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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돌 한글날에 부쳐...‘세종정신’을 본받고, ‘한글의 기상’을 살려야 나라가 바로 선다:서울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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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돌 한글날에 부쳐...‘세종정신’을 본받고, ‘한글의 기상’을 살려야 나라가 바로 선다

‘붓을 든 혁명가’ 주체적 군주 세종, 한글창제로 ‘의식혁명’을 이루다

권혁시 칼럼 | 기사입력 2016/10/10 [01:00]

570돌 한글날에 부쳐...‘세종정신’을 본받고, ‘한글의 기상’을 살려야 나라가 바로 선다

‘붓을 든 혁명가’ 주체적 군주 세종, 한글창제로 ‘의식혁명’을 이루다

권혁시 칼럼 | 입력 : 2016/10/10 [01:00]

 

대한글씨검정교육회

권혁시 이사장

고구려의 늠름한 젊은 무사들이 말을 타고 쏜살같이 내달리며 활을 겨누었다. 사냥감이 된 범, 노루, 사슴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달아난다. 이 ‘무용총의 수렵도’를 그린 때가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 그때로부터 다시 2만년·2만8천년 전, 아득히 먼 태곳적에 사슴, 노루 등 많은 들짐승들이 그려졌다. 무용총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사실적인 그림,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 벽화다. 현대미술에 버금가는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이들 벽화가 그려진 때가 각각 3만년·2만2천 년 전이었다.

 

반면에 인류가 최초로 글씨를 쓴 것은 그 후 1만7천년 내지 2만5천년이 지난 BC 3000년경,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문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문자의 탄생은 ‘그림’ 그리기로부터 ‘글씨’ 쓰기에까지 이르는 장구한 세월의 격차만큼 놀랍고도 위대한 ‘인류역사’의 첫걸음이었으며, 무궁한 ‘문명발전’의 원동력이었다. 고대로부터 문자는 지식·정보의 전달, 축적에 더없이 중요 한 역할을 다하여왔다. 현대를 고도로 발달한 ‘지식정보시대’, 최첨단의 ‘정보통신시대’로 일컫고 있지만, 수단과 방법에 디지털·모바일이 더해지고 바뀌었을 뿐, 문자가 그 핵심에 자리하고 있음은 여전히 변함없다. 이처럼 지대 불변한 문자의 위력을 제대로 인식함으로써 문자의 진흥을 통한 인류문명의 발전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고유문자 ‘한글’이 없었다면, 지금도 여지없이 남의 글자, 더구나 그 어려운 한문·한자와 하염없이 씨름하며 정보통신·디지털 문명시대에 한참 뒤처져 있을지도 모른다(한자는 소리글자인 한글과 달리 뜻글자여서 하나하나의 낱말, 즉 사물과 의미마다 각기 다른 글자를 가진 문자체계인 까닭에 그만큼 많은 숫자의 글자를 만들어 익히고 써야하는데, 현재는 글자 수가 5만여 자로 늘어났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런 상황은 안중에도 없이 무심코, 그러나 아주 유용하게 한글을 자유자재로 잘 쓰고 있다. 그럴진대 우리 겨레는 한글을 지어낸 세종대왕의 지고한 뜻, 곧 위대한 ‘세종정신’을 똑바로 알고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하며, 이를 본받고 이어받아 구현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처한 현세의 위기와 난관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세종은 첫째, 배우기를 좋아하여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학문을 통하여 많은 지식을 얻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바른 인식, 곧 진리를 찾고 지혜를 쌓았다. 둘째,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귀 기울여 듣고 깊이 생각하였다. 이로써 생겨난 문제의식은 주체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셋째, 넓고 깊은 학문과 사고로써 터득하고 깨달은 자주성·자존감과 의문은 선견지명과 창조적 마인드를 키웠다. 넷째, 폭넓은 공부와 사색은 문제의식, 주체성에 더하여 사명감·책임의식을 뿌리내렸다. 다섯째, 이와 같이 투철한 정신, 곧 확고한 의식에 의하여 위성지학의 실행, 학행·지행일치의 신념과 태도가 다졌고 불굴의 실천의지와 용기가 솟아났다(이 같은 ‘세종정신’이야말로 특히, 위정자들이 반드시 귀감삼고 실천해야 마땅하다).

 

부연컨대 훈민정음에는 ‘세종정신’, 즉 호학의 정신, 주체의식, 창조정신, 사명의식, 실천의지가 깃들어 있고, 바로 그 ‘세종정신’에 의하여 훈민정음이 탄생하였음을 바로 알고 ‘한글의 기상’을 우리나라 제 1의 표징·표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세계최고의 문화유산인 한글을 더없이 소중히 여겨 유용하게 잘 써야하고 더욱더 발전시켜야 함은 물론, 한글의 우수성을 제대로 인지하여 무한한 (민족적) 자부심을 가져야한다.

 

우리 한글의 특성은 첫째, 오랜 세월에 걸쳐 변화하거나 다른 글자를 모방, 변형하여 발전한 많은 문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세종대왕 한 사람의 의지와 아이디어로 창안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창제된 독창적인 문자이며, 따라서 글자를 만든 목적과, 지은이(창제자), 만든 때가 확실한 유일무이한 문자다.

 

둘째, 말소리의 기본단위인 음소(낱소리)들을 찾아내어 유형별로 분류하고 차례를 정하였으며, 자음은 발음(음성)기관을 본뜨고 모음은 천지인(天地人)의 형상으로 글자를 지어 체계적으로 조합한 완전한 소리글자다. 또한 사람과, 그와 더불어 함께하는 하늘과 땅(천지인, 三才 삼재)의 이치, 즉 우주와 세상을 아우르는 ‘철학의 핵심’을 담아냄으로써 창제의 정신은 물론 그 원리를 글자에 그대로 나타낸 문자다.

 

셋째, 한글은 형상, 형태가 없는 소리가 그에 걸 맞는 모양(소리의 시각화)으로 잘 드러나는 세계 최고의 ‘자질문자’(資質文字)다. 특히 기본글자에 획을 더하는 ‘가획 원리’에 따라 낱소리(음소), 소리마디(음절) 등 음운의 특징(자질)을 글꼴로 나타내며, 그로써 말(소리)글의 유형이 잘 구분되고 자질을 뚜렷하게 알 수 있는 독특한 문자이다.

 

이와 같이 여러 모로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한글은, 그밖에도 최상으로 발달된, 구성 원리가 아주 간단한 ‘음소문자’이면서 모아쓰기(附書法 부서법)를 함으로써 ‘음절문자’의 특징도 아울러 가졌다. 그리고 배우고 쓰기가 매우 쉬울 뿐만 아니라, 28자밖에 안 되는 기본 글자를 틀로 하여 세계에서 가장 많은 1만2천7백68자로 늘려서 쓰인다. 거의 모든 소리를 정확히 나타낼 수 있는, 글자 쓰기의 폭이 넓은 실용성도 어떤 문자보다 뛰어난 우수한 문자인 것이다(비교하자면, 알파벳 ‘a’는 ‘아, 어, 에이’ 등 여러 가지 소리로 발음되지만 한글은 한 글자가 오직 하나의 소리만 나타낸다).


‘붓을 든 혁명가’ 주체적 군주 세종, 한글창제로 ‘의식혁명’을 이루다

 

세종이 조선 건국초기의 혼란과 불안정을 극복하고 그의 치세에 문화의 발전과 태평성세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것을 강력하게 이끌었던 세종 자신의 출중한 자질인 ‘인격·능력·비전’과, ‘인식·선견지명·경청’의 탁월한 리더십이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학문과 인재’를 원동력 삼아 국가경영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끊임없이 실행하였고 거침없이 관철시켜 나갔다. 1443년·세종25년 12월 30일, 훈민정음의 창제가 바로 그 ‘결정체’였다(게다가 세종대왕은 고투하며 손수 훈민정음을 지어냈다. 世宗御製訓民正音 세종어제훈민정음).


그런 세종의 마인드와 리더십은 앞서 말했듯이 ‘배움’, 즉 호학이 그 뿌리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학문에 심취하였고 나이가 들수록 더욱더 공부에 힘썼다. 아버지 태종이 “과거를 보지도 않을 사람이 무슨 독서를 그렇게 고달프게 하는가?”라며 건강을 염려할 정도로 면학에 몰입하였다(세종은 훈련원의 습독관(교관)들에게 직접 병법, 즉 전술전략을 강의할 정도로 병서에도 능통하였는데, 이는 넓고 깊게 모든 분야를 통달하여 학문의 최고경지에 올랐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런 세종이었기에 놀랍다 못해 무서우리만큼 말과 글에 대한 깊고도 넓은 식견, 뛰어난 분석능력과 창의성, 불타는 열정과 굳센 의지를 통하여 완벽한 소리글자인 세계 최고의 문자를 창조하였다. 이는 배움에 몰두하여 학문의 극한에까지 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언어·문자의 연구를 위하여 명나라의 학자(한림학사) 황찬에게 성삼문, 신숙주 등을 보내어 자문을 구할 만큼 세종은 문자의 기본인 ‘음운학’의 대가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우리의 위대한 세종대왕은 이렇게 음운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비상한 예지를 바탕으로 세계 유일의 ‘철학적·과학적 문자’, 거의 완전무결한 세계 최고의 문자인 훈민정음, 한글을 창조하였던 것이다.

 

한글창제는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주체성과 신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결단의 역사적인 금자탑이다. 고군분투한 끝에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로 꽉 막힌 벽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의식혁명’의 개가였다(‘사대주의’란 주체성 없이 힘센 나라나 사람을 무조건 받들어 섬기는 태도다). 그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 발상의 대전환’을 능가하는 미증유의 대사건이었다. 그때는 한자 이외의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일이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다가 엄벌에 처해졌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시대적 상황이었을 것이다. 대국의 문자, 최고 유일한 한문을 두고 다른 글자를 만들어 쓰겠다니, 말도 안 된다는 극렬한 반대의 회오리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언문 창작이 만일 중국에 흘러들어 혹여 비난의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대국의 섬기며 중화를 받들어 따르는 데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언문을 따로 만든다 함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입니다” (세종 26년 어전회의)


“문자를 새로이 만드는 일이야말로 풍속을 바꿀 만큼 중차대하기 때문에 당연히 정승을 비롯하여 아래의 모든 신하들과 논의하여야 마땅한지라” (최만리, 반포 직후의 ‘훈민정음 폐기 상소’)

 

극심한 반발은 그칠 줄 몰랐고, 그래서였던가. 이상할 정도로 훈민정음의 창제에 관해서는 기록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 조정뿐만 아니라 민간의 사소한 사건까지도 실었던 실록(세종실록)에마저도 이를 거의 적지 않았다(조선왕조실록은 뛰어난 기록, 그 충실성으로 인하여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상소문에는 22번이나 ‘언문’(諺文, 쌍소리·욕 글자)이라 하였지만 훈민정음으로는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더욱이 훈민정음을 관장하는 기관의 이름조차 ‘언문청’이었다. 과거시험도 반포 직후에 단 두 번, 세종 28년과 29년에 말단 관리를 뽑을 때 훈민정음을 포함시킨 것이 고작이었다.

 

그다지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세종은 어떻게 해서든 기필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온힘을 다하였다. 하지만 한문을 신봉하는 리더그룹·사대부 대다수의 고정관념과 반발, 고착화된 사회적 인식과 통념을 세종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식을 낳은 것보다 몇 배는 더 소중하게 여겼을 문자가 탄생했음에도 한자를 의식하여 ‘글자·문자’임을 명확하게 나타내는 이름을 삼갔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훈민정문(正文) 또는 훈민정자(正字)로 이름을 짓지 않고, 굳이 소리를 뜻하는 ‘정음’으로 했던 까닭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창제 후 3년이나 지나서, 그나마 ‘정음’도 아닌 욕이나 적는 글자, ‘언문’ 공포라니 무슨 말을 더 할 것인가.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 높고 푸른 가을이 깊은 때였다. 세종은 도승지 황수신을 불러 결연한 표정으로, 그러나 늘 그러했듯이 부드럽고 차분한 음성으로 어명을 내린다. 도승지는 적이 놀라웠으나 전과 달리 더욱더 진지하고 겸허하게 왕명을 받아 이를 준행하였다. 그리하여 세종28년 9월 29일, 임금은 영의정을 필두로 만조백관이 입시한 경복궁 근정전에서 훈민정음을 반포한다. 극심한 산고를 겪으며 천신만고 끝에 1446년 10월 9일(양력, 한글날), 훈민정음이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임금께서 친히 언문 스물여덟 자를 만드셨다”(세종실록) 언문 공인 소식이 전해지자 한양은 된서리를 맞은 듯 싸늘하게 냉기류에 휩싸였다. 왜냐하면 친히 지은 문자를 언문, 즉 ‘욕 글자’라는 이름으로 공포함은 지존한 왕으로서는 더없이 큰 치욕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충직한 신하들과 뜻있는 유생, 선비들이 망극하여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함께 개탄과 자성의 목소리도 점점 커져갔다. 그래서 집현전 학사들 중에 최만리, 하위지 등 일곱 명만 폐기상소에 이름을 올렸고, 그들도 끝내는 지리멸렬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인지를 비롯한 ‘친간명유’(親揀名儒, 임금이 직접 뽑은 이름난 선비)들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위시하여 훈민정음 관련 서적의 편찬에 앞장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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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기상’이 민족정기를 지키고 한자를 눌러 이기며,

문예부흥, ‘글쓰기의 민주화’를 이루다

 

훈민정음의 창제로부터 450여 년이 지난 후, 위성지학(爲聖之學)을 추구하는 ‘선비정신’의 힘으로 오백년 역사를 면면히 이어왔던 조선이 일본의 침략에 힘없이 무너졌다. 그런데도 훈민정음, 한글만은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서서 일제로부터 민족정기·겨레정신을 지켜냈다. 서세동점(西勢東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조선에는 서양의 제도·문물이 밀물 듯이 쏟아져 들어왔고, 이를 나타내는 뜻 모를 말과 그것을 적은 낮선 문자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 같은 대변환의 사태와 시류를 한자·한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격변하는 시대 상황에 대응하여 이른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우리 고유의 전통을 보전하는 동시에 서양의 선진 문물과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상호 보완·통합하여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적극적인 개화·혁신 정책을 추진(甲午更張 갑오경장)하면서 일반대중에게 이를 알리고 이해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홍보수단, 즉 의사전달 방법이 여의치 않은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 배우기가 아주 쉬운데다가 우리말을 그대로 적을 수 있는 한글이 위력을 발휘하였고, 그것을 실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이다. 독립신문은 창간호에서부터 한자는 전혀 쓰지 않고 한글을 전용하였다. 그래서 인기가 순식간에 치솟아 올랐고 그 영향력은 날로 커져만 갔다.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4일, 정부에 인수되어 폐간되기까지 거의 4년 동안 격동의 시대에 ‘근대 민족주의·민주주의·자주적 근대화’를 구현하는 선각자·선구자로서 언론의 역할을 다하였다.

 

독립신문은 언론의 중요성을 실증적으로 인식시킴으로써 다른 민간신문의 발간에 길라잡이, 본보기의 역할도 하였다. 그리하여 한글전용의 제국신문, 매일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이 잇따라 창간되었다. 그리고 3․1운동 직후 1919년 8월 21일, 중국의 상하이에서는 또 다른 ‘독립신문’이 창간되어 1926년 11월 30일까지 무려 28년 동안 민족 언론으로 활약하였다. 이 신문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이념, 목적과 활동을 널리 알리고 임정의 요인과 한국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으며 독립정신의 고취, 일제침략에 대한 비판, 그리고 독립운동·항일투쟁을 적극적으로 격려하고 암암리에 지원하였다.

 

이처럼 독립신문을 비롯한 민간신문들은 암울하기만 했던 조선말기의 극심한 혼돈과 일제 식민통치의 폭압 속에서도 이른바 ‘자주국권·자유민권’을 주창하고 이끄는 눈부신 활동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몹시 힘겹고 어려웠으나, 이를 견디어내며 언론창달에 진력할 수 있었던 것은 한글만이 갖은 의사소통의 위력이 뒷받침된 데 있었다. 아울러 신문의 ‘우리말·우리글 쓰기’의 시너지효과는 한글이 이름그대로 ‘한겨레의 하나의 문자’로 자리 매김하는 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민족 언어·문자의 확대, 발전을 가져왔다.

 

인상적인 것은 우리 한글이 (한반도를 비롯한 한자문화권의 동아시아에서) 4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그야말로 동방불패를 이어오던 한자를 여지없이 눌러 이긴 놀라운 반전이었다. 그러므로 단언컨대, 훈민정음을 통하여 우리민족의 주체성과 자존감을 곧추세우려 했던 세종대왕의 원대한 꿈과 희망은, 창제의 바로 그 순간부터 실현되어 과거를 지나고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하여 끊임없이 이어져 갈 것이다.

 

훈민정음이 세계 최고의 완전한 문자인 만큼 조선 문학의 부흥, 혁명 또한 주도하였다. 의도하였든 아니든 한문학 일변도의 국문학에 훈민정음이 ‘한글문학’(국문문학)에 날개를 돋게 하였다. 한글문학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훈민정음 창제의 주된 목적일 수도 있었다. 창제 직후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이 지어졌고, 잇따라서 한문 원본의 서적들을 번역한 석보상설, 사서언해, 두시언해 등을 펴냈던 것이다.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고 ‘사랑’하여 누구든지 쉽게 익혀 쓰기 편하게 하고자 창제한 훈민정음은 문학의 부흥을 뒷받침하는 ‘글쓰기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문자를 쉽사리 배워서 생각과 말을 그대로 적고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한문공부가 여의치 않았던 사대부 여성들과, 특히 일반 백성들에게는 꿈같은 일이었다. 문자의 대중화는 사대부 부녀자들로부터 비롯된 ‘한글소설’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사대부와 일반서민 사이의 표현방식의 공유가 점차 확대됨으로써 인식의 공감대가 이루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대중적 민족문학으로서 우리말과 우리글로 쓴 한글문학이 비약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사대의 경향이 강했던 한문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창조적·주체적인 문학의 세계로 지평을 넓혀갔고 구비(口碑)문학까지도 기록문학으로 발전시킴으로써 그 영역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는 문학·예술은 말할 것도 없고 학문, 교육, 언론, 과학기술 등등, 정보통신·지식정보 시대의 모든 분야에서 중추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의미심장한 바는 빈부귀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자신의 의사를 ‘말’뿐 아니라, 극소수가 독점하였던 ‘글’로써 자유자재로 나타낼 수 있는 것. 이야말로 극심한 차별과 몰이해가 문자를 통하여 타파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훈민정의 창제·반포로부터 약 500년이 지난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거의 모든 조선 선비들은 대국 중국의 문자인 한자에 대한 숭상과 언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한글에 대한 불신이 지나친 나머지 끝내 한글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갑오개혁에 이은 독립신문의 창간으로 비로소 ‘한글전용’의 시대가 막이 올랐던 것이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민족과 국가, 그리고 언어가 있다. 하지만 고유문자를 쓰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세계의 5천여 가지 말 중에 100개 정도만 글자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한글은 가장 뛰어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우수한 문자다. 오늘날 첨단 정보통신시대의 ‘디지털·모바일’에 최적의 문자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사실이 한글의 우수성을 전적으로 말해준다. 이 같은 사실에 대다수 언어 전문가, 학자들이 기적이라 할 만큼 놀랍게 여기는 것 또한 우리한글이 과학적인 완전한 문자이기 때문이다(한글의 우수성이 인정되어 유네스코가 우리나라 국보이기도 한 ‘훈민정음해례본’을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처럼 한글이야말로 우리 한겨레의 정체성·자존감의 상징인 동시에 무한한 자부심이며 우리나라 제 1의 표상임을 마음속에 되새겼으면 한다. 나아가서 ‘세종정신’을 본받고, ‘한글의 기상’을 살려야 나라가 바로 서며 발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종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깊이 숙고하는 태도, 한글처럼 합리적이고 독창적이며 진취적인 기상을 길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세종대왕을 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받기 위하여 1397년 5월 15일, 겨레의 위대한 스승 세종의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고 1446년 10월 9일, 훈민정음 반포일을 ‘한글날’로 삼았는데 바로 오늘, 570돌을 맞았다. 이 뜻 깊은 날, 호학의 정신, 주체의식, 창조정신, 사명의식, 실천의지, 곧 ‘세종정신’을 우리 국민 모두가, 특히 위정자·지도자들이 반드시 본받고 따라야 할 강령임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이를 줄기차게 실천해 나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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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싱글벙글 2023/10/09 [19:27] 수정 | 삭제
  • 한글의 날을 맞아 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 좋은글 감사합니다.
  • kschoe 2016/10/10 [12:25] 수정 | 삭제
  • 한글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다시 한 번 더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빨리 한글을 국보1호로 지정을 하여야 하는데, 일본이 정한 숭례문을 아직도 국보1호라가 부르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 고물 2016/10/10 [10:15] 수정 | 삭제
  • 세종대왕님을 이야기 할때는 마인드 리더쉽 외뢰어는 뺏으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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