 3년 후 추석날 서일이 꿈에 가경(嘉慶: 즐겁고 경사스러움)이란 글을 얻어 대종사에게 주니 딱 맞는 단어였지만 그 뜻을 모르다가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할 때 그 구절이 ‘하늘궁전의 금꽃(상여나 옷에 장식으로 달았음)을 보는 가경일’ 이란 뜻임을 알게 되어 추석에 순교하였고 대종교에서는 그 날을 가경절로 지정하여 대종사를 추모하고 있다.

 

홍암은 국운이 풍전등화였던 1863년 전남 벌교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후 어지러운 국난의 시대에 관직을 스스로 사퇴했다. 그 후 을사오적 주살을 기도하고 또 독립을 위하여 대일외교활동을 벌여서 '한국 독립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는 일본의 침략은 무력으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려야 된다고 생각해서 우리나라 고래로부터 전승되어온 신교(神敎)를 대종교란 이름으로 정비하여 중광(重光 다시 빛을 보게)했다. 그가 중광한 대종교는 단순하게 한 사람이 열심히 기도하거나 수도하다가 창립한 교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가 고래로부터 지니고 있던 종교이다. 단군 왕검시대부터 하느님을 숭배하고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등의 제천의식을 거행한 우리 겨레 고유의 신앙 형태이었던 그 종교는 오랫동안 중국이나 인도나 서양의 외래 종교들에 밀려서 겉으로 활기를 띄지 못하고 민간에 전승되어왔다. 나철은 우리의 신교가 세상 모든 종교를 포함한다고 믿었고 고유의 도를 지키면 언젠가는 다시 살아난다는 신념을 가지고 독실하게 하느님을 믿었음과 동시에 수도에 전념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 수도에 진전이 있어서 1909년 2월 어느 날 새벽에 묵계를 받았고 만주에서는 영험을 일으키는 이적을 행했다. 기도해서 병을 고치고 비를 내리게 하는 이적은 나철이 큰 교단을 이끌면서도 수도에 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중광한 대종교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입교하여 진리를 탐구하고 우리의 역사와 종교와 언어와 문화를 찾고 연마하였으니 대종교는 전통문화 계승의 마당이 되었다. 홍암과 대종교인들은 대종교를 중광하고 주체성을 가지면서 우리역사도 바로잡아 중광한 해부터 개천절을 기념하였다. 우리민족은 거기서 얻은 찬란한 반만년 역사와 종교에 대한 자부심으로 나라를 빼앗긴 어두운 시대를 견디어 냈고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생활에 큰 활력을 가지게 되었다.

 

사학자이자 대종교 2대 종사인 김교헌은 단군시대부터 시작하는 주체적 역사서인 신단실기와 신단민사를 저술했다. 그의 사학은 일본이 한국을 비하하기 위하여 역사를 조작한 식민주의적 역사책들이나 사대주의 역사책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밝힌 것이다. 이 사학은 1910년대 한국사 서술을 주도했고 그 후의 국내외의 바른 사학에 발전적으로 계승되었다. 이상용은 만주사를 한국사에 포함시키고 만주인은 한민족과 동족이라고 인식하고 역사를 서술하였다. 또한, 기자조선과 한사군의 위치가 만주와 중국 북부 지역인 요동과 요서임을 밝혔다.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바 있는 박은식은 한국통사, 몽배 금태조 등의 역사책을 지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등을 집필하여 고조선, 부여, 고구려를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하였고 상고시대의 조선족과 삼국시대의 백제가 중국의 산동반도 등에 진출했음과 삼한의 이동설 및 전후 삼한설을 주장했다.

 

최초로 한글 문법을 연구하고 정립한 주시경은 대종교를 신봉하였으며 그의 정신은 후학들에게 계승되어 일제시대인 1921년 창립된 한국 최초의 민간학회인 조선어연구회와 그 후신인 조선어학회에서 그 결실을 맺었다. 이 학회는 철자 개혁을 위하여 벌인 맞춤법 (국어표기법) 통일운동과 표준어에 대한 국어통일운동을 성공리에 이룩하였고 국어 큰사전을 편찬하였다. 해방 후 한글 연구에 공헌한 학자들인 이극로, 김두봉, 이병기, 이희승, 정인보, 최현배 등은 모두 대종교인으로서 대종교 경전의 한글 번역에 참가한 사람들이었다.

 

김교헌은 1919년 2월 한국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무오독립선언을 했고 이 독립선언은 일본 동경 유학생에 의해 선언된 2.8독립선언과 국내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의 원동력이 되었다. 대종교 종사인 서일은 만주에서 북로군정서를 조직해서 일본군과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숙명적인 한 판의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서일 총재가 이끌고 김좌진이 사령관을 맡은 1700 명의 북로군정서 군대가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승리는 대종교 신앙의 힘과 독립을 염원하면서 뭉쳐진 독립군의 사기에서 비롯되었다. 독립군들은 10월 상달이 되면 돌로 제단을 쌓아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돼지와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나라의 독립을 빌었다.

 

이러한 대종교의 사회참여는 모두 홍암이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진 대종교를 중광함으로써 가능한 일들이었다. 우리는 홍암과 같이 우리의 좋은 점을 보존하는 주체성을 가지면서 글로벌 국제화시대에 세계적인 추세를 받아들여 능동적으로 소화해야 한다. 무비판적이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남의 것은 다 옳다고 하며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고 남의 나라 것을 우리 것에 능동적으로 접목시켜서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물질적으로 풍족해진 지금에도 부가 정의롭게 분배되지 못하고 대부부의 사람들이 불행하게도 눈으로 보이는 물질과학과 먹고사는 산업만을 추구하느라 바빠서 현대는 글로벌 무한 경쟁시대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때 인류공영 홍익인간을 소망하고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자는 홍암의 사상을 재조명하고 그의 사상을 따라야 한다. 이에 홍암 대종사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 대종교는 아래와 같이 겨레 앞에 우리의 뜻을 천명한다.

 

1. 우리는 반만년 단군 성조의 후손으로서 ‘애합종족’ 사랑으로 겨레를 하나 되게 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일촉즉발의 전쟁의 위기로 치닫는 남북간 동족간의 대립대결을 중단할 것을 남북 양 당국에 촉구한다.

 

2. 우리는 겨레의 명절인 추석 중추절을 맞아하며 천만에 이르는 이산가족이 상봉하지 못하는 아픔을 공감하고 남북 양 당국이 인도적, 동포애적인 차원에서 속히 만나 이산가족의 아픔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을 촉구한다.

 

3. 반만년 이어온 우리 팔천만 배달겨레는 어떠한 경우라도 남북 간에 제2의 동족간 전쟁이 일어나는 참화가 빚어지는 것을 결단코 반대한다. 이에 양 남북 당국이 냉정을 되찾아 홍익인간 정신에 입각하여 양 당국 간에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개천4473년 단기4349년 9월13일
대종교 총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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