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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전제적(despotic) 통치 양식'에 종언을 명했다.

괜찮은 민주주의는 쉽게 오지 않는다. 비용을 치를 가치가 있다.

서울의소리 | 기사입력 2016/11/13 [11:37]

국민은 '전제적(despotic) 통치 양식'에 종언을 명했다.

괜찮은 민주주의는 쉽게 오지 않는다. 비용을 치를 가치가 있다.

서울의소리 | 입력 : 2016/11/13 [11:37]
[송호근 서울대 교수] 100만 촛불의 함성, 퇴진

시민 100만 명이 밝힌 촛불의 물결이 12일 오후 서울광장과 광화문광장, 세종대로를 가득 메웠다.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에서 상경한 이들은 “박근혜 퇴진”을 한목소리로 외쳤다. 단일 시위로는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때보다 많은 사상 최대 규모다. ©사진공동취재단

 

11월의 광장에는 실종된 주권의 행방을 묻는 시민들로 가득했다. 아니 비틀리고 오염된 주권이었다. 국민 행복과 원칙을 강조해 온 단아한 차림의 대통령이 그럴 거라곤 차마 믿지 못한 무고한 시민들이었다. 간간이 그런 조짐들이 삐져 나오기는 했지만 그나마 조금 남은 기대감에 매달렸던 사람들이었다.

 

실체가 드러나자 경악과 당혹감이 엄습했다. 지난 20여 일, 시민 모두가 정신적 공황 상태를 앓았고 자존심 증발에 몸을 떨었다. 고갈된 마음의 저변에서 분노와 수치심이 끓어올랐다. 광장은 참담한 심정을 달리 표출할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12일의 광장은 어떤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품었던 과거의 시위대와는 성격이 달랐다. 먼 곳에서 중·고등학생이 배낭을 메고 왔고, 중·장년들이 등산복 차림으로 왔으며, 청년들이 연인과 아이들의 손을 잡고 왔다.

 

박근혜를 찍었다는 행상 차림의 할머니는 아무나 붙잡고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정당 당원과 노조 조합원들이 ‘하야!’를 외쳤는데, 그것만으로는 주권자의 찢긴 상처를 위로하지는 못했다. 대통령을 감싸는 열혈 지지자들의 찬송 구호가 단말마처럼 솟구쳤으나 북악을 때리는 성토 함성에 파묻혔다.

 

대통령이 필사적으로 기댈 저 열혈 지지자들도, 방패와 헬멧에 앳된 표정을 감춘 어린 전경들도 4년 전 위임한 주권을 돌려달라는 시민의 호소가 정당함을 알고 있다. 정권의 정당성은 한번 깨지면 회복할 수 없는 유리그릇과 같다. 깨진 유리그릇을 수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정권의 수립이다. 설령 대통령의 배후에서 어찌 견뎌 보려 술수를 궁리하는 세력이 남아 있다면 국민 주권 원리에 거역하는 무뢰한, 이미 오염된 헌법 질서를 더 더럽히려는 역모자다.

 

전국 주요 도시의 터미널은 광화문으로 향하는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누가 권한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발길이었다. KTX 표가 일찌감치 매진되고, 서울행 고속버스도 만원이었다. 관광버스가 특수를 누렸다. 명절과는 역방향, 마치 삼천리 골짜기 지류가 모두 합류해 하나로 상행(上行)하는 강물이었다. 배낭에는 대통령에게 던지는 질문이 가득 들어 있다. 청와대를 호위무사로 채우고 국가의 공적 영역에 탐욕의 도당을 불러들인 그 대통령에게 말이다.

 

시민들은 오랫동안 품어 왔던 그 질문들을 광화문광장에 풀어놓고 촛불을 켰다. 오염된 주권, 훼손된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제례(祭禮)다. 통치자가, 집권세력이 그렇게 애틋하게 호명했던 ‘국가주의’를 시민 스스로 내치는 자율적 시민정치의 결단식이었다. 박정희 시대에서 딸에게 전승된 엄숙한 국가주의, ‘국가와 국민’을, ‘경제와 안보’를 남용해 시민 민주주의의 개화를 막았던 전제적(despotic) 통치 양식에 종언을 명했다. 국민과의 대화보다 비선(秘線)과의 밀회를 선택한 통치자의 마지막 결단을 촉구했다.

 

시민들은 묻는다. 대통령은 누구와 얘기했는가를, 대통령은 그때 어디에 있었는가를. 외로움을 토로했던 대통령보다 시민들이 더 외롭고 추웠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려와!’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어린아이 손에 들린 이 팻말은 어른들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지방에서 상경한 청소년들이 물었다. “왜 공부해야 하나요?” 그들의 손에 들린 ‘하야!’ ‘퇴진!’이란 글귀가 어떤 정치적 태풍을 몰고 올지를 그들에게 묻는 것은 잔인하다.

 

누가 서민의 활력을 거둬 갔는가? 운집한 군중 너머 농악이 시작됐다. 꽹과리와 징 소리가 시민들의 허망한 가슴을 채웠다. 젊은 음악인들은 해시태그를 섞어 랩을 노래했다. “하야, 하야, 하야….” 정치적 구호가 랩에 실려 퍼지자 촛불은 운무가 되어 흘렀다. 시위는 목숨을 건 충돌이 아니라 조롱과 냉소를 날리는 시민축제였다.

 

1500여 단체가 참여한 시민혁명의 밤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창의(倡義) 깃발이 함성에 나부꼈다. 남대문에서 시작된 군중 행렬이 서울광장을 거쳐 광화문광장 너머로 이어졌는데 중심부에 진입하지 못한 시민들은 골목길을 돌았다. ‘검찰은 똑바로~, 근혜는 우주로~’ ‘까도 끝이 없는 양파 매력 박근혜’-. 대통령을 냉소하는 풍자 ‘찌라시’가 뒹굴었다. 다양한 직업단체들이 외치는 구호와 박수 소리가 포성처럼 들려왔다. 어둠이 내리자 촛불이 켜졌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치켜든 수십만 개의 희망 촛불은 결국 승리할 것이다. 오후 9시, 전경들이 친 인(人)의 장벽을 뚫고 행진이 시작됐다. 어떤 권력이 시민들의 행진을 막으랴.

 

우리는 빈약한 내치를 묵묵히 감당했다고 해서 ‘하야’를 외치지는 않는다. 시민은 도덕적이다. 무능한 통치자라도 예의를 갖춘다. 북악 기슭 깊숙이 칩거한 대통령은 함성을 듣고 있는가? 어린아이가 치켜든 촛불의 의미를 깨닫고는 있는가? 공사(公私)를 섞고, 정보를 통제하고, 기업과 노동자를 곤경에 몰아넣고, 세무 감사와 사찰기관을 동원한 그런 권력을 더 연장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법치와 헌법 정신의 시민적 기원을 배반하는 민주주의의 적(敵)이 된다.

 

국정 전반에 최순실의 손길이 넝쿨처럼 뻗쳤고 청와대는 그것을 방조한 사당(私黨)이었다. 민주화 30년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대통령의 자기 검열에도 걸리지 않았다. 대통령은 국가의 어른이고, 헌법 수호자다. 대통령의 말과 행동은 국가 운명과 국민의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헌법 위반 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없는 대통령의 태도에 우리는 경악한다.

 

헌법 조항이 아니라 헌법 정신을 통째로 망가뜨렸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데 얼마나 더 많은 시민이 모여야 하는가?

얼마나 더 큰 함성이 필요한가?

100만 명이 아직은 적은가?

 

경제와 안보 때문이라도 정권 연장은 불가하다.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에게 주권을 당장 돌려주면 된다. 헌정 유린을 방조한 새누리당은 당장 해체하고 친박(親朴) 무리는 국민의 용서를 기다리면 된다. 최순실 사태에 연루된 인물들을 색출해 심판대에 세우면 된다. 헌정 회복의 전제조건이자 국가 위기를 푸는 첫 단계다.

 

이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대선 일정과 정권 교체에 관한 어떤 논리도, 상황 변화를 끌어들인 정권유지론도 모두 음모적이다. 헌정 회복의 거친 행로는 모든 권력을 국민에게 즉시 돌려준다는 대통령의 공식 선언에서 시작된다. 이후의 국가 운영을 국회가 맡든, 비상시국 국민회의가 맡든 그건 대통령이 우려할 바가 아니다. 하나 남은 정당성, 국회에 기댈 수밖에 없다. 두 개의 바퀴 중 하나가 빠진 상황, 이른바 ‘권력의 진공 상태’는 정치적 혼란을 필수적으로 동반한다. 집권을 향한 처절한 투쟁과 혼란이 겨울 내내 계속될 것이다.


어제의 시민집회는 시작이다. 시민정치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우리는 이미 예고된 ‘춥고 긴 겨울’을 감내할 각오를 해야 한다. 혼란비용을 줄이고, 정당 간, 사회집단 간 혈투를 어떻게든 조정해 나갈 것이다. 국가주의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시민정치의 공동과제가 그것이다. 우리는 민주화 이후 구축한 민주주의의 허점을 뼈저리게 알아차렸다. 어제의 함성은 민주정치의 총체적 재정비를 요구한다. 괜찮은 민주주의는 쉽게 오지 않는다. 비용을 치를 가치가 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 중앙일보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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